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실로 엄청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장착 중인 <컨셉 장인(A)>는 <갓끼(S)> 앞에서 허접해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새로운 스킬을 장착한 백야는 오늘도 천재 아이돌에 한 발짝 가까워졌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백야는 이마로 창문을 두드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불쑥 튀어나온 손이 유리와 백야 사이를 방해했다.
푹신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자 유연이 시큰둥한 얼굴로 백야를 주시하고 있었다.
“유리 깨져.”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작게 속삭이자 유연이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은 아니고. 허리 아파서 못 자겠어.”
온종일 리얼리티 촬영에 장시간 꼼짝없이 앉아 있기까지 하려니 허리가 말썽인 듯했다.
“그럼 어떡해?”
백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유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참아야지.”
“아까 민성이 형한테 준 파스 붙이면 안 돼?”
“숙소 가서.”
숙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길이 없는 백야는 슬쩍 커튼을 들춰 보는 것으로 불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버스는 경사진 산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불빛이 보이는 걸 보니 다행히 금방 도착할 것 같았다.
“다 와 가는 것 같아.”
“그래?”
유연도 커튼을 들춰 창밖을 구경했다. 온천 마을 입구를 통과한 버스는 더 높은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굽이지는 길에 백야는 운전기사를 몇 번이나 힐끔거렸는지 모른다.
자신은 불운을 몰고 다니는 개복치니까 버스가 굴러떨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저희 도착했습니다. 이동할게요~”
그러나 역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데이즈는 제작진이 짐을 옮기는 걸 돕기 시작했다.
“백야 씨 몸도 안 좋으신데 쉬고 계세요.”
“아니에요. 자고 일어났더니 많이 좋아졌어요.”
스트레스 지수 0의 최상의 컨디션을 회복한 백야가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다. 그러나 병약미 패시브 때문에 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네가 이러면 더 방해되니까 너는 그냥 유연이랑 같이 차에 있어.”
유연을 챙기느라 늦게 나타난 남경이 백야를 말려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1팀이 숙소 인서트 컷을 충분히 찍은 뒤에야 멤버들의 촬영이 재개됐다.
“뚜둥!”
청이 문을 열자 엄청난 장관이 펼쳐졌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야외 온천이 딸려 있는 전통 료칸이었다.
“저희 여섯 명이서 여길 다 쓴다고요?”
“2층도 있는데요?”
민성과 유연이 건물을 가리키며 감탄했다.
온천을 지나 내부로 들어선 데이즈는 방을 돌아다니며 숙소를 구경했다. 그리고 다시 1층에 모여 촬영을 이어 갔다.
“이곳에서 간단한 방 배정 미니 게임을 한 뒤 자유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숙소는 마음에 드시나요?”
“네에~ 여기서 살고 싶어요~”
율무의 진심 가득한 대답에 제작진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하루 미션 수행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테니까 빠르게 끝내 드릴게요.”
제작진이 준비한 게임은 사다리 타기였다. 이것만큼 공정하고 빠르게 끝나는 게임은 없다며 작은 화이트보드 판이 내밀어졌다.
“보셨다시피 집은 큰데 방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 분만 독방을 사용하실 수 있고, 나머지 세분은 함께 주무셔야 해요.”
여섯 명 중 절반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에 데이즈가 서로를 경계했다.
“‘온천’을 뽑으신 분은 1층의 정원이 보이는 통유리 방을 혼자 쓰실 수 있고요. ‘야경’은 온천마을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2층 발코니 방. ‘숲’을 뽑으신 분은 푸른 기운이 가득한 숲 뷰 방에서 주무실 수 있습니다.”
이어서 ‘같이’를 뽑은 멤버들은 2층 다다미방에서 함께 주무시면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오케이~ ‘같이’ 빼고 아무거나 하나만 나오면 돼. 난 자신 있어.”
“저런 말 하면 무조건 당첨이야. 벌써 율무 해치웠다!”
다들 독방을 노리느라 혈안이었다. 손뼉을 쳐 멤버들을 진정시킨 민성이 사다리 고르기 순서를 두고 의견을 구했다.
“누구부터 뽑을래?”
그러자 율무와 장난을 치던 청이 번쩍 손을 들며 외쳤다.
“막내 먼저!”
“양심 없는 놈아. 이럴 때만 막내인 척하지 말라고.”
유연이 팔을 잡아 내리자 이번에는 반대쪽 팔을 들며 청이 유연을 약 올렸다.
“팔 하나 더 있지!”
“아오. 지한이 형, 얘 팔 좀 잡아 봐.”
“마취총 없어?”
지한은 아침부터 청의 텐션을 감당하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쟤 진심인데…?’
지한의 살벌한 대답에 백야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그래. 물어본 내 잘못이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민성은 곧장 가위바위보로 진행하겠다고 통보했다.
실랑이 끝에 순서를 정한 멤버들은 고유 1번 백야의 사다리 결과부터 보기로 했다.
“띠리리리띠띠 띠리리리 띠~”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사다리를 타던 율무는 결과 공개를 앞두고 뜸을 들였다.
“60초 후에 공개를…!”
“끌어내.”
“아아, 할게! 할게!”
인내심이 바닥난 지한은 최소한의 자비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가차 없이 떨어진 즉결 처분에 율무가 황급히 결과를 공개했다.
‘다다미방. 제발 다다미…!’
[온천]
첫판부터 가장 크고 좋은 방이 솔드아웃됐다.
항상 안 좋은 것만 걸리더니 오늘은 어쩐 일로 좋은 게 뽑히냐며 멤버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축하를 받는 당사자는 기뻐 보이지 않았다.
“왜 맨날 나만….”
백야가 나라를 잃은 얼굴로 눈썹 끝을 늘어뜨렸다. 그러나 다음 결과에 정신이 팔려 있던 멤버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여섯 번의 이상한 노래를 들은 뒤에야 공개된 결과는.
[온천 방 : 백야 / 야경 방 : 율무 / 숲 방 : 지한]
백야와 율무, 지한이 독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싸아~ 부럽지? 부럽지?”
“PD님, 이 방은 남은 일정 동안 쭉 사용하는 건가요?”
율무가 청을 약 올리는 동안 지한은 제작진을 상대로 굳히기에 들어갔다.
다들 자신이 뽑은 방을 만족스러워하는 가운데, 제일 크고 좋은 방을 얻게 된 백야만 걱정이 많아 보였다.
1층을 혼자 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한데,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대나무 소리는 정말 최악이었다.
‘방도 쓸데없이 커.’
백야는 몇 달 전, 숙소에서 귀신을 봤던 날이 생각났다.
이제는 병약미 패시브까지 있으니 또 귀신을 본다면 이번에야말로 졸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되겠다. 방을 바꿔야겠어.’
제작진들이 철수한 뒤, 백야는 다다미방 멤버들에게 접선을 시도했다.
“청. 방 바꿔 줄까? 편하게 잘래?”
백야는 제일 먼저 청에게 미끼를 던졌다. 그러나 덥석 물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순순히 거절했다.
“No. 백야 써. 아프잖아.”
“아니야, 나 안 아파.”
“No. 얼굴이 귀신이야.”
안색이 창백해 보인다는 소리였다.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그럼 한유연, 너 허리 아프다며. 침대 쓸래?”
“됐어, 너 써. 난 바닥이 더 나을 것 같아.”
배려심이 넘치는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멤버라는 놈들이 하나같이 백야의 마음을 몰라주고 있었다.
“가서 쉬어.”
“으응….”
그러나 백야는 대답만 하고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유연은 쟤가 좋은 방을 놔두고 왜 이곳에서 죽치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왜 안 가? 안 피곤해?”
“갈 거야.”
뭉그적거리며 일어난 백야는 미련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청과 유연을 바라봤다.
‘이렇게 된 거 플랜 B로 율무나 지한을 공략해 봐야 하나.’
둘 중 한 명과 방을 바꿔 2층으로라도 올라와야 하나 고민하는데, 마침 민성이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다.
“백야 왜?”
“형…!”
백야가 민성의 팔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나랑 방 바꿀래? 형 오늘 나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고 놀랐잖아. 침대 써.”
“아니야, 난 여기도 좋아.”
민성이 백야의 팔을 떼어 내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도 얼른 가서 자. 피곤하겠다.”
명백한 거절에 백야는 망했다는 얼굴로 오도카니 서 있었다.
‘어떡하지.’
귀신이 무서워서 혼자 못 자겠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귀신 때문에 방을 바꾸러 올라온 주제에 무섭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다니. 굉장한 모순이었다.
걱정과 공포로 굳어 버린 백야는 그냥 율무의 방에 쳐들어가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서 배 째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됐다. 자라, 자.”
백야가 삐친 티를 내며 여닫이문을 닫았다.
“햄스터 왜 저러나?”
“혼자 자기 싫어서 그러나?”
유연이 생각 없이 뱉은 말에 민성이 멈칫했다.
“백야야, 잠깐만.”
“…왜?”
허겁지겁 달려와 팔을 붙잡는 민성에 백야가 당황했다. 청과 유연도 의아한 얼굴로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혼자 자기 무서워?”
정곡을 찔린 백야가 눈을 크게 떴다. 그에 확신한 민성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니 귀신을 보고 기절까지 한 애를 혼자 방치하는 건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거든?! 사, 사람을 뭐로 보고!”
“그래. 아닌 거로 해.”
불안해하는 갈색 머리를 쓰다듬은 민성은 자연스레 백야를 이끌었다.
한편 백야와 함께 1층으로 향하는 민성의 모습에 청이 큰 소리로 물었다.
“모야! 어디 가나?”
“나 그냥 백야랑 잘게.”
“형 방 놔두고 왜? 안 돼. 그건 반칙이지.”
당당하게 규칙을 어기겠다는 소리에 막내들이 반발했다.
“안 돼! 절대 못 가!”
“여기서 자야지. 어딜 가려고.”
청과 유연이 한달음에 달려와 민성의 다리를 한쪽씩 잡고 늘어졌다.
그 와중에 청은 어찌나 막무가내로 옷을 흔드는지, 악력을 견디지 못한 바지가 점점 아래로 흘러내렸다.
“형, 바지…!”
당황한 백야가 민성의 아래를 가리키며 카메라를 막아섰다. 짧은 순간 훅 내려간 바지에 민성의 장골능이 상당 부분 드러났다.
“야, 놔. 안 놔!?”
뒤늦게 허리춤을 잡은 민성이 청의 손등을 때리며 분노했다. 백야가 미처 가리지 못한 카메라가 두 대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놔, 놔.”
“악! 아파! 얘가 나 때린다! 율무야! 지한아!”
“아프면 좀 놓으라고!”
“No! 못 놔! 1층 갈 거잖아!”
“이 미친, 염병할 놈아! 바지 벗겨진다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