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하얀 실크 천을 걷어 내자 포도를 쥔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 공개됐다. 똘망똘망한 눈이 인상적인 민성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폼 보드의 두께가 두꺼운 걸로 봐서 멤버들의 사진이 차례대로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았다.
[율무 : 귀여워~ 당신이 말로만 듣던 프린스 포도?]
[민성 : 예아.]
[유연 : 푸핫! 지금이랑 똑같이 생겼네~]
[청 : 민성 엄청 작아!]
멤버들의 반응이 민망한지 민성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지한 : 몇 살 때야?]
[민성 : 중학교 1학년.]
어떤 사진을 보여 드릴까 고민하다가, 마침 ID에 캐스팅됐던 날 찍은 사진이 있길래 가져왔다고 했다.
트로트를 부른 민성이 인기상으로 포도를 받아 할머니 집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이라는데.
[민성 : 그런데 할머니께서 포도 농사를 하셔서 집에 포도가 많았거든요. 근데 상품으로 또 포도를 주셔서….]
민성은 어릴 적 다른 친구들도 집에서 매일 포도를 먹는 줄 알았다고 했다. 밥이랑 비슷한 개념으로.
원래부터 매년 여름이면 포도가 끊이질 않았지만, 저 해에는 정말 질리도록 먹었다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유연 : 형 연습생 때도 여름만 되면 매일 포도 가져왔었잖아.]
[민성 : 맞아. 엄마가 자꾸 가져가라 그랬어. 집에 포도가 너무 많다고.]
아마 올해부터는 포도가 숙소로 올 테니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고 일렀다.
[백야 : 그럼 저 때 캐스팅 받고 바로 서울로 올라온 거야?]
[민성 : 바로는 아니고 1학년까지 마치고 올라왔지.]
민성이 옛 추억을 회상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민성 : 막 입사했을 때 연습실 밖으로 에임 선배님들 지나가면 혼자 좋아하고 그랬는데.]
[율무 : 맞아. 진짜 신기했어.]
이어서 공개된 사진은 유아용 의자에 앉아있는 율무였다. 상자 위에 다리를 올린 채 머리 뒤로 손을 올린 자세가 범상치 않았다.
거기다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 당당함까지. 짓궂게 올라간 입꼬리는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다.
[지한 : 풉.]
[청 : 작은 율무 처음 봐!]
[유연 : 저 때부터 포즈가 남달랐네.]
[백야 : 그런데 우리 10대 때 사진 가져오는 거 아니야?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때.]
너무 어린 시절의 모습에 백야가 의문을 표했다.
[지한 : 그냥 어릴 적 사진이면 되는 거 아니야?]
[율무 : 어렸을 때 이사를 너무 자주 다녀서 중학교 앨범이 없어요~]
부모님께서 창고까지 다 뒤져 보셨지만 찾을 수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율무 : 고등학생 시절 사진은 많이들 보셨을 것 같아서 쁘띠 율무로 준비해 봤습니다. 저 모습도 저의 학창 시절이긴 하니까요.]
[유연 : 하긴. 형 연습생 때 사진은 많이 돌아다니니까.]
[민성 : 고놈 참 말 안 듣게 생겼다.]
[율무 : 아니야~ 내가 어릴 때 얼마나 얌전했는데. 어머니께서 친구들이랑 잘 못 어울릴까 봐 걱정이 많으셨다고.]
[지한 : 푸핫!]
율무의 발언에 지한의 웃음이 터져 버렸다. 장난기가 많다 못해 흘러넘치는 아들을 보며 그런 고민을 하셨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 사진 진짜ㅋㅋㅋㅋㅋㅋ 작은 율무 쏘큐트
-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초등학생 나율무
- 지한이 우는데요?ㅋㅋㅋㅋㅋ
- 정말 괜한 걱정하셨어요 어머님ㅎㅎ
[지한 : 누가 봐도 개구쟁이잖아.]
[율무 : 아닌데? 나 진짜 얌전했는데?]
지한을 계속해서 웃기고 싶었는지 율무가 조신한 이미지를 고집했다.
저 때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인데, 키도 작고 소심해서 친구가 많지 않았다는 율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키가 컸다고 한다.
[민성 : 난 너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나보다 커서 형인 줄 알았어. 그때 키가 몇이었지?]
[율무 : 중3 때 180cm?]
[청 : 와, 크다!]
[백야 : 180cm….]
백야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율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율무 : 당백이 왜?]
[백야 : 아니야. 아무것도….]
백야는 중3 율무보다 키가 작다는 사실에 현타가 온 것 같았다.
최근 건강 검진에서도 민성의 키가 180cm를 기록하며 백야는 팀 내 유일한 170cm 대가 되어 버렸다.
몰래 배신자를 노려본 백야는 앞에 놓인 테이크아웃 잔의 빨대를 쭉 빨아당겼다.
개복치는 원래 아메리카노를 선호했지만 최근 대업을 위해 라떼로 종목을 갈아탔다.
[율무 : 그럼 다음 사진 볼까요~]
세 번째 어린이는 백야였다.
꽃밭에 쭈그려 앉아 꽃받침을 한 모습이었다. 표정에 영혼이 없는 걸 보니 자의로 취한 포즈는 아닌 것 같았다.
[유연 : 방금 찍은 거 아니야?]
[민성 : 어제 태어났니?]
[율무 : 이 사진 며칠 전에 내가 찍어 준 거 같은데?]
[청 : 작은 햄스터!]
[백야 : 다 틀렸거든?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나 사람이야.]
지한만 조용히 사진 속 백야의 나이를 추정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숫자는 좀처럼 열 살을 넘기지 못했다.
[지한 : 초등학교 2학년.]
[백야 : 저거 중3 수학여행 때 찍은 건데….]
[지한 : 열여섯?]
[청 : 저게 Sixteen이라고?]
멤버들이 믿을 수 없다며 놀라워하자 백야는 살짝 울컥했다.
[백야 : 그래. 내가 봐도 열여섯으로 안 보이긴 해. 근데 진짜 중3 맞아.]
[율무 : 우리 당백이가 엄청난 동안이네~]
[유연 : 그런데 저 때는 안경 안 썼네?]
멤버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백야가 사진 속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때는 바야흐로 은용중 3학년 중학생 시절로,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파도 피하기 놀이를 하다가 안경을 떨어뜨린 다음 날이라고 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눈 초점이 안 맞는다며 과거의 자신을 비웃기도 했다.
[백야 : 저 때 담임선생님께서 안경점에 데려가 준다고 하셨는데, 제가 중2병이 조금 늦게 와서 안 가도 된다 그랬어요. 저 때는 뿌연 게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였거든요.]
- 1년 늦게 온 중2병ㅋㅋㅋㅋㅋ
- 진심 어제 찍었는데??? 성형했다고 XX한 애들 쏙 들어가겠다 사이다
- 그래 저 ㅈ경이 문제였다니까ㅠ
- 수학여행 사진으로 성형설 일축
- 은용중 금용고면 완전 엘리트 코슨데. 강남 8학군. 백야 집 잘살아?
이어서 네 번째 사진이 공개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호나 눈물보단 물음표로 도배되기 바빴다. 멤버들도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
- 아 미친 누구야 이거? 청이??
- 여자애???
- 무슨 애기가 저런.. 시크한 표정을 지을 줄 안다고?
네 번째 어린이는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의 사진이었다.
[민성 : 뭐야? 이거 누구야?]
[지한 : 난데.]
[백야 : …저게 너라고?]
믿기지 않는 듯 백야가 사진과 지한을 번갈아 봤다.
지한은 자기 위로 형이 두 명이나 있다 보니 어머니께서 셋째는 딸이기를 은근히 바라셨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는 머리도 기르고 여아처럼 꾸미고 다녔는데, 자아를 갖게 된 후론 짧은 머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한 : 그런데 나쁘지 않았어요. 저 때 기른 머리로 처음 기부도 해 보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율무 : 착한 어린이였네~]
[유연 : 팬분들이 청이랑 형 닮았다고 할 때 잘 이해 못 했는데, 어릴 때 사진 보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둘이 분위기가 비슷해.]
[청 : 그런가? 우리 닮았나?]
청과 지한이 서로의 얼굴을 살피듯 마주 봤다.
[청 : 그럼 형이 내 동생 할래?]
[지한 : 내가 손해 아니야?]
[청 : 아니야. 지한한테 좋은 거야. 나는 동생한테 진짜 잘해 주거든. 그치, 백야.]
[백야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다시 시작된 청의 동생 타령에 백야가 진심으로 물었다.
[백야 : 넌 왜 그렇게 동생에 집착하는 거야?]
[청 : 동생 갖고 싶어! 노아도 있고, 루카스도 있고, 제이콥도 있는데 나만 없어!]
[백야 : 그런 이유라니…. 나도 없어. 민성이 형도 없고.]
- 동생한테 잘해 준다면서 왜 백야한테 말해 보래? 아 청이가 형이야?ㅋㅋㅋㅋ
- 백야 이해 못 했다 지금ㅋㅋㅋ
- 청이 친구들 강제 실명 공개
- 도대체 이 집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거야ㅋㅋㅋㅋㅋ
- 어떻게 해서든 막내를 벗어나려는 자와 막내만큼은 피하려는 자의 눈치게임ㅋㅋㅋ
그 사이 유연은 다음 사진을 공개했다.
조금 전 지한의 사진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랑하지만 훌쩍 커 버린 청소년의 모습이었다.
하트 풍선과 핑크색으로 꾸며진 가판대에 선 청은 카메라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청 : 오! 나다!]
[백야 : 세상에.]
[민성 : 저게… 뭐야?]
[유연 : 이런 거 막 공개해도 돼?]
[청 : 왜?]
청만 빼고 모두가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채팅창 또한 사진이 공개되기 무섭게 댓글이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다.
- 키싱 부스요?????
- 와우 잠깐만;;
- 50센트밖에 안 했네... 개 혜자
- 천조국 클라스.......
- ㅠㅠㅠㅠㅠㅠ안돼ㅠㅠ아무튼 안돼ㅠㅠㅠ 시간 돌려
사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부스에 달린 간판이 문제였다.
슬쩍 팬들의 반응을 살핀 민성이 어떻게든 사진을 수습해 보려 했다.
[민성 : 그러니까 이게, 어…….]
민성이 애를 쓰는 사이 유연이 청의 팔을 잡아당겨 빠르게 귓속말했다.
잠시 후 멤버들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게 된 청은 펄쩍 뛰며 강하게 부정했다.
[청 : No! 저거 다 가짜야! 그냥 부스만 있는 거고 진짜 하는 거 아니야!]
[율무 : 휴. 나 사실 속으로 되게 당황하고 있었어.]
율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청 : 당연히 가짜지! 그냥 포토존 같은 거야. Maybe 8학년? 9학년? 나 어렸어!]
논란이 될 뻔한 모습은 학교 축제 때 찍힌 사진으로 ‘키싱 부스’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유행처럼 번지던 것이라고 했다.
건전한 일화를 듣고 나니 사진 속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하이틴 남주 재질
- 쿼터백 청청 하이틴 드라마 서사 뚝딱
- 청이는 진짜 인생이 하이틴 그 자체.. 아이돌 하러 한국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함ㅜㅜ
이어서 마지막 사진의 주인공은 유연이었다.
청과 마찬가지로 중학생의 앳된 모습이었지만, 지금보다 얼굴선이 부드러워 청순한 미인상에 가까웠다.
하와이안 셔츠에 빨간색 반바지를 입은 중딩 유연은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민성 : 예쁜데? 근데 옷 뭐야. (웃음)]
[백야 : 너 되게 예뻤다….]
[유연 : 왜 과거형이야?]
[백야 : 아니, 지금은 되게 남자다운데 어렸을 때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유연 : 그런가? 비슷하지 않나.]
유연이 사진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율무 : 비슷한데 확실히 선이 얇긴 하네. 우리 유연이 완전 걸그룹 센터 상~]
[유연 : 저 형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민성 : 다들 잘 컸네. 아주 바람직해.]
민성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뿌듯해하자 유연이 어이없어했다.
[유연 : 누가 보면 형이 우리 키운 줄 알겠다.]
[민성 : 나는 너희 얼굴만 봐도 배불러.]
[청 : 으…. 할아버지 같아.]
고작 한두 살 차이면서 동생들을 끔찍이도 챙기는 민성이었다.
해당 사진은 아마도 하와이로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일 거라며, 유연은 저 화려한 패션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고 어머님의 취향임을 짚고 넘어갔다.
[지한 : 근데 잘 어울려.]
저런 옷을 입고도 청순한 사람은 처음 본다 하자 유연이 능청스레 칭찬을 받아들였다.
[민성 : 네. 이번 컴백을 준비하면서 서로의 10대는 어땠을지 많이 궁금했는데, 나잉이 여러분들과 함께 보니까 더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율무 : 맞아요~]
그럼 이쯤에서 다음 교시로 넘어가 보려 한다는 말과 함께 민성이 백야를 돌아봤다.
[민성 : 다음 순서는 백야 씨가 소개해 주시겠어요?]
[백야 : 네! 다음은 3교시로 간식 게임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