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난 농구공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라니.’
다시 생각해도 NG를 두 번밖에 내지 않은 게 용하다고 생각됐다.
장하다 나 자신.
이러한 노력 끝에 백야는 연기 능력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Lv.11 백야 (동기화 중)
외모 : A
보컬 : S
댄스 : B
연기 : D
끼 : S
기본으로 주어진 연기 스킬의 등급은 <발 연기(F)>.
원래는 F등급이었는데 마지막 신을 촬영하는 날 처음 보는 알림과 함께 상태창이 떠올랐다.
[레벨 업!]
[<발 연기> 능력이 F등급 ▶ D등급으로 향상됩니다.]
업그레이드되면서 스킬 관련 기능이 개선됐다더니 개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런데 발 연기 스킬이 자꾸 업그레이드되면 오히려 안 좋은 거 아닌가.’
조만간 뽑기를 돌려야겠다 다짐한 백야는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생한다?”
유연이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검게 바뀌었다.
북적이는 복도가 비치고 ‘1-4’ 팻말이 달린 교실에서 청과 유연이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편한 운동복 차림에 농구공을 들고 있었다.
[유연 : 부산 뭐가 유명하지? 갈매기?]
[청 : 그럼 형 올 때 갈매기 잡아 오라 하자! 우리 갈매기살 구워 먹게!]
[유연 : 갈매기살은 그 갈매기가 아니라고. 와… 얘 어떡하지?]
유연이 질린 얼굴로 쳐다보지만 청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여름 방학을 맞이해 부산으로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된 민성에 대한 것이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방학 내내 훈련이 잡혀 있는 1학년에게는 꿈같은 일이었으니까.
[청 : 그동안 나는 더 열심히 연습해서 내가 주장해야지!]
[유연 : 그러든가.]
청의 대답에 건성으로 대답한 유연은 뭔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 : 뭐 찾냐.]
[유연 : 백야.]
[청 : 조그마한 거 엄청 챙기네. 보나 마나 또 붙잡혀 있겠지. 저기 있네.]
청이 앞을 가리켰다.
과자를 잔뜩 안은 백야가 여학생 무리에 둘러싸여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청 : 3학년 아니야?]
[유연 : 맞는 것 같은데. 오늘따라 많네.]
[청 : 쟤만 보면 막 먹이고 싶나 봐. 근데 나도 그래.]
[유연 : 야, 이것 좀.]
농구공을 청에게 토스한 유연이 긴 다리로 인파를 가로질렀다.
[유연 : 너 여기서 뭐 하냐.]
[백야 : 그게….]
도와달라는 듯 어색한 입꼬리에 유연이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백야가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라는 걸 아는 유연은 그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그리곤 장난스러운 미소로 첫 번째 명대사를 내뱉었다.
[유연 : 애기야, 가자.]
“아악! 죽어 버려!”
영상을 보고 있던 민성이 급발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멤버들도 소름이 끼치는지 잠시 영상을 멈춰 두고 회복 시간을 가졌다.
“나 토할 것 같아.”
“백도 너무한 거 아니야? 자꾸 그러면 나 상처받아.”
“미안…. 근데 진짜 토할 것 같아.”
멤버들의 반응에 유연이 진심으로 서운해 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 알겠어. 나는 이게 끝이지만 당신들은 이제 시작이라고. 두고 봐.”
“Hey! 빨리 다시 눌러! 이런 건 보다가 끊어지면 안 돼.”
유연이 복수를 다짐하는 동안 청이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유연이 백야를 이끄는 순간 정규 1집 수록곡이 깔리며 오글거림은 배가 되었다. 여학생들의 비명과 수군거림이 잠시 비치더니, 장면은 실내 체육관으로 바뀌었다.
[민성 : 우리 햄스터 왔네~ 오늘은 무슨 간식 받아 왔나 보자.]
[백야 : 햄스터라 하지 말라고.]
[민성 : 그럼 복숭아.]
백야가 단상 위로 과자를 쏟아 내자 부원들이 다가왔다.
1학년인 데다 농구부에서 키가 제일 작은 백야는 고학년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민성 : 아이고~ 많이도 받아왔다. 이거 언제 다 먹을래. 형이 좀 도와줄까?]
백야는 키가 커야 된다며 항상 무언가를 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먹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종종 간식 선물을 받아 오곤 했다.
[백야 : 나 형들 간식 셔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다 먹을 거니까 건드리지 마.]
[지한 : 맞아. 얘 먹으라고 준 건데 왜 주장이 탐내.]
[민성 : 농담도 못 하니?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민성이 백야의 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었다.
[민성 : 많이 먹어 둬. 오늘은 훈련 엄청 힘들게 할 거니까.]
[백야 : 왜? 형 내일 여행 간다고 오늘은 연습 경기만 하기로 했잖아.]
[민성 : 그러려고 했는데 지한이가 나보고 뭐라 해서 마음이 바뀌었어.]
[지한 : …….]
움찔한 지한이 민성의 손에 급히 빵을 쥐여 주었다.
[민성 : 됐거든?]
[지한 : 쪼잔하게 굴지 말고 그냥 먹어. 한백야, 이따가 하나 더 사 줄 테니까 잠깐만 빌리자.]
[민성 : 뭐, 쪼오자안?]
받지 않으려는 민성과 어떻게 해서든 쥐여 주려는 지한의 실랑이가 비쳤다. 그러다 잠시 후, 단정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가 나타나며 장면은 전환됐다.
[코치 : 센터로 집합.]
농구부원들이 코트로 집합하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다.
날렵한 동작으로 코트를 가로지른 백야가 지한에게 공을 패스하자,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이며 곧장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이후 청의 드리블 장면과 민성이 스코어를 올리는 장면을 지나, 유연의 덩크슛으로 5 대 5 연습 경기 장면은 끝이 났다.
[코치 : 다들 수고했고, 내일은 아홉 시까지 모이는 거로 하자. 민성이는 가족 여행 잘 다녀오고.]
[민성 : 네. 일요일 오후 연습은 참여할게요.]
[청 : 부러워! 갈매기 잡아 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장면이 마무리되고, 가로등 켜진 길을 걷는 민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쪽 어깨에 커다란 스포츠 백을 멘 그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민성 : 수비가 부족해.]
“세상에.”
차분하지만 작위적인 내레이션에 민성이 귀를 틀어막았다. 눈은 자신의 뒷모습이 나올 때부터 줄곧 감은 상태였다.
“안 들려. 난 아무것도 안 들려.”
현실의 민성이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동안, 화면 속 민성은 텅 빈 버스 정류장에 홀로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부모님과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민성은 해변가의 농구 코트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거렸다.
[엄마 : 쓰읍. 민성이 너 가족 여행하는 동안에는 농구하지 않기로 엄마랑 약속했어. 그치?]
[민성 : 으응….]
[엄마 : 농구가 그렇게 좋아?]
[민성 : 재밌잖아.]
민성의 엄마 역할을 맡은 중년 배우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엄마 : 그럼 엄마 잠깐 아빠랑 시장 좀 다녀올 테니까 여기 있어. 절대 어디 가면 안 된다?]
[민성 : 응! 천천히 다녀 와.]
손을 흔들며 떠나는 부모님을 배웅해 드린 민성은 곧장 농구장으로 달려갔다.
얼핏 본 건데도 키가 큰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경기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오! 율무다!”
“크으~ 찢었다.”
청이 화면을 가리키자 율무가 박수를 치며 자신의 등장씬을 만족스러워했다.
[민성 : 잘한다….]
상대 팀이 던진 공이 백보드를 맞고 튕겨져 나오자 율무가 그 공을 가로채며 리바운드했다.
탄탄한 체격으로 상대 선수와의 몸싸움에서도 쉽게 밀리지 않음은 물론, 놀라운 점프력으로 골대에 덩크슛을 내리꽂는 힘 또한 엄청났다.
율무가 선수일 거라 확신한 민성은 경기가 끝난 뒤 그에게 다가갔다.
[민성 : 안녕하세요. 경기 너무 잘 봤어요.]
[율무 : 예? 아, 예.]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팀인지 여쭤봐도 되냐는 질문에 율무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율무 : 팀? 그냥 학생인데요. 내 그마이 삭아 보이나….]
[민성 : 아니요, 그게 아니라 너무 잘하셔서 당연히 선수이신 줄 알았어요.]
누군가의 경기를 보면서 같이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처음이라는 말에 율무가 쑥스러워했다.
[율무 : 아 뭔데~ 쑥스럽구로. 나는 또 내 보고 삭았다 카는 줄 알고 상처받을 뻔했잖아요.]
[민성 : 그럼 혹시 어느 학교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서울 고등학교 농구부 3학년 도민성입니다.]
[율무 : 아~ 내보다 한 살 많으시구나. 어려 비는데.]
[민성 : …네?]
[율무 : 아무것도 아입니다. 햄인데 말 편하게 하세요.]
폭발하는 사투리에 도시 소년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율무 : 근데 내는 그냥 학생인데. 갈매기고 2학년. 농구는 그냥 몰래 하는 기고.]
[민성 : 몰래?]
[율무 : 아, 실수. 그냥 취미다, 취미.]
그냥 취미로 이만한 플레이를 보여 주다니. 엄청난 재능이었다.
그 말에 민성이 눈을 빛내며 율무를 올려다봤다. 그리곤 썸네일의 그 엄청난 대사를 내뱉었다.
[민성 : 너, 내 동료가 돼라!]
[율무 : …….]
[민성 : 나랑 농구 하자! 너는 꼭 농구를 해야 해!]
민성의 급발진에 율무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썩어 들어갔다.
[율무 : 뭐고. 인마 이거 상또라이네.]
활짝 웃는 민성과 인상을 찡그린 율무의 얼굴이 반반씩 교차되면서 민성의 내레이션이 다시 시작됐다.
[우리들의 뜨거운 여름]
[바닷바람을 타고 불어온 찬란한 너]
장면이 바뀌며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백야와 청, 유연, 지한의 모습이 보였다.
[더 높은 꿈을 향한 우리들의 청춘]
[우리와 새로운 시작을 하자!]
[Highteen 08.22.6PM]
하이틴 로고와 함께 OST가 흘러나오며 영상은 끝이 났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진 민성은 그제야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나 연기 왜 저렇게 했지? 미쳐 버릴 것 같아.”
“왜? 형 잘했어. 배우도 아닌데 이 정도면 완전 잘한 거지.”
“말이라도 고맙다, 백야야.”
“응. 특히 내 동료가 되라는 붑,”
“아악! 말하지 마!”
민성이 백야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질렀다.
“그런데 나율무가 의외네. 너 왜 사투리 잘해?”
지한이 옆을 돌아보자 율무가 우쭐거리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또 한 연기하거든~ 타고났달까?”
“거짓말! 민성한테 배웠잖아. 저거 맨날 우리 방 와서 안 나갔어! 나 잠도 못 자고!”
“아이고~ 그래서 우리 청이 삐쳤어요?”
율무가 엉덩이를 토닥이자 청이 눈꼬리를 치켜뜨며 멀리 떨어졌다.
“악! 손버릇도 안 좋아! 하…. 우리 팀에 요술 공주가 너무 많아.”
청은 팀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