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스포 요정. 당당하게 굴란 말이야.”
“조용히 해.”
백야가 눈에 힘을 주며 경고했다.
“이럴 거면 도대체 스포는 왜 했냐?”
“몰라. 너무 신났었나 보지.”
물어본다 한들 알려 줄 수 없으니 이것이 최선의 대답이었다. 유연도 더는 물어볼 생각이 없는지 금방 고개를 돌렸다.
“누구부터 찍을래? 아무나 와.”
최대한 평범해 보이는 장소를 찾던 남경은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벽을 가리켰다.
“여기가 제일 낫겠다.”
“한 명씩 찍어요?”
“너희 편할 대로 해.”
혼자는 부담스러웠던 백야가 유연의 팔을 건드렸다. 같이 찍자는 말이었다.
“맨입으로?”
“뭐야. 어차피 너도 찍어야 하잖아.”
비싸게 굴지 말라며 팔을 잡아당기자 유연이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주었다. 청도 함께 찍겠다며 합류하자 자연스레 막내즈가 뭉치게 되었다.
“백야가 가운데에 서!”
“내가? 나보다는 너나 유연이가 서는 게 더….”
“그런 게 어디 있어. 네가 서.”
유연과 청이 백야를 가운데에 세우려 등을 떠밀던 때였다. 백야의 앞으로 상태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퀘스트(히든)가 도착했습니다!]
[Q. 틱탁 스타 : 일주일 안에 ‘4단 고음’ 해시태그가 들어간 영상 조회수 합산 1억 뷰 기록하기
※ 성공 시 스킬(랜덤) 지급 / 실패 시 패시브 강화]
말도 안 되는 퀘스트라고 생각했다.
‘1억 뷰가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성공 보상이 탐나긴 했지만 백야에겐 아직 85점의 스타 포인트가 있었다.
‘2년이 다 되어 가는 데뷔곡 뮤직비디오도 아직 1억 뷰가 안 되는데.’
아무리 숏폼이라지만 거리감 느껴지는 숫자에 백야는 퀘스트를 거절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이 되던 날. 백야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듣게 된다.
“얘들아, 너희 이번에야말로 진짜 대박 나려나 봐!”
생에 첫 연기 도전을 하고 있는 멤버들 앞으로 남경이 달려왔다. 그는 곧장 핸드폰을 내밀며 한 기사를 보여주었다.
[데이즈, 틱탁 ‘4단 고음 챌린지’ 콘텐츠 1억 뷰 돌파]
“1억 뷰!?”
누구보다 놀란 백야가 남경의 핸드폰을 가로채며 눈을 크게 떴다.
“왜? 도대체 어떻게? 이게 말이 돼?”
다른 멤버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백야만큼 격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좋아? 하긴 이게 다 네 덕분이긴 하지.”
지한이 백야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말대로 백야가 희망 콘서트에서 실수로 음을 올려 부르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아니 내 덕분이라는 게 아니라….”
“맞네~ 당백이가 쏘아 올린 4단 고음! 역시 네가 우리 팀 복덩이야~ 이리 와, 형아가 예뻐해 줄게.”
엉겨 붙는 율무를 밀어낸 백야는 생수로 쓰린 속을 달랬다.
‘스킬 얻을 수 있었는데…! 포인트도 받을 수 있었는데!’
아이고 배야.
백야가 질끈 눈을 감자 율무가 이때다 싶어 백야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여전히 사이가 좋은 멤버들을 보며 남경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조금만 더 열심히 하자. 너희가 노력한 만큼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네에….”
“그렇다고 아픈 걸 참으면서까지 버티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 하고.”
그러자 청이 백야를 건드리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거는 백야가 요술 공주인데.”
“왜 또 내가 요술 공주야.”
백야가 얼굴을 구기자 유연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요주의 인물?”
“오! 그래, 그거!”
“완전 다른 거잖아!”
* * *
[데이즈, 청량 끝판왕 ‘하이틴’ 농구 소년으로 돌아온다]
[컴백 D-10 데이즈, 리패키지 ‘하이틴(Highteen)’ 율무 첫 콘셉트 포토 공개]
드디어 데이즈의 컴백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SNS에서는 공식 기사와 함께 올라온 데이즈의 컴백 티저 일정을 두고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 청춘 스포츠 드라마 그 자체인 농구하는 나율무 (율무 사진.jpg)
- 타이틀곡 이름부터 하이틴. 벌써 찢었다 올해 여름 데이즈가 다 씹어먹음 수고
- 1~6일 차 개인 콘셉트 포토, 7일 차 단체 포토, 8일 차 뮤비 티저라는 건 알겠는데 마지막 날에 하이틴 티저는 뭐야?
└ 티저 다른 버전??
-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다 내놔
- 파란 하늘.. 율무.. 농구공... 완벽 (율무 사진.jpg)
└ 율무 더 까매진 것 같아ㅋㅋㅋㅋ 농구 열심히 했나 봐
└ 청량감 미쳤어 웃는 거 봐ㅠㅠ 자기가 소형견인 줄 아는 대형견
- 데이즈+청량=절대 실패 없는 조합
- 이번 노래는 5단 고음 가나요?ㅋㅋㅋㅋ 희망콘에서 올리는 거 보니까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은데
- 원미 역주행 미친 거 아니야? 실차 3위까지 올라옴ㄷㄷ
- 원미 실차 1위 찍고 하이틴이랑 음방 1위 후보 오르는 상상
- 이제 WANT ME = 여름만 되면 차트 역주행하는 여름 연금 곡이라 하자 (서동요 기법 가 보자고)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4단 고음 챌린지’에 데이즈의 WANT ME는 매일 최고 성적을 갱신하고 있었다.
연이어 공개된 나머지 멤버들의 컨셉 포토도 반응이 뜨거웠다.
- 이건 된다 (데이즈 단체 사진.jpg)
- 율무 주황 머리도 기절할 뻔했는데 청이 백금발 보고 지금 천국 옴 (청 사진.jpg)
신인 발굴을 위해 근방의 중학교를 어슬렁거리던 동만은 한 분식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피X츄를 뜯으며 데이즈의 컴백 소식을 접한 그는 좋구알을 해 놓은 공식 계정에 새로운 영상이 올라와 있는 걸 확인했다.
이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영상을 멋대로 재생시켰다.
[데이즈 ‘하이틴(Highteen)’ MV Teaser]
제목에서부터 컨셉을 못 박아 놨듯, 시작부터 미국의 하이틴스러운 고등학교 전경이 비쳤다.
종소리가 울리고 본격적인 MR이 재생되자 멤버들이 복도로 하나둘씩 걸어 나왔다.
남색 반바지에 니 삭스, 하얀 교복 셔츠 위로 초록색 넥타이를 한 민성과 백야가 먼저 등장했다.
시간차를 두고 합류한 지한과 유연, 청은 앞선 두 사람과 달리 셔츠를 풀어헤친 차림이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율무는 교복이라곤 바지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흰색 반팔 티셔츠 위로 농구 유니폼을 어깨에 걸친 모습이었다.
잠시 후, 학교 밖으로 뛰어가는 여섯 명의 뒷모습이 보이다 화면은 단체 안무 컷으로 바뀌었다.
농구 코트에서 브이자 대형으로 선 데이즈가 실제 농구공으로 드리블하는 안무를 잠깐 지나, 청이 공을 하늘 높이 날리자 포커스도 그를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잠시 후 태양과 농구공이 하나로 겹치며 빛이 번지는 순간, 장면은 다시 전환되며 유연의 얼굴이 원샷으로 잡혔다.
고개를 측면으로 돌리며 짙은 보조개를 만든 그는 속삭이듯 노래했다.
- 넌 나의 Highteen
그리곤 내 볼에 입을 맞춰 달라는 듯 보조개를 톡톡 두드리며 영상은 끝이 났다.
[Highteen]
[DASE]
“와아아씨! 미쳤다!”
이쑤시개를 집어 던진 동만은 떡볶이를 먹다 말고 영상이 끝남과 동시에 기립 박수를 쳤다.
* * *
- 오늘 학교 마치고 떡볶이 먹는데 어떤 아저씨가 우리 애들 티저 보더니 이쑤시개 던지면서 기립박수 치심ㅋㅋㅋㅋ
└ 그분 골든벨 울리고 홀연히 떠나셨어..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 이번 컴백 진짜 미쳤다고 ID 이갈았다고 지금
- 지한=냥티, 청=날티 미친 조합
- 와... 한유연 폭스 폭스 하니까 진짜 폭스 다 됐네... 나 혼절..... (율무 볼콕.gif)
- 민성이랑 백야만 교복 제대로 입혀 놓은 거 봐ㅋㅋㅋㅋ 코디 캐해 만렙
└ 둘 다 단정하게 입었는데 민성이는 니삭스까지 단정 그 자체고 백야는 왼쪽만 조금 내려가서 높이 안 맞는 게 킬포
- 제발 다른 애들도 볼콕 안무 있다고 해 줘ㅜㅜㅜㅜ
- 티저 떴는데 가슴이 웅장해짐 내 탑백귀가 반응하고 있어 (링크)
- 하이틴 농구부 킹카가 컨셉인 건가.. ID 도른놈들 내 통장 털어가려고 작정했네ㅠ
- 농구공 안무 참신하다! 근데 저거 무대에서도 할 수 있는 거야?
데이즈의 티저는 공개 직후 SNS 실시간 트렌드 1위, 5시간 만에 100만 뷰를 돌파하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이틀 뒤.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하이틴 티저’가 기사와 함께 정체를 드러냈다.
[데이즈 리패키지 앨범 타이틀 ‘Highteen’ 웹드라마로 제작, 멤버 전원이 주연]
컴백을 앞두고 마지막 연습에 박차를 가하던 데이즈는 웹드라마 티저가 공개됐다는 말에 한데 모였다.
당당한 미소를 띤 민성의 얼굴 옆으로 오그라드는 타이포가 큼지막하게 합성된 썸네일이었다.
[하이틴(Highteen) 메인 예고편 : 너, 내 동료가 돼라!]
“와……. 센데?”
유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옆을 돌아봤다. 멤버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푸학! 명대사 나왔네~”
율무는 얼른 재생해 보자며 잔뜩 신이 난 상태였고, 지한과 백야는 입술을 다문 채 ‘이걸 꼭 봐야 할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반면 청과 민성은 연습실 구석에서 실랑이를 벌이느라 아직 자리에 없었다.
“나 진짜 못 보겠어, 진짜. 청아 제발 날 버려.”
“No! 혼자 안 보는 게 어디 있어!”
“너 진짜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저걸 내가 어떻게 봐!”
“왜 못 봐? 안 죽으니까 Don’t worry! 죽으면 내가 살려 준다! Okay?”
“오케이는 개뿔!”
청이 싫다는 민성을 잡아 억지로 끌고 왔다.
‘대본을 받을 때부터 흑역사가 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백야가 착잡한 얼굴로 민성의 썸네일을 바라봤다. 마냥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더욱 심란했다.
“제발 분량 적었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백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뱉었나 싶어서 흠칫하는데, 그때 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네가 말한 거야?”
“…내가 소리 내서 말했어?”
제일 담담해 보이길래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더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네 연기가 제일 사람다웠을 텐데….”
“아니야. 너도 잘했어.”
전부터 연기에 소질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번 웹드라마를 준비하면서 지도를 받은 지한의 실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회사에서도 넌지시 배우 활동을 병행해 볼 생각은 없냐며 떠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정작 본인은 연기에 의사가 전혀 없었다. 연기에 의욕을 보이는 건 발 연기로 박빙을 다투는 율무와 백야뿐이었다.
‘난 어쩔 수 없었어.’
백야가 자기합리화를 하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드라마 첫 촬영 스케줄이 있던 날, 침대에서 눈을 뜨기 무섭게 마주했던 상태창이었다.
[Q. 천재 아이돌(3) : 천재 아이돌이라면 연기는 필수! 연기 최초 도전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 보세요.
※ 성공 시 ‘연기’ 항목 활성화 / 연계 퀘스트 <믿고 보는 연기돌(1)> 진행 가능
※ 실패 시 패시브 강화]
메인 퀘스트치고 비교적 쉬워 보이는 내용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현장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사의 상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