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히끅. 짜증 나….”
울음을 멈춘 백야가 구시렁거리며 상태창을 닫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꽃가루와 함께 선물 상자가 네 번이나 연속으로 열렸다.
[업데이트 보상 도착!]
[깜짝 선물 보상 <스킬 (랜덤)> 도착!]
[미지급 스타 포인트 도착!]
[오류 보상 도착!]
허공을 보며 움찔거리던 백야는 이젠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왜,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어? 말로 해, 백야야. 응?”
“아파….”
“아프지! 그럼 안 아프겠니?”
“혀엉…. 남경이 형은?”
두리번거리던 백야가 남경을 찾았다.
“형? 잠깐 밖에 나갔어. 금방 올 거야.”
남경은 스텝이 사람들을 몰고 오기 전에 밖으로 마중을 나간 참이었다. 불안정한 상태의 백야를 보여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 형이 나 좀 때려 봐.”
“…어?”
“이왕이면 세게.”
쉽게 때릴 수 있으면서도 다칠 위험은 적고 정신은 번쩍 들게 하는 부위가 어딜까 고민하던 백야는 이내 정강이를 떠올렸다.
은근슬쩍 멀어지는 민성을 잡아챈 백야가 진지한 얼굴로 부탁했다.
“딱 한 대만 차 줘.”
“너 지금 되게 이상한 거 알지?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응. 무슨 일 있어.”
산발이 된 머리로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말하는 백야는 정말 미친놈 같았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너 지금 정상 아니야.”
“아니야.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 그냥 형이 나 한 번만 걷어 차 주면 다 해결되는 일이야.”
백야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민성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난감해하던 민성은 결국 백야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한 번만 차면 되는 거지? 그럼 병원 가는 거다?”
“응. 대신 세게.”
“아플 텐데….”
“아팠으면 좋겠어.”
백야가 자신은 준비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한 눈빛에 덩달아 진지해진 민성이 오른발을 크게 휘둘렀다.
퍽-!
“아악!”
민성이 정강이를 후려치기 무섭게 백야가 다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비명을 들은 남경과 스텝들도 우르르 뛰쳐 들어왔다.
“흐어엉! 아파아.”
“배, 백야야. …혀엉.”
두 애새끼들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남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이마에 쿨 패치를 붙인 백야가 의무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달랑거리는 다리 위로 시퍼레진 멍을 하나 달고선.
“이제 좀 진정됐어?”
“응.”
“미안. 살살 찬다고 찼는데….”
“아니야, 내가 세게 차 달라고 했잖아. 그리고 나 미친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이 더 무섭게 들린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걸까. 민성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백야의 컨디션 난조로 두 사람의 리얼리티 촬영은 잠시 중단됐다.
창밖을 구경하는 척 멀뚱히 앉아 있던 백야는 떨어지는 나뭇잎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스킬 획득! <병약미(S)>]
‘뭐야, 이 항마력 딸리는 네이밍은.’
뽑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주어진 높은 등급의 스킬에 백야가 당황했다. 그러다 조금 전 화장실에서 떠올랐던 랜덤 스킬 획득 알림이 생각났다.
‘그래도 그렇지 병약미라니….’
본능적인 거부감에 눈살을 찌푸리자 곁에 있던 민성이 창가에 달린 블라인드를 조정해 주었다.
“햇빛이 너무 세지?”
“어? 으응…. 고마워 형.”
“뭘 이 정도 가지고.”
반투명한 상태창 때문에 민성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불안함에 심장이 터질 것 같던 백야는 정보창을 불러냈다. 이놈의 망겜은 업데이트 전이나 후나 불친절한 건 여전했다.
Lv.11 백야 (동기화 중)
외모 : A <얼굴 천재>
보컬 : S <안녕! 클레오파트라>
댄스 : C <뚝딱뚝딱>
끼 : A <컨셉 장인>
스트레스 : 11%
칭호 : 천재 아이돌 (비활성)
패시브 : R <개복치>, S <병약미>
R등급의 개복치 옆으로 S등급의 병약미가 추가되어 있었다.
“끕.”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한 백야는 황급히 숨을 참았다.
이게 뭐야!
고급 스킬이랍시고 웬 거지 같은 게 하나 더 늘어난 상황이었다.
“뭐라고 했어?”
“어? 아니야.”
백야가 아닌 척 시치미를 떼자 민성도 금방 의심을 거둬들이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는 핸드폰으로 ‘더위 먹었을 때’를 검색하는 중이었다.
다시금 감시에서 자유로워진 백야는 <병약미(S)>의 상세 보기를 눌렀다.
<병약미(S)>
: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함과 치명적인 나른함. 눈물샘을 자극하는 처연함으로 상대의 보호 본능을 일으킨다.
그냥 보지 말걸.
백야는 새로 얻은 패시브 능력을 보고 없던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없애면 돼.’
그래도 업데이트를 통해 스킬 장착과 해제가 자유로워진 건 다행이었다. 백야는 고민할 것도 없이 <병약미(S)>를 해제하려는데….
[패시브 <병약미(S)>는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패시브 스킬은 해제가 불가능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끕.”
비명을 삼킨 백야가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거렸다. 너무 어이없으니까 화도 나지 않았다.
눈을 감은 백야가 마음속으로 화를 삭이려 애썼다.
그래도 제일 하단의 보유 포인트를 보고 나니 널뛰는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 현재 보유 스타 포인트 : 91
이벤트 쿠폰, 업데이트 보상, 오류 보상, 미지급 포인트까지 모두 수령하자 만들어진 숫자였다.
‘그래. 역시 심신 안정에 포인트 치료만 한 게 없지.’
사실 백야는 화장실 바닥에서 홀로 눈을 떴던 기억 전부가 꿈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서 낯익은 쿠폰을 발견한 뒤로 그 또한 실제였음을 깨달았다.
반신반의하며 쿠폰을 입력하자 무려 50 스타 포인트까지 주어졌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장 더 달라 그럴걸.’
세 자리 수에 가까운 포인트를 보자 마음에 여유가 생긴 백야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저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게임이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오류? 날 수도 있지.
이세계? 다녀올 수도 있지.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지금, 백야에겐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웬만큼 거지 같은 퀘스트가 아니고서야 죽을 일은 없을 거라는 믿음마저 생겼기 때문이다.
펀쿨섹 백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백야야, 아까는 정말 왜 그런 거야?”
내내 기회를 엿보고 있던 민성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백야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 그게….”
업데이트를 눌렀더니 당신들이 없는 세상에서 눈을 떴고, 그곳에서 눈물즙을 떨구다가 고양이한테 어깨빵을 맞고 기절했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백야는 의무실 한편에 붙어 있는 납량특집 포스터를 발견했다.
“귀, 귀신! 귀신을 본 것 같아서.”
“귀신?”
멤버들은 백야가 평소 귀신이라면 질색팔색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눈앞의 인물은 간밤의 귀신 소동에 백야와 방까지 바꿔 준 인물이 아니던가.
백야가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민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역시 부족했나.
당황한 펀쿨섹좌의 동공이 흔들리는데, 순간 민성이 백야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기절할 만했네. 너무 놀랐겠다.”
“…어?”
이걸 믿는다고?
“너 그때 귀신의 집 갔을 때도 엄청 울었잖아. 가뜩이나 이번에는 혼자서….”
“…….”
“심장마비라도 왔으면 어쩔 뻔했어. 이만하길 다행이다.”
평소 제 이미지가 얼마나 하찮았으면 귀신을 보고 기절했다는 말을 믿는단 말인가.
백야는 조금 억울했다.
“알겠으니까 일단 이것 좀. 숨 막혀…!”
개복치가 민성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렸다.
“아, 미안.”
“으응…. 그런데 남경이 형은?”
“잠깐 PD님이랑 이야기 나누고 계셔. 너 오늘 촬영은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리러 간 것 같은데.”
업데이트 보상을 받자마자 스트레스 지수부터 낮춘 백야는 컨디션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미지근하게 식은 쿨 패치를 떼어 낸 병약 미소년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자.”
“어딜? 너 더위 먹은 것 같다고 쉬어야 된다 그랬어.”
“나 이제 멀쩡해. 열도 다 내렸잖아. 만져 볼래?”
백야가 만져 보라며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열은 내린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밖은 아직 더워. 촬영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나 혼자 다녀도 되니까 넌 그냥 쉬는 게 어때?”
“나도 나가고 싶어. 형은 놀이동산까지 왔는데 기구 하나도 못 타고 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 어차피 못 타잖아.”
“…….”
정곡을 찔린 백야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아까도 괜찮다 그러더니 결국 쓰러진 거 봐.”
“그건 귀신 봐서 그런 거라니까….”
백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민성의 마음이 약해졌다. 과연 S급 패시브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남경이 형이 이미 결정한 거라.”
최종 결정권자는 남경이라는 소리였다.
“좋아. 그럼 내가 남경이 형이랑 얘기하고 올게.”
백야가 남경을 찾아 나서려 커튼을 젖혔다. 그러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남경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눈앞에 서 있었다.
“안 돼. 어딜 가려고.”
“으갹!”
놀란 백야가 휘청거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부축해 주었다.
“이것 봐. 너 좀 더 쉬어야 한다니까?”
“PD님이랑은 이야기 끝냈으니까 일단은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어.”
누가 보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다며 백야가 잡힌 팔을 풀어냈다.
“내가 너 그 소리 할 줄 알았다.”
“저 진짜 괜찮아요. 네?”
백야가 촬영을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남경이 한숨을 쉬자 민성이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백야의 편을 들어 주었다.
“나도 검색해 봤는데 30분 정도만 휴식 취하면 괜찮대. 너무 더운 곳만 피하면 될 것 같긴 한데….”
백야가 많이 답답한 모양이라며 아까부터 창밖만 본다는 말도 덧붙였다.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둘이 짰지?”
“아니요?”
“나도 처음에는 안 된다 그랬어. 진짜야.”
민성과 백야가 강하게 부정했다.
그를 보며 한숨을 쉰 남경은 제작진과 상의한 내용을 공유해 주었다.
“사실 촬영을 아예 안 할 수는 없고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하는 장면 정도로만 분량 채우기로 했어.”
꼼짝 않고 의무실에 감금당할 줄 알았는데 리얼리티 촬영이 백야를 살린 셈이었다.
백야가 당장 가자며 민성을 재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고스란히 백스텝을 밟아야 했다.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이번에 한국 돌아가면 너희 건강 검진부터 다시 다 받을 거야.”
“왜요? 저희 2월에 했잖아요. 저는 지난달에도 했는데?”
“걸핏하면 쓰러지는 놈이 말이 많아.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어. 알아?”
갓 태어난 기린도 너보단 튼튼할 거라며 남경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