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기린….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걔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요.”
쓰러진 건 제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더 억울했다. 그러나 남경은 다를 게 없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 진짜 건강 관리 잘해야 돼, 백야야. 힘들게 가수 된 거잖아.”
정확히 말하면 피X츄 먹다가 하루아침에 데뷔한 거였지만 소리 내 말하진 못했다.
“네에….”
“하루 이틀하고 말 거 아니잖아.”
“당연하죠….”
“돌아가면 지금보다 더 바빠질 텐데 이렇게 관리해선 너 골로 가는 거 한순간이다.”
죽는다는 말에 <개복치(R)>와 <병약미(S)> 패시브가 떠올랐다. 확실히 지금 제 몸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었다.
“신경 쓸게요. 진짜로.”
“그래.”
남경의 커다란 손이 백야의 머리를 쓰다듬자 머리가 기우뚱 기울었다.
“지금은 진짜 병원 안 가봐도 되겠어?”
“네.”
“그래. 알겠어.”
* * *
데이즈가 NAN 활동을 끝내고 짧은 공백기를 갖자, 백야현상은 잠시 백수 모드가 되었다.
멤버들이 리얼리티 촬영을 위해 해외로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모처럼 마음 편히 늘어져 있었는데.
- 희망콘 라인업에 데이즈!! 드디어ㅠㅠㅠㅠㅠㅠ 개신나
- 올해 희망콘 안 하는 거 아니었어? 원래 항상 6월쯤에 했잖아
└ 이번에 뭐 때문에 밀렸다 그랬는데.. 기억 안남
- 희망콘 라인업 떴넹. 소년천하, 로즈데이, 글래시 확정이고 데이즈도 있음 전나 재밌겠다... 나도 가고 싶어
└ 걍 ID콘인데?ㅋㅋㅋㅋ
- 티켓팅 빡세겠지? 라인업 보니까 내 자린 없을 것 같네ㅠ
- 근데 우리 응원봉 없잖아 희망콘 때 뭘 흔들라는 거야? 그러니까 ID는 희망콘 전까지 데이즈 응원봉을 내도록
- 나 ID에 맡겨 둔 거 많음. 담요 백야, 응원봉, 데해데 시즌2, 키링 활동, 애들 화보...
데이즈의 희망 콘서트 출연 소식으로 타임라인이 떠들썩했다.
“희망콘?!”
누워서 나잉이들의 동향을 파악하던 백상이 몸을 일으켰다.
희망 콘서트 공식 계정에 들어가 보니 공연 일정과 라인업, 티켓 예매 일정 등이 공지되어 있었다.
각 팬클럽의 권장 구역을 표기해 놓은 사진도 보았으나 백상은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어차피 권장석은 2층과 3층 위주였고, 그녀는 애초에 그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노리는 건 오직 그라운드. 개중에서도 본무대와 돌출 무대로 둘러싸인 스탠딩 구역이었다.
물론 해당 구역은 일반적인 티켓팅으론 구할 수 없었으나 백상은 여유로웠다.
‘그 정도쯤이야.’
코웃음을 치며 다시 자리에 누운 백상은 타임라인을 좀 더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 엄청난 사진을 발견하곤 다시 몸을 일으켰다.
“XX 뭐야?!”
턱을 괸 채 꽃받침을 한 백야가 멍을 때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 남동생이 나 빡치라고 보낸 사진에 최애 찍힘. 사랑해 (백야 꽃받침 사진.jpg)
└ 미미미친 샘 이게 무슨 일이죠
└ 다 비켜!!! 내가 들고 튈 거야!!
└ 아 미친.. 일본까지 가서 저렇게 귀여울 필요가 있을까?
└ 백야 앞에 놓인 거 우유야? 우유 맞지? XX ㄱㅇㅇ (오열 짤.jpg)
└ 학교 체육 시간에 친구들은 나가서 열심히 축구하는데,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한 백야는 교실에서 지켜보는 게 고작이라 우울해하는 얼굴 같다
└ 윗집 맛잘알.. 저 사진 너무 처연하게 찍혔어ㅠㅠㅠ
└ 눈이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한데ㅠㅠ 애기 울었나?
└ 조심스럽게 귀신의 집 기대해 봐도 되나요..? 일본에 개쩌는 데가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거기 들어갔다 나온 건가
└ 근데 백야 귀신 진짜 무서워하는 것 같던데.. 고스트 하우스 사실 아니었으면 좋겠다ㅠㅠ
백야의 목격담은 올라온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빠른 속도로 공유되고 있었다.
해당 글을 올린 당사자도 반응이 좋자 남동생과의 대화를 캡처해 추가로 올렸다.
[엄빠의실수 : 저 사람이 깨물하트라고? 어쩐지 XX 잘생겼다 생각했음]
[나 : 왜 왜 어땠는데?]
[엄빠의실수 : 그냥 잘생긴 사람이 팬케이크 먹고 있던데. 내가 봤을 때 카메라 같은 건 없었음]
[엄빠의실수 : 그리고 깨물하트 말고 두 명 더 있었는데]
[나 : 누구? 이 중에 있어?]
[나 : (사진)]
[엄빠의실수 : ㅇㅇ 근데 안 알려줌]
[엄빠의실수 : 니가 좋아하는 거 보니까 갑자기 기분 안 좋아짐]
[나 : 10만 원]
[엄빠의실수 : 누님! 오른쪽에서 세 번째입니다!]
백야와 함께 있었다던 사람은 민성이었다. 남은 한 명은 사진 속 인물이 아니었다는 걸 보면 아마도 매니저인 것 같았다.
[엄빠의실수 : 근데 깨물하트님 뭔가 아우라가 있었음]
[나 : 왜 막 눈부셔? 후광 비치지ㅠㅠㅠ]
[엄빠의실수 : 그건 잘 모르겠고... 뭔가 지켜 줘야 할 것 같은 느낌? 병약미? 암튼 그런 게 있었음]
병약미라니.
덕후 심장 저격하는 자극적인 단어에 백상이 2차 폭주했다.
아무래도 입고 있던 옷이 연한 파스텔 톤의 루즈한 핏이라 더 여리여리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아래로 내려보면 그 옷이 얼마나 끔찍한 디자인인지 알 수 있었다.
- 혹시 백야가 입은 옷 이거야? ¥7,000 (미니미즈 바나나 티셔츠.jpg)
└ 잠깐만.. 이건 생각도 못 한 디자인인데?
└ 나 갑자기 백야가 쓰고 다녔다던 ㅈ경 생각나려고 해...
└ 초반에 목격담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저 옷 아니었지 않아? 중간에 사 입은 건가.. 민성아 안 말리고 뭐 했어?
└ 7천 원? 7천 원이면 뭐...
└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7만 원임
└ 놀라운 건 저 옷이 그나마 제일 낫다는 사실... (공홈 캡처.jpg)
└ 사과 코스프레도 모자라서 이젠 바나나라니 하... 누가 뭐래도 넌 복숭아야
“큽.”
귀여움 한도 초과에 백상이 입을 틀어막았다.
노란색 외 알 외계인 티셔츠는 7,000원이 아니라 700원을 주고도 안 사 입을 것 같은 디자인이었지만, 백야가 입은 사진을 보니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해당 티셔츠를 직구해야 하는 임무가 생긴 백상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 * *
일정상 저녁 퍼레이드까진 보지 못하고 퇴장한 데이즈는 다음 촬영지인 고베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하루 종일 노느라 피곤할 멤버들을 배려해 이번에는 이동 컷을 촬영하지 않기로 했다.
멤버들과 제작진을 태운 버스 안은 고요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곯아떨어졌던 백야는 달리는 고속도로 안에서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주황빛 가로등 불. 살짝 창문을 열어 보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해가 완전히 진 일본의 밤 풍경은 한국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직도 하루가 다 안 지났어.’
유달리 긴 하루를 보낸 백야는 조금 지친 상태였다.
창문에 얼굴을 기대자 개복치의 볼이 짜부라졌다. 그래도 찬 기운이 피부에 닿자 정신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슬쩍 옆을 돌아본 백야는 멤버들이 아직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곤 상태창을 불러냈다.
▷ 현재 보유 스타 포인트 : 91
봐도 봐도 놀라운 숫자는 볼 때마다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백야의 뽑기 욕구를 자극했다.
‘뽑기나 해 볼까.’
가볍게 다섯 개만 뽑아 보기로 한 백야는 곧장 ‘스킬 뽑기’를 눌렀다.
[스킬 획득!]
[<여름이었다(A)>, <느낌 아니까(B)>, <포커페이스(C)>, <마늘의 민족(C)>, <소리 없는 암살자(D)>]
꽃가루가 터지며 선물 상자가 열렸다. 스킬 명만 봐서는 알 수 없었지만 등급만 봤을 땐 양호한 편이었다.
하지만 백야가 시스템에게 농락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상세 내용을 읽어 보기 전까진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백야는 제일 높은 등급부터 하나씩 확인하기로 했다.
<여름이었다(A)>
: 청량한 햇살 같은 외모.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외모 스킬이었다. 장착 중인 <얼굴 천재(A)>와 같은 등급의 스킬인 데다 기능도 꽤 마음에 들어 일단 스킵 해 두기로 했다.
<느낌 아니까(B)>
: 느낌 있는 춤을 출 수 있다.
“헙!”
두 번째 스킬을 확인한 백야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학수고대하던 댄스 스킬! 그것도 무려 B등급이었다.
<포커페이스(C)>
: 365일 무표정으로 속마음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마늘의 민족(C)>
: 강력한 마늘 냄새로 귀신을 쫓는다.
<소리 없는 암살자(D)>
: 소리 없이 방귀를 낄 수 있다.
처음 두 개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볼 필요도 없는 스킬들이었다.
사실 <마늘의 민족(C)>의 ‘귀신을 쫓는다’라는 내용에서 솔깃했으나, 몸에서 마늘 냄새가 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아이돌한테서 마늘 냄새라니.
팬들의 탈덕은 안 봐도 4K 너튜브였다.
고로 빠르게 장착 단계로 넘어온 백야는 기존의 <뚝딱뚝딱(C)>을 버리고 <느낌 아니까(B)>로 새롭게 태어났다. 기분 탓이겠지만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외모 스킬은 어쩌지.’
<얼굴 천재(A)>와 <여름이었다(A)>는 비슷한 듯 다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살다 보니 이런 고민을 하는 때도 있구나.’
백야가 창문에 비친 얼굴을 돌려보며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쉬운 부분이 없나 살펴보는 눈빛이 퍽 예리했다.
‘지금도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백야에게는 <병약미(S)>라는 강력한 패시브가 존재하지 않던가.
햇살 같은 외모를 장착한들 병약미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 백야는 아쉽지만 새로운 외모 스킬은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딱 하나만 더 뽑아 보자.’
왠지 오늘은 운이 좋아서 시도해 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킬 뽑기 1회를 누른 백야는 선물 상자가 열리길 기다렸다.
펑-!
그리고 잠시 후, 꽃가루가 날리며 반짝이는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킬 획득!]
[<갓끼(S)>]
“끄헙!”
생각 없이 눌렀다가 최고 등급 스킬을 뽑아 버린 백야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나쁜 일 뒤에 좋은 일이 생긴다더니 오늘 같은 날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비빈 백야가 상세 보기를 눌렀다. 이름에서 유추 가능하듯 끼 항목 스킬이었다.
<갓끼(S)>
: 신이 내린 끼 부림으로 상대를 매혹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