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백야가 그럴 리 없다며 단칼에 부정했다. 그러나 매니저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오히려 백야의 대답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왜 말이 안 돼?”
“맞아요. 감히 어디서 저희 회사 에이스를 채 가려고! 백야 님은 절대 안 되지!”
덕진이 허공에 주먹질을 마구 날리며 분함을 표출했다.
“지, 진정하세요.”
덕진의 오버 액션에 백야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저희끼리만 있는 것도 아니라 더 부끄러웠다.
“백야 씨가 귀여움을 많이 받으시나 봐요.”
“그럼요! 저희 ID의 미래이자 단 2주 만에 데뷔조에 합류한 살아있는 레전드,”
“형! 제발요. 그만….”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백야가 덕진의 옷을 잡아당기며 애원했다.
한편 백야에게서 처음으로 ‘형’이란 호칭을 들어 본 덕진은 감격 어린 얼굴로 굳어 버렸다.
“아, 죄송해요.”
덕진의 반응을 오해한 백야는 허락 없이 옷을 잡아당긴 것 때문에 그런가 싶어 얼른 손을 뗐다.
그러나 손이 멀어지기 전, 줄곧 굳어 있던 덕진이 백야의 손을 잡아채며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백야 니임…! 드디어 제게도 마음을 열어 주셨군요!”
“네?”
“전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네에?!”
덕진의 엄청난 멘트에 백야는 잠시 사고 회로가 정지됐다.
한편 덕진의 백야 사랑을 아는 남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철없는 후배를 잡아끌었다.
“이래서 팬은 뽑으면 안 되는 건데. 이거는 늦덕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선배님께서도 들으셨죠? 백야 님께서 저를 형이라고, 큽.”
“그래, 그래. 축하한다. 아주 그냥 일기장에 적지 그러냐.”
“당연하죠! 오늘은 정말 기념비적인 날이에요.”
백야는 조용히 카메라 감독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매니저들에게서 멀어졌다.
“가, 감독님 저희 다른 데 가서 찍어요. 빨리요.”
* * *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한적한 카페에 모인 멤버들은 촬영을 재개하기 전, 백야의 길거리 캐스팅 소식을 전해 듣곤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우리 당백이~ 역시 외국에서도 먹히는 초 카와이 한 얼굴! 마약 복숭아네, 마약 복숭아~”
“햄스터 절대 지켜!”
청이 백야의 팔을 붙들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분 여기 안 계셔. 대체 다들 어떻게 아는 거야?”
분명 그 자리에는 저와 매니저, 카메라 감독님밖에 없었는데 멤버들을 비롯한 모든 스텝들이 백야의 캐스팅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이어진 증언에 따르면 멤버들은 미션 수행을 위해 가게를 돌고 있었는데, 각각 덕진과 남경이 나타나 주변을 한참이나 경계하다 떠났다고 한다.
‘회사의 인재를 빼앗길까 봐’라는 게 그 이유였다고 하는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국의 혹독한 연습생 트레이닝을 거쳐 끝까지 살아남은 애들이 외국의 길거리 캐스팅 한 번에 홀라당 튀겠냐고요.
그러고 보니 지척에 저보다 훌륭한 얼굴들이 다섯 개나 더 있었는데. 하필이면 저한테 명함을 내민 일본인도 참 운이 없었다.
‘그분이 내가 아니라 얘네를 봤어야 했는데.’
새삼 멤버들의 얼굴이 잘났다고 생각한 백야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백야는 자신의 외모가 여전히 평범하다고 믿고 있었다.
“표정 뭐냐.”
“너랑 같이 있었으면 그분께서도 생각이 달라지셨을 텐데.”
“뭐?”
“됐고, 나 지금 쪽팔려 죽을 것 같아.”
“부끄러울 것도 많다. 남들은 캐스팅되고 싶어서 안달인데.”
백야가 고개를 숙이며 마른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좀 뻔뻔해졌나 싶었더니.”
유연이 백야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 주었다.
한편 백야의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본 율무와 청은 멤버의 자존감을 높여 줘야 한다며 면전에 갖은 칭찬을 퍼붓고 있었다.
“힘내! 세계 최강 햄스터!”
“과즙 팡팡! 당도 백 프로!”
모른 척 내버려 두기엔 수치사 할 것 같았던 백야는 결국 관심 종자들의 어그로에 반응하고 말았다.
“야! 하지 마, 너희 둘은 그냥 입을 열지 마.”
백야가 가까이 있던 청의 목을 잡아채 헤드록을 걸었다.
“아악! 나 죽는다! 죽어! 율무 도움!”
잽싸게 도망쳤던 율무가 청의 SOS를 듣고 다시 다가왔다. 그러나 희번덕이는 눈빛 한 번에 곧장 백기를 들었다.
입에 지퍼를 잠그는 척 손동작을 한 율무는 항복의 의미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데이즈 다시 촬영 시작할게요!”
스텝의 외침에 멤버들이 다시 대열을 갖춰 섰다. 지한과 민성의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던 스타일리스트들도 빠르게 촬영장을 벗어났다.
“하나~ 둘 셋.”
짝-.
슬레이트 대신 율무가 손뼉을 치며 녹화가 재개됐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멤버들~ 생일 축하합니다~”
중간쯤부터 청과 유연까지 합세해 생일 노래가 거창해졌다.
촬영이 시작되자 급 달아오른 텐션에 백야는 버거워했고, 지한은 열창 중인 율무를 신기하게 구경했다.
“네, 저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요. 바로 마니또를 공개하고 선물 증정식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노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민성은 2절이 시작되기 전에 끼어들며 흥을 차단했다.
“각자 지급 받은 용돈으로 선물을 준비했는데요. 마니또를 공개하기 전에 자신이 추측한 마니또가 누구인지도 말해 주셔야 합니다.”
민성이 멤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누구 먼저 할까요?”
“저희 사이에 또 룰이 있잖아요? 1번은 역시 백도라고 생각합니다.”
“고유 1번 한당백~”
“1번은 햄스터가 국룰이지!”
멤버들의 성원에 힘입어 백야가 시작을 맡게 되었다.
“나를 마니또로 뽑은 것 같은 사람을 먼저 말하면 되는 거지?”
“그렇지.”
민성이 고개를 주억이자 멤버들을 둘러보던 백야가 지한을 지목했다.
백야의 선택을 받은 지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지키는데, 오히려 율무가 거만한 표정으로 반박해왔다.
“아니야~ 지한이는 내 거야.”
“내가 지한이 같은데….”
“이유가 뭔데? 난 진짜 많아. 얘가 아까 비행기에서 오사카도 해 주고 이렇게 안아도 아무 말,”
“떨어져.”
“안 했었는데…. 왜지?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거지?!”
둘 중 그 누구도 자신의 마니또가 아니었지만, 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이 웃긴지 지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나는 얘가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말하라 그랬고, 또 요즘 차도 많이 끓여 마시는 것 같고.”
“차? 그건 무슨 상관이야.”
“남경이 형이 요즘 자꾸 도라지 차를 먹이려고 해서.”
백야는 전기 포트를 가장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지한이라서 오해한 것 같았다.
그 시각 백야의 진짜 마니또는 시무룩한 얼굴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햄스터 실망이야.”
“너야?”
청의 목소리를 들은 유연이 옆을 돌아봤다.
“내가 진짜 잘해 줬는데…. 역시 갈색 머리 동물은 잘해 주는 게 아니야.”
민성에게 <한국 속담 100가지> 책을 선물받은 청은 항상 2% 부족한 속담을 구사했다.
활동 때문에 한국어 공부를 소홀히 했더니 머릿속이 엉망인 모양이었다.
“야, 근데 원래 마니또가 몰라야 잘한 거야. 쟤가 한 번에 너 맞혔으면 네가 잘못한 거지.”
“오호?”
생각해 보니 서운해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운을 되찾은 청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백야를 불렀다.
“바보야! It’s me!”
청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선물들 중 제일 큰 상자를 집어 백야의 품에 안겨 주었다.
“내 선물이야!”
크기가 커 제작진과 멤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물건이었다.
“내 마니또가 너였다고?”
“목 관리하라고 내가 매일 차도 끓여 줬는데. 나 아침에 일어나는 거 진짜 힘들었다 햄스터야.”
백야는 청이 마니또였다는 사실보다 그 끓는 물이 암살 시도가 아니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나 아니라고 했잖아, 열어 봐.”
도대체 뭘 사야 포장이 이렇게 크냐며 지한이 관심을 보였다.
멤버들의 재촉에 상자를 열어보자 앙증맞은 눈코입과 눈이 마주쳤다.
‘벌칙인가.’
당황한 백야는 저도 모르게 상자를 다시 닫을 뻔했다.
“빨리 꺼내, 빨리!”
백야보다 더 신이 난 청은 앉은 자세로 몸을 들썩거렸다.
“이게 뭔….”
허리가 반으로 접혀 있는 납작 곰돌이를 구해 내자, 그 아래로 각종 군것질거리가 가득 쌓여 있었다.
백야가 곰돌이와 아이 컨택을 하는 동안 청이 자신의 앞으로 상자를 끌고 왔다. 마니또 대신 쇼핑 목록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었다.
“이거는 피치 담요고, 이거는 피치 모자, 그리고 피치 빵이랑 피치 젤리!”
“마지막은 그냥 네가 먹고 싶어서 산 거 아니야?”
“Hey. 조용히 해.”
정답이었는지 청이 유연의 발을 툭 건드리며 경고했다.
“근데 이걸 다 살 돈이 됐다고? 너 돈 얼마 받았냐.”
“싸. 다해서 만 원밖에 안 했는데?”
“만 엔?”
청의 대답에 멤버들의 눈이 커졌다.
만 엔이면 대충 한국 돈으로 1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인 데다, 멤버들 중 가장 높은 금액의 용돈이었기 때문이다.
“오~ 청청이 방금 대사 좀 멋있었어~”
“당근 하지!”
율무가 엄지를 치켜들자 청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리고 테디 베어는 나쁜 꿈 대신 먹어 주는 Nightmare 인형이래! 백야한테 필요한 거!”
청이 납작한 분홍색 곰 인형을 가리키며 뿌듯해했다.
부드러운 촉감에 무의식적으로 배를 쓰다듬고 있던 백야는 흠칫하며 손을 떨어뜨렸다.
하찮아 보이는 인형에 그런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니. 백야는 조금 감동했다.
우리 청이는 다 계획이 있구나.
“마음에 들어?”
청이 다시 상자를 돌려주었다. 칭찬을 바라는 얼굴에 백야가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어. 고마워.”
이어서 나머지 멤버들도 차례대로 마니또를 공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율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마니또로 지한을 지목했지만, 지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너 진짜 아니야?”
“아니라고.”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야? 그럼 내 마니또는 누군데?”
“나다. 이놈아.”
민성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커다란 쇼핑백 가득 인절미 과자를 선물 받은 율무는 뒤늦게 애교를 부리며 민성의 기분을 풀어 주려 애썼다.
이어서 유연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당당히 백야를 지목했고, 백야는 말없이 유연의 품에 선물을 안겨 주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나 따돌리고 얼마나 대단한 거 사 왔는지 한 번 볼까~”
백야가 문어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모습을 본 유연은 대충 선물이 짐작 간다며 넘겨짚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건 캐릭터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멤버들이 즐겨 보는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의 사슴 캐릭터라 못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어? 왜 이거야?”
“왜, 별로야? 그럼 다시 내놔.”
“에이,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유연이 손을 높이 들며 백야를 피했다.
“문어 인형 앞에 서 있길래 당연히 그건 줄 알았지. 난 이게 더 마음에 들어. 땡큐.”
유연이 보조개를 지으며 손가락에 고리를 걸었다. 빙글빙글 돌리며 고개를 돌리자 심각한 얼굴의 지한이 보였다.
“푸핫! 지한이 형 표정 봐.”
웃음이 터진 유연이 지한을 가리키자 그가 태연한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왜. 생각하던 사람이 마니또가 아니었나 보지?”
“응. 내가 백야인 줄 알았어.”
백야를 보는 지한의 눈에 작은 실망이 어려 있었다.
“나?”
“응, 나 가지고 논 거야?”
조또의 기습 공격에 백야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엄마 쟤 미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