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 * *
먼저 초록색 망토를 입은 지한&청팀은 다이너소어 파크의 미션을 진행 중이었다.
미션 북을 펴자마자 눈에 들어온 목이 기다란 초식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에 꽂힌 청이 지한을 막무가내로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위에 다이너소어!”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공룡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싶더니, 커다란 간판 위로 익룡이 날갯짓을 하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진 찍어, 사진!”
서 보라고 말하기도 전에 입구를 향해 뛰어간 청은 철조망을 짚고 포즈를 취했다.
“쟤도 보이게!”
“알겠어.”
지한이 스텝에게 핸드폰을 받아 왔다. 그는 청과 한 팀이 된 순간 오늘 하루 찍사 신세를 면치 못하겠구나 예상했다.
“찍었어? 그럼 지한도 찍어!”
“나는 안 찍어도 돼.”
“아니야, 빨리 가!”
제법 단호하게 거절했으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청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날씨가 조금만 흐렸어도 텐션이 덜했을 텐데. 눈이 부시게 화창한 날씨라 더 폭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의 햇빛에 신이 난 캘리포니아 보이는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었다.
“Say cheese~”
“…….”
“Cheese!”
“……김치.”
치즈를 강요하는 외국인에게 지한이 김치로 반항했다.
공룡과 수줍은 투 샷을 남긴 지한은 눈앞의 천방지축이 다른 곳으로 튀기 전에 얼른 미션 장소로 데려가야겠다 생각했다.
“가자.”
“트리케라톱스!”
“응. 거기 아니야.”
“스테고사우루스!”
“응. 이리 와.”
어렸을 때 공룡을 많이 좋아했는지 청은 눈에 보이는 공룡 모형들의 이름을 척척 맞히고 있었다.
저 어려운 이름들을 줄줄이 외우고 있다니. 혹시 우리 막내가 천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집중. 우리는 여기 나온 얘를 찾아야 해. 이건 이름이 뭔지 알아?”
“티라노사우루스!”
“그래. 그걸 찾아.”
티라노사우루스라면 지한도 익히 아는 공룡이었다.
제일 크고 험악하게 생긴 공룡을 찾으면 되겠다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웬 앙증맞은 주황색 손이 지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
뒤를 돌아보자 유머 짤에서만 보던 에어 티라노사우루스가 눈앞에 서 있었다. 뻗은 팔에 카드가 묶여 있는 걸 보아 아마도 그 안에 미션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청은 표지판을 보느라 아직 티라노사우루스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청청.”
지한이 청을 부르며 미션 카드를 수령하자 티라노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모야? 그거 어디서 찾았어?”
“저 공룡이 줬어.”
지한이 뒤뚱거리며 멀어지는 티라노를 가리켰다. 한눈에 봐도 재미있어 보이는 공룡에 청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나 청이 한눈을 팔게 내버려 둘 지한이 아니었다.
“네가 읽어.”
“응!”
[공룡 화석 발굴하기 프로젝트 : 테마파크 곳곳에 흩어진 티라노사우루스의 다리뼈를 찾아보자!
힌트 : 소금 맛 / 바비큐 맛]
대놓고 맛있는 것을 먹이겠다는 미션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조용한 또라이와 지옥에서 온 캘리포니아 보이.
칠면조 요리를 파는 가판대 옆에서 방금 전 미션 카드를 주고 간 티라노가 짧은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청청. 쟤 다리 두 개 맞지.”
“저거 잡는 게 미션인가?”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자 티라노는 조금 더 오버해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청과 지한이 미션을 이해한 줄 알고 흥에 겨워하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티라노의 의중을 단단히 오해했다.
“잡아.”
“가자!”
엉덩이를 씰룩이던 티라노는 달려오는 청과 지한을 보고 흠칫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가판대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줄 알았으나 방향이 묘하게 가게를 비켜가고 있었다.
“거기 서! 움직이지 마!”
그러다 티라노를 가리키는 청의 제스처를 보곤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청과 지한이 미션을 잘못 이해한 게 틀림없었다.
가뜩이나 차갑게 생긴 외모들인데 잡히면 죽여버리겠다는 얼굴로 달려드니 티라노가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야! 나 말고 옆에 치킨!
티라노 에어 수트를 입은 스텝이 짧은 다리를 교차하며 자신은 미션과 관계가 없음을 어필했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 슬X데린은 꽂힌 게 있으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들이었다.
알아주는 인성 파탄자들의 살인 예고에 겁먹은 티라노는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줄행랑을 택했다.
* * *
그 시각 빨간 망토 율무차와 유연은 워터 월드를 거닐고 있었다.
“우와~ 유연아 저기 상어 봐. 엄청 커.”
“진짜같이 생겼다.”
크와아아앙!
워터 월드 중심부의 커다란 호수에 대형 상어가 나타나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사방으로 물 폭죽이 터지며 보트 위로 물이 쏟아지자 탑승객들이 기분 좋은 비명을 질렀다.
“저거 재밌겠다~ 우리도 저거 탈까?”
“나는 저거 말고 저거.”
유연이 가리킨 곳에는 아찔한 높이를 자랑하는 롤러코스터가 있었다.
마침 제일 높은 곳에 멈춰 있던 보트가 천천히 아래로 기울더니 빠른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온 워터 보트는 구경하던 관광객들의 옷까지 젖게 만들었다.
“콜! 더 엄청난 게 있었네~”
“형 놀이 기구 잘 타?”
“당연하지. 난 이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야.”
율무는 자신이 돌잡이 때 불꽃을 잡은 사람이라면서,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겁이 없었다는 TMI를 들려주었다.
“그런 것치곤 귀신의 집에서 너무 놀라던데.”
“그건 지한이 때문이지~ 오해야. 여기 온 김에 다시 가 볼까? 놀이공원이니까 귀신의 집 하나쯤은 있겠지.”
“싫어. 혼자 들어가.”
“왜에~ 같이 가자~”
율무가 유연의 팔을 흔들며 장난쳤다.
“무서운 게 없다면서. 증명해 봐.”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더 재밌지~”
두 사람은 워터슬라이드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워낙 인기 있는 놀이 기구라 찾아가는 길은 쉬웠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곳곳에 빨간 망토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유연이~ 풍선 하나 사 줄까?”
“응. 사 줘.”
다양한 모양의 헬륨 풍선 중에서도 유연은 안경을 쓴 노란 캐릭터를 골랐다.
줄을 튕기며 몇 번 가지고 놀던 그는 이내 율무의 손목에 풍선을 묶기 시작했다.
“형은 어디로 튈지 몰라서 이런 거라도 달아 놔야 해.”
“내 나이가 몇인데 이건 좀….”
“그럼 나는. 이걸 들고 다닐 나이야?”
“너는 동생이잖아~ 우쭈쭈.”
“아, 하지 마.”
유연을 놀리는 척 은근슬쩍 손목을 빼내려던 율무는 금세 저지당했다.
“어딜. 형이 이걸 달고 있어야 내가 편하다고. 자, 빨리 와. 저거 타러 가게.”
그러나 한 걸음 떼기 무섭게 이번에는 추로스 가판대가 그들을 유혹했다.
“추로스?”
“콜.”
아닌 척하지만 유연은 율무와 죽이 제법 잘 맞는 편이었다.
기다란 추로스를 하나씩 든 빨간 망토들은 다시 워터슬라이드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몇 발자국 떼지 못해 또다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번에는 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 커다란 상어 모형 때문이었다.
“아까 그거 잡았나 보네~”
“이빨 봐. 진짜 같아.”
바로 옆에 경찰 서장 옷을 입은 캐릭터가 서 있었지만, 미션 북을 펼쳐 보지도 않은 두 사람은 그대로 지나쳤다.
이후 기념품 샵에 들려 곰돌이 머리띠를 하나씩 구매하고, 다른 멤버들의 것까지 쇼핑한 뒤에야 놀이 기구 대기 줄에 합류할 수 있었다.
평일 비수기인 데다 패스트 입장권을 소지한 탓에 유연과 율무는 대기 없이 곧장 탑승할 수 있었다.
“앞자리는 조금 떨린다. 아까 사람들 보니까 옷 다 젖었던데.”
“우비 입었는데 뭐~ 즐겨, 즐겨.”
망토 대신 우비를 입은 두 사람은 운 좋게도 제일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안전바 상태 점검까지 마치자 출발을 알리는 안내가 들려왔다.
유연과 율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직원의 옆으로 카메라 감독님이 함께 보였다. 두 사람이 인사에 화답하듯 손을 흔들자 워터 보트가 천천히 출발했다.
“오, 간다, 간다! 우리 우비 입었으니까 옷 괜찮겠지?”
“괜찮아. 옷 젖으면 벗으면 되지 뭘~ 내가 말려 줄게.”
“벗긴 뭘 벗어!”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워터슬라이드는 천천히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오오~ 다 왔어, 다 왔어.”
“어떡해, 너무 재밌겠다.”
안전바 아래로 유연의 다리가 동동거렸다.
달가닥-.
천천히 느려지던 보트는 안전장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정점에서 멈춰 섰다.
탑승객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짧은 순간이 지나고, 보트는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급하강했다.
“내려간다!”
“우와악!”
워터슬라이드는 중간쯤부터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더니 완전한 수평이 되자 커다란 파도를 만들어 냈다.
촤아아아-!
제작진은 장비 보호를 위해 제법 떨어진 곳에서 촬영하고 있었음에도 물보라를 맞았는지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푸하하! 옷 다 젖었어!”
“형, 너무 재밌어!”
율무와 유연이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잠시 후 기구에서 내린 두 사람은 우비를 입은 보람도 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돌아왔다.
“우리 망토 못 입겠는데.”
“에이~ 금방 말라.”
나란히 흰색 상의를 입은 탓에 두 사람의 상체가 선명히 비쳤다. 티셔츠 아래로 복근 라인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곰돌이 귀 머리띠를 벗은 율무가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자 곳곳에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미소년들의 출현에 홀린 듯 발걸음을 멈춘 관광객들이었다.
“머리 다 젖었네. 언제 마르냐.”
반대로 고개를 숙인 유연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물기를 덜어내고 있었다. 빛을 받은 물방울이 반짝이며 아래로 떨어졌다.
대충 물기를 없앤 유연이 고개를 들자 율무가 음흉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표정이 상당히 기분 나쁜데.”
“어차피 젖은 거 한 번 더?”
자신을 골탕 먹일 계획이라도 세웠나 했더니 의외로 워터슬라이드를 한 번 더 타자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유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재밌잖아. 타자. 응?”
단호한 거절에 율무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려던 찰나, 유연이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이번엔 저거. 우리 새로운 거 타 보자.”
유연의 손가락이 가리킨 건 워터월드 초입에서 봤던 상어 어트랙션이었다.
“완전 콜! 역시 우리 유연이가 뭘 좀 아네~ 야, 근데 우비는 다시 사야겠다. 아까 벗으면서 다 찢어졌어.”
“뭘 또 사. 그냥 버려. 어차피 입어도 다 젖는데.”
미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빨간 망토 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