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 * *
컴백 첫 방송을 앞둔 멤버들은 사전 녹화를 위해 아침 일찍 샵을 찾았다.
“하암….”
1분에 한 번씩 하품을 하던 백야는 결국 졸음을 참지 못하고 꿈나라로 떠나 버렸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백야가 광란의 헤드뱅잉을 시전하자 메이크업을 해 주던 직원이 곤란해했다.
“어어…!”
턱-.
직원의 비명에 남경이 잽싸게 팔을 뻗었다. 하마터면 아이라인이 관자놀이까지 길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제가 잡고 있을 테니까 마저 그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얼른 끝낼게요.”
정수리를 짚은 남경은 백야의 고개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머리 위로 손을 얹는 순간 깨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백야의 얼굴은 전보다 편안해 보였다.
거울에 비친 개복치를 감상하던 그는 ‘사람이 이렇게도 잠을 잘 수 있구나’ 조용히 감탄했다.
요즘 들어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검진 결과 아무 이상이 없음은 물론. 멤버들 중 가장 건강한 신체의 소유자라는 말을 들었을 땐 황당하기까지 했다.
“흠…….”
백야의 잠든 얼굴을 감상하던 남경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 혈색이 없어서 더 아파 보이는 게 아닐까.
메이크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볼 터치 같은 걸 세게 하면 지금보다는 나아 보일 것 같았다.
때마침 핫 핑크 색상의 크림 블러셔를 꺼내 드는 직원에 남경이 속으로 박수 쳤다.
“선생님. 팍팍 좀 발라 주세요.”
“네. 그렇지 않아도 과하게 들어갈 거예요.”
왠지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남경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색조를 얹는 손이 거침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뿐인가. 앙증맞게 솟은 뺨에서 시작된 핫 핑크는 볼을 넘어 콧잔등, 눈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당황한 남경은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했다.
“어… 그… 선생님?”
“네, 매니저님.”
“혹시 제가 드린 말씀 때문일까요.”
“네? 뭐가요?”
직원은 대답을 하는 순간에도 백야의 콧잔등 위로 핑크색 크림을 펴 바르고 있었다.
“분홍색이 조금….”
돌려 말하기에 소질이 없는 남경은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행히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직원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으며 친절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 달라고 하셨어요.”
“…제가요?”
“아니요. 스타일리스트분께서.”
“저희 회사에서요?”
“네. 피곤해 보이는 게 백야 님 이번 메이크업의 포인트라고.”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피곤을 넘어서 숙취! 그래, 술이 잔뜩 취한 주정뱅이를 떠올리게 했다.
“정말 이게 맞는 건가요?”
“네.”
“…….”
전문가가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데 거기다 대고 무슨 말을 더하리.
몇 번이고 달싹거리던 남경의 입술은 결국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다물렸다.
* * *
[데이즈 하이틴 사전 녹화 후기 = 교복 입고 나왔고, 이건 된다. 끝.]
[쇼플리 사녹 후기
여러분 복숭아가 미쳤어요]
[쇼플리 사녹 후기 요약
토끼 : 영국 명문 귀족 사립 고교 전교 회장
강아지 : 이번 컨셉 최대 수혜자
고양이 : 츤데레 반장
사슴 : 은혜로운 이목구비 그저 갓
복숭아 : 병약 큐티
병아리 : 인간 아님 아무튼 아님]
[백야... 백야 메이크업이 너무 충격적이에요.... 원래도 깨물면 복숭아즙 나올 것 같은데 오늘은 진짜 과즙미 100%
그 작은 얼굴에 눈코입 다 들어간 거도 신기한데 팔꿈치마저 핑크색... 저 기절]
[오늘 사녹 후기 올라올 때마다 보이는 게 백야 메이크업하고 율무 눈 짱 크고 애들 개 잘생겼다ㅋㅋㅋ]
[오늘 녹화 3번 했고 청이가 제일 먼저 올라왔는데, 백금발 진심 개 잘 어울리고 조오오올라 잘생김...]
[유연이 올라와서 계속 인사해 주다가 뮤비 마지막에 나오는 ‘넌 나의 하이틴’ 볼 톡톡하고 도망갔는데 하필 백야 뒤에 숨어서 하나도 안 가려졌어ㅠㅋㅋㅋ]
[코디 멤버들 교복 캐해 완벽]
[청이 진짜 진짜 진짜 잘생김.. 턱선이 진짜 미침.. 보자마자 아 저런 애가 아이돌 하는 거구나 깨달음을 얻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음]
[오늘 사녹 라이브였어? 애들 아침으로 CD 먹었대??? 난 당연히 컴백주라 AR 튼 줄 알았어....]
[내가 ID돌밖에 못 파는 이유
1. 경이로운 얼굴
2. 돈 처바른 비트
3. 그 비트를 씹어먹는 실력]
[에임 Waf Waf때의 데자뷔가 느껴진다... 데이즈 하이틴 무조건 된다 이거]
[올라오는 거 보니까 오늘 착장 교복이었나 보네ㅜㅜ 내일은 농구복 입어주려나? 유니폼 율무 존버]
[☆하이틴 쇼플리 사녹 후기☆
녹화 3번 했는데 역시 내 취향은 청량인가봐ㅠㅠ 진짜 너무 예쁘고 예뻤다... 녹화 한 번 하고 모니터링하러 들어가는데 지한이 넘어질 뻔하니까 백야가 박력 있게 팔 잡아줬어
└ 민성이랑 지한이 기다리는 동안 나머지 애들 무대 위에서 농구하는 거처럼 장난치는데, 백야 혼자 E 사이에 낀 Iㅋㅋㅋㅋ
└ 실시간으로 기 빨리는 거 구경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ㅋㅋㅋ 환상의 케미였다]
[돌판 경력 15년 차 할미가 말한다. 아이돌 평균 미모 중에 데이즈 따라올 그룹 없다]
[유연이 교복 입은 팬 발견하고 학교는 어떻게 하고 여기 있냐고 물으니까 팬이 안 가도 된다 함ㅋㅋㅋㅋ 그러니까 막내즈 반응
청 : 오! 엄청 좋은 학교다!
백야 : 그러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걱정)
팬 : 데이즈 보러 간다고 하면 빼줘요~
유연 : 얘네 정말 믿어요
백야 : 내가 바보야?
유연 : 어? 안 속네 (웃음)
└ 백야 엄청 걱정하는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쩔쩔매는데 너무 귀여워서 죽고 싶었다...]
[쇼플리 생방 기대 중♡ 백야 MC 보는 거 1열에서 직관할 멤버들 볼 생각에 벌써 재밌다]
* * *
사전 녹화를 끝낸 데이즈는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멤버가 곯아떨어진 가운데,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백야와 민성이 유일했다.
생방송 진행을 위해 무대 화장을 지우고 새로 메이크업을 하던 백야는 거울 너머로 핸드폰을 노려보는 민성을 발견했다.
“형, 왜 그래?”
“…어? 나?”
민성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응.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아 보인다며 백야가 걱정했다. 그 말에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던 실장도 뒤를 힐끔 돌아봤다.
“민성이 왜. 너 혹시 연애하니?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만 보고 있네.”
“아니요?!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민성은 진심으로 당황한 듯 강하게 부정했다.
“어머, 너 더 수상하다? 그리고 연애하는 게 잘못도 아닌데 좀 하면 어때~ 회사랑 팬들한테만 안 걸리면 되지. 안 그러니 백야야?”
“……안 돼요.”
“어휴. 이 착해빠진 놈들.”
그때 자는 줄만 알았던 남경이 번쩍 눈을 뜨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님 참 좋은 거 가르치십니다. 예? 도민성 절대 안 된다. 핸드폰 이리 내.”
“에이, 뭐야. 안 주무셨어요? 난 또 자는 줄 알았지.”
다른 팀 보니까 1년 차에도 잘만 사귀더라며, 실장이 아는 애들만 벌써 여러 명이라고 했다.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연락할 데가 있다며 변명하던 민성은 결국 남경에게 폰을 빼앗기고 말았다.
백야는 자기 때문에 핸드폰을 압수당한 것 같아 미안해하는데, 그때 상태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Q. 아이돌 하려고 태어남(1) : 프로 아이돌이라면 돌발 상황도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법!
언제 터질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서 당신의 대처 능력을 보여 주세요.
- 기간 내 1회 (6일 23시간 59분 남음)
※ 실패 시 패시브 강화]
가늘고 길게 살기를 희망하는 개복치의 머리 위로 시한폭탄이 떨어졌다.
기간은 일주일.
졸지에 폭탄을 처리하게 된 백야는 이제부터 일주일 동안 불안에 떨게 생겼다.
‘대놓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돌발 상황이라니.’
이렇게 무책임한 퀘스트가 어디 있냐며 따지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말아 물며 앞을 노려보는데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백야가 거울을 보며 불만 어린 표정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에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표정은 그게 아니었는데….”
“오, 오늘따라 얼굴이 부은 것 같아서 그랬어요.”
백야가 거울 속 얼굴을 가리키며 횡설수설했다.
“아까 무대 녹화한 거에 찐빵처럼 나왔을까 봐.”
분명 모니터링을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백야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저 다된 거예요?”
“응. 일단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대본 연습하고 올게요.”
백야가 모퉁이에 올려 두었던 MC 대본을 집어 들며 방긋 웃었다.
“백야 벌써 가게? 아직 시간 안 됐잖아.”
“드라마 촬영 때문에 오늘 방송 대본을 못 읽었어요. 누나 오기 전에 조금 봐 둬야 할 것 같은데 여기는 애들 자고 있으니까.”
백야는 멤버들이 깰까 봐 조심스럽다며 먼저 MC 대기실에 가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 민성이 자신도 함께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
“형도?”
“너는 왜.”
남경이 민성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백야 혼자 심심하잖아. 내가 연습 상대해 주려고.”
“그래 그럼.”
혼자 보내는 것보단 둘을 보내는 게 낫겠다 판단한 그는 대충 허공에 손을 저었다.
민성의 꿍꿍이를 알지 못하는 백야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를 MC 대기실로 데려갔다.
“여기는 조금 작네?”
“응. 누나랑 나밖에 없으니까.”
아늑한 대기실을 둘러보던 민성이 백야의 옆자리에 앉았다.
“복수, 아니.”
“…복수?”
“상대 MC분은 언제 오시니?”
“단아 누나?”
백야가 벽시계를 보며 한 시간 정도 뒤에 올 것 같다고 답해 주었다.
“아~ 한 시간?”
“응. 왜? 그전에 가게?”
“뭐…. 그렇지.”
민성의 대답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백야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대본 위로 형광펜을 칠하기 바빴다.
“형, 나 이것만 하고.”
“응. 천천히 해.”
자신의 대사만 칠한 뒤 연습을 도와달라는 말에 민성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있잖아, 형 진짜 착한 거 같아. 되게 든든해.”
“에이…. 또 왜 그래.”
“그냥. 요즘 들어 많이 느껴.”
꿍꿍이가 있는 민성은 갑작스러운 칭찬이 불편했다.
“나 처음 데뷔조 합류했을 때 애들이 형 아니면 리더 할 사람 없다 그랬잖아. 갈수록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순진한 백야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칭찬을 늘어놨다.
“그렇지 않아. 아무나 했어도 다 잘했을 거야.”
펜을 돌리며 태연한 척하던 민성은 순간적으로 놓치고 말았다. 양심이 찔린 탓이었다.
“아…….”
떨어뜨린 펜이 구석 끝까지 굴러가자 민성이 탄식을 뱉었다.
“여기 바닥 수평이 좀 안 맞나? 상암동 지반이 약해서 건물이 기울고 있다던데. 진짜 아니야?”
“에이…. 설마.”
자리에서 일어난 민성이 펜을 줍기 위해 몸을 낮춘 때였다.
똑똑-.
누군가 대기실 문을 노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