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흑화한 개복치가 굳게 닫힌 유리문을 두드렸다.
똑똑-.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임 코리안! 아이 원트 미미고!”
갑자기 나타난 진상 한국인이 다짜고짜 번역기를 요구했다.
미미고는 조금 전 헤어진 한국인들이 알려 준 방법으로, 이것 하나만 있으면 일본 여행도 오케이라며 전수받은 꿀팁이었다.
“아이 원트 미미고! 아이 캔트 스피크 재패니즈. 쏘리!”
무식하면 용감하댔다고 백야는 당당했다.
거듭 번역기를 찾는 백야에 직원도 황당한 듯 자신의 동료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상황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백야의 귀여운 외모에 홀린 직원이 자신의 핸드폰을 흔쾌히 내밀었기 때문이다.
“사용하세요.”
미미고 번역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한국의 메신저 앱이었다.
“땡큐!”
핸드폰을 받아 든 백야는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게임 업데이트를 누른 뒤로 상태창도 안 나타나고 멤버들도 사라졌어요. 돌려주세요!”
한국어를 번역한 미미고가 스피커를 통해 일본어를 송출했다. 백야의 컴플레인을 들은 직원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어떤 게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천재 아이돌로 살아남기요.”
“아, 그 게임은 최근에 새로운 버전이 배포되었습니다. 혹시 업그레이드를 해 보셨나요?”
“업그레이드를 눌렀다가 이렇게 됐다니까요?”
미미고 덕분에 대화는 수월해졌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화에 화가 난 백야는 급기야 담당자를 불러 달라 했다. 그러자 사무실 안쪽에서 체크 남방을 입은 퀭한 몰골의 개발자가 나타났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일본 서버 이벤트 관련으로 마침 한국인 개발자가 오사카 지사에 와 있었다며 소개해 주었다.
‘그럼 진작에 이분을 불러 줬어야지!’
백야가 살쾡이 같은 눈을 치켜떴다.
“뭐 때문에 그러시죠? 한국도 아니고 일본에서….”
“제가 지금 이 게임 때문에 직업도 잃고, 사람도 잃고, 모든 걸 다 잃었어요!”
“…….”
“그뿐인 줄 아세요? 정신 차려 보니까 여권, 핸드폰, 지갑 몽땅 다 사라져서 국제 미아가 됐다고요.”
눈알이 뒤집어지기 직전인 개복치는 지금 뵈는 게 없었다.
반면 개발자 입장에서는 멀쩡하게 생긴 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씩씩거리자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쪽 말씀에 따르면 저희 회사에서 개발한 아이돌 육성 게임을 플레이하시다가 직장을 잃으시고, 주변 지인분들도 다 떠나갔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여권과 핸드폰, 지갑은 여행 오셨다가 관광 도중 잃어버리셨고요.”
누가 들어도 귀책 사유는 백야에게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눈앞의 진상이 자극을 받고 더 날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외 출장까지 와서 과몰입 오타쿠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살짝 짜증마저 일었다.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해 드리면 되나요?”
“당연히…!”
제자리로 돌려 달라는 요구를 하려던 백야가 멈칫했다.
제가 말하는 제자리는 게임에 동기화되기 전인 걸까, 아니면 후인 걸까.
백야가 대답하길 망설이자 남자는 들으란 듯 한숨을 쉬었다.
보니까 딱히 원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적당히 게임 쿠폰이나 쥐여 주고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이며 웬 노란 종이를 하나 꺼냈을 때였다. 백야가 잠긴 소리로 작게 웅얼거렸다.
“멤버들만… 돌려주세요.”
“네?”
어느새 바닥 위로 굵은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가 생각해도 저 진짜 미친놈 같은 거 아는데요…. 사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나 화도 나는데….”
“저, 저기….”
“매일 보던 애들이 옆에 없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백야는 멤버들이 망돌이어도 좋으니까 걔네들만이라도 원래대로 돌려놔 줄 수 없는지 물어보았다.
물론 백야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개발자는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는 원래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으니까 괜찮은데…. 걔네는 진짜 노력 많이 했단 말이에요. 끕.”
“예, 뭐. 무슨 말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당황스럽게 왜 갑자기 우시고 그러는….”
대충 백야가 키우던 아이돌 그룹 이름이 데이즈였나 보다 넘겨짚을 뿐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게임 아이디.”
“…백야여.”
“확인해 볼게요. 그리고 이거.”
“이게 멍데여….”
눈물은 금방 그쳤으나 목이 멘 상태라 발음이 처참하게 뭉개졌다.
“쿠폰이요. 한국이었으면 좀 더 챙겨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보다시피 저도 출장 와 있는 상태라.”
백야가 명함 사이즈의 노란 종이를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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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락바락 따지고 들던 주제에 선물을 받았답시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였다.
“업데이트는 바로 살펴보도록 할게요. 그럼 살펴 가세요.”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버티고 있는다 해도 당장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개복치는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나 이제 어디 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돈이 있길 하나, 일본에 아는 사람이 있길 하나. 국제 미아로도 모자라 노숙자 스펙까지 추가된 백야는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한적한 골목길. 담벼락 아래 쭈그려 앉은 백야가 고뇌에 잠겼을 때였다. 백야의 시야에 웬 앙증맞은 고양이 발이 들어왔다.
야옹-.
고양이가 백야의 신발코를 건드리자 하얀 스니커즈 위로 젤리 모양이 선명하게 찍혔다.
“뭐야…. 너 발이 왜 이렇게 새까매?”
고양이를 발견하고 기분이 조금 나아진 백야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
고양이들도 이런 걸 하던가.
의구심은 들었지만 괜히 성공해 보고 싶었던 백야는 한 번 더 손을 요구했다.
“손 한 번만 해 주면 안 돼? 나 지금 너무 무서워.”
야옹-.
백야를 빤히 올려다보던 고양이는 관심 없다는 듯 도도하게 몸을 돌렸다.
“아니야 가지 마…! 안 할게.”
백야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가던 걸음을 멈춘 고양이가 뒤돌아 다시 백야를 봤다.
야옹-.
백야를 보며 눈을 빛내던 고양이는 천천히 상체를 굽혔다.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자세에 백야가 도망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그 순간 고양이가 날아올랐다.
“으갹!”
고양이에게 어깨를 밟힌 백야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담벼락에 머리를 부딪쳤다.
* * *
“백야가 조금 늦네.”
“형. 이제 5분 됐거든?”
“그래도….”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욱여넣은 남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우, 이 시려. 너는 천천히 먹고 있어. 나는 아무래도 따라가 봐야겠다.”
“같이 가. 나도 손 씻게.”
민성도 남은 아이스크림을 해치우며 따라 일어섰다. 더운 날씨 때문에 금방 녹았다며 초콜릿이 묻은 손을 내밀었다.
“물티슈 줘?”
“됐어. 어차피 화장실 갈 건데.”
제작진에게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 전한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화장실이 제법 외진 곳에 있어서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민성아. 얘 옷 다 벗고 빨래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율무면 몰라도.”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나도 백야 그런 애 아닌 거 알아.”
뭘 정색까지 하고 그러냐며 남경이 멋쩍어하는데, 화장실 안에서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백야 씨! 정신 차려 보세요!”
동시에 서로를 돌아본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백야와 그를 발견한 스텝이 보였다.
“백야야!”
“매, 매니저님. 저도 방금 들어왔는데 여기 쓰러져 계셨어요.”
하필이면 백야가 쓰러진 곳의 타일만 붉은색이라 끔찍한 오해를 할 뻔했다.
다행히 외상은 없었지만 열에 달떠 숨을 내쉬는 백야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민성이 당장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며 안절부절못하자 남경도 패닉이 온 듯 이마를 짚었다.
“저, 저는 일단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사람을 불러올게요!”
스텝이 부리나케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남경도 얼른 구급차를 부르려 핸드폰을 꺼내는데, 백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배, 백야야?”
민성이 이름을 부르자 백야가 반응했다.
“……으응.”
“백야야, 정신이 들어?”
찡그린 백야가 억지로 눈을 뜨려 애썼다.
그러다 정신이 반쯤 돌아왔을 때, 누군가 자신의 몸을 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들어? 괜찮아?”
“너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안 되는데…!”
사색이 된 민성과 남경이 백야를 다시 눕히려 들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손길을 떨쳐 낸 백야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익숙하지만 눈앞에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들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였다.
“어, 어떻게….”
“너 쓰러진 거 기억나?”
민성의 걱정 어린 눈빛과 마주친 백야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렸다.
“혀어엉….”
꿈이고 자시고 일단 민성에게 안기고 본 백야는 서럽게도 울어 댔다.
얼결에 백야를 다독이게 된 민성도, 제자리에 굳어 버린 남경도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백야야, 왜 그러는데. 응? 무슨 일 있었어?”
“흐어엉. 끄흡.”
“아니, 얘가 잘 안 울더니 왜….”
당황한 민성이 등을 다독이자 백야는 더 서럽게 울어 댔다.
일단 달래고 보기로 한 민성이 백야의 등을 토닥여 주던 때였다. 갑자기 몸을 떨어뜨린 백야가 민성의 얼굴을 조몰락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징짜야? 징짜냐고.”
손에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민성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반투명한 상태창이 나타나며 시야를 가렸다.
[v.1.2 업데이트 안내
- 천재 아이돌로 살아남기 X 아니아니치킨 콜라보 이벤트 추가
- 스킬 장착/해제 기능 추가
- 스킬 업그레이드 기능 추가
- 신규 퀘스트 추가
- 버그 수정]
“히끅.”
실컷 울더니 이제는 딸꾹질까지 해대는 백야였다.
상태창을 보고 나서야 정말 돌아왔음을 깨달은 백야는 다시금 눈물을 터뜨렸다.
뿌애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