제143화
“한번 맞혀 보시겠어요?”
되돌아온 질문에 처음에는 음식을 유추하는 듯하더니 하나둘씩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타코야끼! 백야는?”
“난 아무거나 다 괜찮아.”
“No! 안 돼, 하나 무조건 말해야 해.”
“그럼… 라멘?”
백야가 말한 음식이 정답이었는지 PD의 표정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찰나였지만 그를 캐치해 낸 지한이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왜?”
“그냥.”
라멘 별로인가?
불안한 심리 상태와 더불어 상대가 조용한 또라이다 보니 백야의 생각이 이상하게 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새벽, 청과 율무가 몰래 라면을 끓여 먹다가 지한에게 걸려 혼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맞네. 쟤 라면 안 좋아하네.’
죽을 날을 받아 놓더니 눈치가 육체보다 먼저 사망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본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첫 메뉴가 라면이겠어.’
차가 천천히 멈춰 서는 느낌에 백야가 커튼을 들춰 보았다. 그러다 여의주 대신 밥그릇을 물고 있는 용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끕.”
움찔거리며 커튼을 놓친 백야에 PD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데이즈의 첫 번째 점심 메뉴는 50년 전통의 일본 라멘입니다. 입구의 용 간판이 굉장히 유명한 곳이죠.”
“라, 라멘이요?”
가게 이름은 번역하자면 <라멘을 품은 용>으로 화려한 입구만큼이나 거창한 뜻을 갖고 있었다.
생각나는 게 없어 대충 말한 것뿐인데 진짜로 먹게 되다니. 백야는 기분이 나빠졌다.
‘진짜 임종 음식 먹으러 온 느낌이잖아…!’
백야가 속으로 절규하는 사이 민성이 고개를 내밀며 웃어 보였다.
“잘 됐다. 라면 먹고 싶어 했잖아.”
“으응….”
민성이 마지막으로 내린 청을 챙기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도착한 스텝들이 준비를 마쳐 놓은 덕분에 촬영은 곧바로 이어질 수 있었다.
“우와! 우리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먹자!”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시켜.”
청의 옆자리에 앉은 지한이 막내의 폭주를 적당히 컨트롤했고, 율무와 메뉴판을 나눠 보던 유연은 여러 가지 맛을 시켜 나눠 먹어 보자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백야는 뭐 먹을래?”
“나는 그냥 아무거나.”
“라면 먹고 싶어 하던 거 아니었어?”
먹고 싶어 하던 음식을 먹으러 왔음에도 조용한 백야에 민성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속이 안 좋아? 멀미?”
“어? 아니야. 그냥 다 맛있어 보여서 고민하던 중이었어.”
혼자만 귀밑에 멀미약을 붙인 백야가 도리질 쳤다.
마지막 가는 길인 만큼 최대한 즐기기로 결심했는데 생각만큼 마음이 따라와 주질 않았다.
“형, 우리 만두도 먹을까?”
“그래.”
카메라를 의식해 애써 밝은척한 백야가 사이드 메뉴를 추가로 골랐다.
잠시 후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진수성찬에 멤버들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그런데 저희 이거 그냥 먹어도 되는 거예요?”
음식을 눈앞에 둔 유연은 섣불리 손대지 않았다. 예능 출연을 많이 하다 보니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걸 일찍 깨달아 버린 탓이었다.
“네. 정말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인서트 컷은 따로 촬영했으니 편하게 식사만 하시면 된다는 말에 청이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간장 베이스의 맑은 국물을 한입 떠먹은 청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부릅떴다.
“…미미!”
아름다운 맛이라는 뜻으로, 요리를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대사였다. 물어보나 마나 너튜브에서 배웠을 게 뻔했다.
청의 감탄사를 시작으로 데이즈는 본격적인 라멘 먹방을 시작했다. 50년 전통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맛이 일품이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밖으로 나온 멤버들은 다음 일정을 위해 쇼핑 천국이라는 신사이바시 상점가로 이동했다.
“데이즈 여러분, 저희가 사전에 요청드린 마니또는 잘 수행하고 계시나요?”
“네에~”
“오늘 저녁에 마니또를 공개하게 될 텐데요. 시즌 2의 첫 번째 미션을 드릴까 합니다.”
제작진이 숫자가 적힌 봉투를 내밀었다.
1번부터 6번까지 숫자가 적힌 봉투에는 모두 다른 금액이 들어 있었으며, 이 중 하나를 뽑아 마니또에게 줄 선물을 사 오면 되는 간단한 미션이었다.
뽑기 순서는 자유라는 말에 멤버들이 한데 모여 주먹을 내밀었다.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율무의 선창으로 각기 다른 모양이 나왔다. 좀처럼 나지 않는 승부에 몇 번을 더 반복하고 나서야 순서가 정해졌다.
“그럼 지금부터 자유시간 1시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물을 구매하셔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네에~”
멤버당 VJ가 한 명씩 따라붙게 되었다.
시작과 동시에 달려가는 청 덕분에 한쪽에서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지한이 자신의 마니또라 확신한 율무는 애먼 사람을 붙잡고 인절미 과자를 받고 싶다는 소리나 해대고 있었다.
율무의 곁에서 알짱거리던 민성은 과자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광장을 벗어났다.
“백도. 뭐 살 거야?”
“나? 난 그냥….”
한편 선물을 사러 가기 전에 자신의 마니또부터 확인해야 하는 백야는 유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눈치 없는 유연이 자꾸 함께 다닐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너 먼저 가.”
“왜. 같이 다니자.”
“아니야, 그냥 가. 나는 나중에 갈래.”
같이 다니기를 거부하는 모습이 수상해 보였는지 유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탐색하듯 백야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능글맞게 올라간 입꼬리가 확신에 찬 목소리를 뱉어냈다.
“아~ 내가 네 마니또구나?”
“그런 거 아니니까 빨리 가라고.”
“맞네, 맞아.”
유연이 선심을 써 주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내가 모른척해 준다.”
백야는 10여 분의 실랑이 끝에 유연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혹시 눈치 없는 거도 옮나….’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유연은 물론, 저 멀리 율무의 손에 끌려가고 있는 지한의 모습이 보였다.
* * *
‘망했네.’
제작진에게 물어본 결과 백야의 마니또는 정말 유연이 맞았다. 시작도 전에 들켜 버린 백야는 기분이 착잡했다.
왠지 하는 것마다 망하는 기분이랄까.
‘그냥 다 때려치울까….’
죽음을 목전에 둔 개복치는 뭘 하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드러그 스토어 앞에서 문어 인형을 구경하던 백야는 돌연 자신의 머리를 퍽퍽 내려치기 시작했다.
당황한 VJ가 말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순간 안경을 쓴 예리한 인상의 일본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
“저기, 실례합니다….”
꽤 가까이에서 소리가 들린다 싶었는데 백야를 부르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불현듯 눈앞으로 손이 튀어나오자 개복치가 깜짝 놀라며 세 걸음 멀어졌다.
“으갹!”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 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남자가 합장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스, 스미마셍…?”
스미마셍 하나만을 알아들은 한국인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도움을 구하는 눈이 VJ를 향했으나 단칼에 고개가 저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백야와 일본어 실력이 비슷한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왜 그러시는…. 나니?”
한때 유경이 웬 일본 애니메이션에 꽂혀 무슨 말만 하면 ‘나니’로 받아치는 바람에 저게 의문을 표하는 뜻이라는 것 하나는 알고 있었다.
“앗. 일본인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그쪽의 외모가 저희 회사에서 찾던 얼굴이라…! 혹시 아이돌을 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백야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 딱 한 단어 알아듣기는 했다.
아이도루.
“…아이돌?”
“네! 아이돌이요! 정말 저희가 원하던 초초초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
대답할수록 격해지는 반응에 백야는 살짝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 감독님 어떡해요? 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귀엽다는 말 같긴 한데…….”
“우웩. 아니, 이게 아니라. 그……. 튈까요?”
해코지를 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자꾸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뉘앙스에 VJ는 결국 촬영을 중단하기로 했다.
“혹시 한국인이신가요? 제가 스타로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백야가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자 남자는 작전을 바꿔 간절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상한 분 같네요. 백야 씨, 그냥 셋 하면 뛰세요. 이쪽은 제가 막아 볼게요.”
“네? 그럼 감독님은요?”
“저는 튼튼하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대신 카메라만 좀 챙겨 주시겠어요.”
“넵. 저만 믿으세요.”
두 사람이 결연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카메라를 넘긴 VJ가 은근히 앞을 막아서자 남자도 의도를 눈치챘는지 더 열정적으로 다가서려 들었다.
“제발 한 번만 말씀을 나눠 주세요. 당신의 귀여움이면 일본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요! 저는 확신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끈질기게 붙어오는 남자가 짜증 날 법도 한데 백야는 오히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VJ의 손 신호에 냅다 도망치려던 찰나,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남경과 덕진을 발견했다.
“어? 형!”
멤버들이 촬영을 잘하고 있는지 구경도 할 겸, 스텝들에게 돌릴 음료수를 사러 가던 두 매니저는 웬 남자와 실랑이 중인 백야를 발견했다.
“형! 도와주세요!”
도와달라는 말에 얼굴을 굳힌 두 사람이 얼른 백야에게 달려왔다.
“뭔데, 무슨 일이야?”
VJ의 옆으로 다가간 남경이 백야를 완전히 가리고 섰다.
남경은 아티스트를 포함한 ID 직원들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이었고, 비슷한 신장이더라도 마른 편인 율무보다 훨씬 풍채가 커 보였다.
“일행이신가요? 앗.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남경은 상대가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소속 캐스팅 매니저라는 걸 파악했다.
“저는 단지 저희 회사에서 찾고 있는 훌륭한 얼굴을 발견해서 너무 기쁜 나머지….”
“안타깝지만 저희 회사 소속 아티스트입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촬영 중이고요.”
남경이 능숙한 일본어를 구사했다.
“그런…!”
“계속 따라오실 건가요?”
높낮이 없는 어조였지만 남경의 눈빛이 퍽 살벌했다.
남자는 미련이 남는지 백야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선 두 매니저들의 기세에 눌려 조용히 돌아갔다.
“감사해요. 형 아니었으면 여기서 런X맨 찍을 뻔했어요.”
“아니야, 잘 불렀어.”
“그런데 뭐 하는 분이시래요, 저분?”
백야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동종업계. 너 캐스팅하려고 했다더라.”
“네? 에이. 말도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