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백야가 지한을 경계하며 몸을 옆으로 붙였다. 다가온 만큼 비좁아진 왼쪽 자리에 청과 유연, 민성의 원성이 들려왔다.
“아악! 나 떨어져! 떨어진다!”
“잠깐만, 백도 밀지 마.”
“어우. 좁아.”
유연과 백야 사이에 낀 민성이 미간을 찡그리며 지한을 바라봤다.
“넌 또 왜 그러니…. 라면 잘 먹고 왜 그래 정말….”
“장난이었는데.”
늘 말하지만 네가 하는 말은 다 진심 같다며 양심이 있으면 거울을 좀 보라는 항의가 이어졌다.
“나보다는 청이가 더 무섭게 생기지 않았나.”
“No! 무슨 소리야? 나는 병아리야. 삐악삐악.”
같은 계열인 주제에 매몰차게 선을 그어 버리는 청에 지한이 실소를 터뜨렸다.
“난 진짜 백야인 줄 알았어. 나만 보면 자꾸 도망가길래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
“그거야 네가 자꾸 괴롭히는 놈 이름을 말하라 그러니까….”
지한의 말도 안 되는 오해에 백야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래서 지한이 진짜 마니또는 누구야?”
백야가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그러자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율무가 쇼핑백을 집어 지한에게 내밀었다.
“야, 오다 주웠어.”
이번에는 상남자 컨셉인지 율무가 잔뜩 멋있는 척을 하며 다리를 꼬았다.
평소보다 더 치대는 것 같긴 했는데 마니또여서 그랬다니.
지한이 피식이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선물을 개봉하자 안에 들어 있는 건 만화 영화에서 본 것 같은 고양이 반가면이었다.
그를 본 민성이 정말 쓸데없다며 감탄했다. 백야도 저것을 돈 주고 샀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지 진지하게 물어왔다.
“진짜 주운 거야? 어디서?”
“아니거든?! 그냥 장난이었다고.”
“보나 마나 고양이라고 샀겠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는 지한은 군말 없이 가면을 착용했다.
아직 촬영이 한창이니 얼굴을 가릴 수는 없고, 머리 위로 올려 비스듬하게 돌리자 노란 방울과 태슬이 어깨 위로 떨어지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쓸 일 없을 것 같으니까 잠시만 쓰고 있을게요.”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다니까~”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같은 모습에 율무가 기뻐했다.
이제 남은 멤버는 민성과 청이었다. 두 사람은 남은 마니또 후보 중에서 한 사람씩 동시에 지목하기로 했는데.
“하나~ 둘~ 셋!”
“지한이.”
“지한!”
유연과 지한 중 지한이 몰표를 받게 되었다.
“우리 지한이 죄 많은 남자였네~”
“뭘 하고 다녔길래 형이 다 자기 마니또래?”
율무는 놀리듯 약 올리는 반면 유연은 조금 억울해하는 목소리였다.
선물을 집어 민성의 손에 쥐여 준 유연은 사람이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며 타박했다.
“너라고? 왜?”
“왜는 무슨 왜야. 내가 형 뽑았으니까 그러지. 이것 봐, 잘해 줘 봐야 소용없어.”
유연이 사 온 선물은 파스 세트였다. 동전 모양부터 손바닥만 한 크기까지 다양하게도 들어 있었다.
“파스네. 근데 이건 나보단 너한테 더 필요한 거 아니야?”
“같이 쓰는 거지 뭐. 넣어 둬, 넣어 둬.”
민성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유연은 능청스레 넘겨 버렸다.
“나는 지한 맞췄다!”
지한의 선물을 집어 든 청은 묵직한 무게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능적으로 대단한 물건이 들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포장지를 뜯자 정체를 드러낸 상자에는 먹음직스러운 타코야끼 사진이 그려져 있었다.
“타코야끼!”
“타코야끼는 아니고 만들 수 있는 기계야.”
지한이 청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비행기에서부터 타코야끼 노래를 부르던 청에게 안성맞춤인 선물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 같이 만들어 먹자는 약속을 끝으로 선물 증정식은 끝이 났다.
“그럼 저희 이제 뭐 해요?”
민성이 백야의 납작 곰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백야의 손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재질에 저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가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첫날인 만큼 많이 피곤하실 것 같아서 이만 숙소로 이동하려고 합니다.”
제작진은 그곳에서 간단한 게임 후, 저녁 식사를 하는 것까지가 오늘의 일정이라고 했다.
‘너무 놀기만 한 것 같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루 종일 먹고 웃고 떠든 기억밖에 없어서 스트레스 지수도 거의 그대로였다.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잘하면 내일 아침 해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시즌2 첫 번째 숙소는 공중 관람차가 보이는 현대식 다다미방이었다.
체육대회를 해도 될 만큼 넓은 방에 멤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근데 햄스터야. 여기 침대는 어디 있나?”
“바닥에서 자는 거야. 이불 펴고.”
촬영 준비를 하는 동안 데이즈는 숙소 탐방이 한창이었다.
한쪽 구석에 짐을 풀어놓은 멤버들은 제작진이 준비해 놓은 간식을 먹으며 창밖을 구경 중이었는데.
“데이즈 촬영 들어갈게요~”
“네!”
촬영을 재개한다는 말에 멤버들이 쏜살같이 달려갔다.
“간단한 밸런스 게임만 하고 정말 휴식시간 드릴게요.”
바닥에 나란히 앉은 멤버들은 제작진을 향해 오래 하셔도 괜찮다며 방긋거렸다.
“이번에 준비한 게임은 밸런스 게임이고요. A와 B가 적힌 패널을 한 세트씩 나눠 드렸습니다. 제한 시간 안에 두 개의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제한 시간을 초과할 경우 탈락 처리되며, 결과에 따라 내일 지급될 용돈이 정해지니 참고 부탁드린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거 그거 아니야? 백도랑 율무 형이 했던 거. 둘이 진짜 안 맞던데.”
“이번에도 안 맞으면 진짜 웃기겠다. 기대할게.”
민성이 율무와 백야를 번갈아 보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이었다.
[아침밥 vs 아침잠]
“저는 무조건 아침밥이죠~”
“나도.”
율무와 민성이 보기를 보자마자 A 패널을 들었다. 평소 부엌 출입이 잦은 두 사람은 주로 시리얼이나 식빵 같은 것들로 아침을 때우곤 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B를 들었다.
“아침에 어떻게 밥을 먹어?”
백야는 지금도 당장 저녁밥보다는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두 번째 질문.
[겨울에 입수하기 vs 여름에 패딩 입기]
극단적인 보기에 멤버들이 술렁거렸다.
“민성, 입수가 모야.”
“물에 들어간다고. 다이빙.”
“Oh my god! 겨울에?”
청이 경악하며 B를 들었다. 다른 멤버들도 줄줄이 B를 들었지만 율무는 A를 선택했다.
“형 겨울에 입수 가능하다고? 알겠어. 올겨울 기대해.”
유연이 놀려 먹을 건수를 하나 잡았다며 즐거워했다.
“잠깐만. 나만 A야? 당백이는?”
“난 B 했는데.”
율무가 눈을 크게 뜨며 패널을 확인했다.
“왜?! 너 언제는 여름 싫다며. 더운 거 극혐이라더니?”
“아무리 그래도 겨울에 입수는 좀. 패딩 입고 에어컨 틀면 되잖아.”
백야를 의식해 A를 선택한 율무만 바보가 되었다.
“현명한데?”
우리 백야가 똑똑해졌다며 민성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질문.
[평생 고음 불가 vs 저음 불가]
보기를 보자마자 지한이 A를 들었다. 그를 본 유연이 진심이냐며 놀란 얼굴을 했다.
“전 잔잔한 게 좋아요. 그리고 지금도 고음은 안 돼. 딱히 불편한 점도 없고.”
지한의 대답이 납득 간다며 유연과 청도 A를 들었다.
한편 보컬 라인은 주로 B를 선택하는 것 같았는데, 의외로 백야가 A를 들면서 멤버들의 의문을 샀다.
“왜? 이제 고음 너무 많이 해서 질렸나?”
청의 물음에 백야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개인적으로 지한이나 율무처럼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좋아.”
데이즈 고음 셔틀의 충격 발언에 멤버들이 파업 선언이냐며 술렁였다. 그에 백야는 게임은 게임일 뿐, 취향을 존중해 달라며 논란을 일축시켰다.
“PD님 얼른 다음 질문 주세요.”
“네. 사실 방금까지는 연습 게임이었고요, 지금부터가 진짜 본게임입니다.”
제작진은 보기를 보여 준 뒤, 딱 5초만 드릴 거라며 규칙을 알려 주었다. 그 안에 패널을 들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탈락이었다.
“그럼 문제 드리겠습니다. 10년 동안 이 멤버랑만 방을 같이 써야 한다면?”
[이 가는 유연 vs 밤새 장난치는 청]
연습 게임과 다르게 난이도가 대폭 상승한 걸 알 수 있었다.
잠귀가 밝은 지한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그사이 5초가 빠르게 카운트되고 멤버들이 허겁지겁 패널을 들었다.
청만큼은 B를 선택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멤버들 전원 A를 선택해 유연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야, 너는 왜 너 안 뽑았어.”
“나도 이제 나이 들어서 밤새는 건 힘들어.”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이어서 다음 문제.
탈락자가 나오지 않은 관계로 난이도를 조금 높여 보겠다던 제작진은 대놓고 막내즈를 노린 질문을 공개했다.
[혼자 공포영화 보기 vs 백야/청이랑 같이 귀신의 집 들어가기]
“백야랑 귀신의 집? 절대 못 들어가지! 나는 진짜 괜찮은데 햄스터가 죽을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네가 지난번에 귀신의 집 혼자서도 들어갈 수 있다며.”
백야가 손을 뻗어 청의 A 패널을 빼앗아 왔다.
“모야! 이런 조폭 햄스터!”
“PD님, 청이 혼자 귀신의 집 들어가는 특집 해 주세요. 저번에 쟤가 자기 혼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랬어요.”
마침 일본에 유명한 귀신의 집이 있지 않냐며 물어보자 청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아악! 유연! 빨리 저거 입 막아!”
“내가 왜.”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유연과 민성이 막내즈를 떨어뜨려 놓았다.
청과 백야가 실랑이하는 사이 지한과 율무는 A를, 민성과 유연은 B를 고르며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백야는 깔끔하게 기권을 선택한 반면 청은 A 패널을 빼앗겨 억울하게 탈락했다.
“나 진짜 귀신 안 무섭다니까?”
“그럼 B 들면 됐잖아.”
“B 하면 백야도 같이 들어가야 하니까 그랬지.”
“내 핑계 대지 마.”
탈락과 동시에 가장자리로 옮긴 막내즈가 낮은 소리로 투닥거렸다.
“다 들린다~ 너희 자꾸 싸우면 진짜 귀신의 집에 넣어 버린다.”
민성의 경고에 막내즈가 입을 합 다물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질문.
더 빠른 진행을 위해 난이도를 한 번 더 상승하겠다며 제작진이 공개한 보기는 데이즈를 경악에 빠뜨렸다.
[율무가 나를 구석구석 씻겨 주기 vs 내가 율무를 구석구석 씻겨 주기]
“아…….”
“와. 최악이다, 진짜….”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기권자가 속출했다.
청과 백야도 입을 틀어막은 채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난이도 상’ 보기에 즐거워하는 사람은 율무가 유일했다.
“나도 별로거든? 그래도 뽑아 주면 잘 씻겨 줄게. 픽미 픽미 픽미업~”
선거 유세하듯 A 패널을 흔들며 춤을 추는 모습이 굉장히 약 올랐다.
“염병. 너 다해라.”
“형이 이겼어.”
민성과 유연이 질색하며 패널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지한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B를 들어 율무의 어그로에 대항했다.
“저도 잘 씻겨요. 오리 배 띄워 줄게.”
두 또라이의 대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