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단아 누나?”
백야가 미어캣처럼 대기실 문을 바라봤다.
“어? 백야 일찍 와 있었네.”
이제는 제법 친해진 두 사람은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영원히 거리 두기를 할 것 같던 단아도 곧잘 적응했다.
“왜 혼자 와?”
“언니는 조금 늦을 것 같아. 근처에 잠깐 볼일이 생겼다 그래서 다녀오시라 그랬어.”
홀로 나타난 이유에 대해 설명하던 단아는 문을 닫기 위해 돌아섰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구석에서 몸을 쭈그리고 앉은 커다란 덩치가 광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꺄악!”
“누나, 저 사람은,”
놀란 백야가 민성을 소개해 주려는데 단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빨랐다.
“도, 도민성?”
“그래. 나다.”
몸을 일으킨 민성이 단아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위험을 감지한 단아는 일단 도망가고 볼 생각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민성의 손에 의해 허무하게 닫혀 버렸다.
탁-.
“어디 가려고? 우리 할 말이 많지 않나.”
“미, 민성아….”
“네가 날 차단해? 그래 놓고 백야랑 매주. 몰래. 만나고 있었다 이 말이지.”
“다 오해야. 오해.”
대기실 문과 민성 사이에 갇힌 단아가 식은땀을 흘렸다.
치정극에서나 나올 법한 벽치기 자세와 심상치 않은 대화에 백야의 동공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형?”
놀란 백야가 용기 내 민성을 불러 보지만 도씨 가문 사람들에게 백야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그날 새벽에 네 문자 받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그, 그건 나름대로 내 최선이었,”
“입 닫아.”
민성이 저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보는 백야는 충격으로 굳어 버렸다.
일단 대화 내용만 들어 봤을 때 이건 사랑싸움이 분명했고, 단아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로 민성은 화가 많이 난 상태 같았다.
‘어쩐지. 아침부터 저기압이더라니 차였구나.’
제가 고래 사이에 끼어 버린 새우가 됐다고 확신한 백야는 난감했다.
저는 단아와 아무 사이도 아닌 데다, 단아와 민성이 그렇고 그런 사이일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백야는 결백했다.
‘이걸 어떻게 말리지.’
거기다 아까부터 자꾸 단아와 눈이 마주치는 탓에 눈새의 오해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었다.
단아의 아이 컨택을 도움 요청으로 해석한 백야는 자신이 남자답게 나서서 해명하기로 했다.
“형! 나는 누나랑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그러나 민성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백야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야.”
“…네?”
당황한 백야는 첫 만남 이후 단 한 번도 쓴 적 없던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너 말고. 도복순.”
자신의 부름에 애꿎은 백야가 대답하자 민성이 다시금 단아를 불렀다.
“아악!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지! 나에게는 단아라는 아주 훌륭한 이름이,”
“염병. 단아 좋아하네.”
“씨이….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내가 너한테 뭐 피해 준 거라도 있어?”
“집은 또 왜 나갔니? 말도 없이.”
‘데뷔 전부터 동거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
아침 드라마급 막장 전개에 백야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놀란 가슴을 달래려 물을 마시는 손이 달달 떨렸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은 이 방을 무사히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직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이제 애 우는 소리라면 아주 지긋지긋해!”
주르륵-.
입술에 힘이 빠진 백야의 입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난 이 세상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제일 싫어!”
단아(본명 도복순)가 재수에 실패하자 그녀의 엄마는 더 강력한 기숙사 학원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삼수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단아는 부모님의 일을 돕는 조건으로 어린이집 출근을 하게 됐는데, 적성에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던 것이다.
결국 제 발로 어린이집을 뛰쳐나온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재수 학원을 등록했다.
그러다 입실을 하루 앞둔 어느 날, 단아는 우연히 배우 전문 소속사에 캐스팅된다.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쪽지 한 장을 남긴 채 집을 나온 단아는 그대로 기숙사가 아닌 회사 숙소에 입실.
운 좋게 초고속 데뷔까지 하지만, 이 같은 소식을 가족 중 누구도 몰라 본의 아니게 절연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 또라이야! 엄마한테 네 얘기 물어봤다가 너 재수 학원에 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러니까 너만 입 닫으면 돼. 성공하면 내 발로 기어들어 갈 거니까.”
“됐고, 그냥 지금 말해. 나이가 몇인데 부모님 걱정 시키고 있어.”
“싫어!”
하필이면 왜 네가 백야랑 같은 팀이어서 날 힘들게 하냐며 단아가 얼굴을 구겼다.
한편 자신의 운명만으로도 버거운데 멤버의 엄청난 비밀까지 알게 돼 버린 백야는 도저히 두 다리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에 그제야 개복치의 존재를 떠올린 두 사람이 뒤를 돌아봤다.
“형이랑 누나한테 애가…….”
오해를 풀려면 갈 길이 멀어 보였다.
* * *
방학을 맞이해 본가에 내려간 복쑹은 거실 TV를 차지하고 있었다.
“보지도 않는 거 뭐 하러 틀어 놔?”
“보고 있잖아, 지금.”
“핸드폰만 하고 있었으면서…. 누나 아직도 아이돌 좋아해?”
“뭔 상관.”
복쑹은 MC 컷이 나올 때만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다른 채널을 넘나들고 싶어도 백야가 언제 나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항시 대기만이 답이었다.
다른 그룹의 무대가 나올 때는 핸드폰으로 사전 녹화 후기를 찾아보는 고도의 기술을 시전 중이었지만, 그녀의 한 살 어린 남동생은 알지 못했다.
“내 친구 중에도 연예인 있는데. 아이돌 데뷔했대.”
“오~ 잘 나감?”
“그냥저냥. 중학생 때 캐스팅돼서 가족이 다 같이 서울 올라갔어.”
“오~ 이름이 뭔데?”
“민서,”
“야, 조용히 해. 쉿.”
동생이 대답하려는 찰나 MC석이 비치며 백야가 멘트를 시작했다.
[백야 : 네~ 이번에 만나볼 분은 어떤 분들이죠?]
[단아 : 올여름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할 하이틴 농구부로 돌아온 분들이죠? 데이즈 모셔 보겠습니다~]
가운데에서 데이즈를 소개한 백야가 자리를 비켜 주며 율무의 옆자리로 뛰어갔다.
[민성 : For your days!]
[단체 :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백야는 MC와 데이즈 멤버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속 친구를 알아본 복쑹의 호적 메이트도 손가락을 가리키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 쟤야, 쟤!”
“뭐가.”
“민성이. 아이돌 됐다는 내 친구.”
복쑹의 사고 회로가 멈췄다.
“…민성이가 네 친구라고?”
“응. TV에서 보니까 기분 진짜 이상하다. 이거 찍어서 보내 줘야지.”
“…심지어 전화번호가 있어?”
“가끔 연락하는데 요즘 많이 바쁘대. 농구 배우러 다닌다 그랬나?”
“미친.”
복쑹은 갑자기 동생이 엄청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감격에 겨운 나잉이는 입을 가린 채 굳어 버렸다.
물론 그 순간에도 데이즈의 컴백 인터뷰는 진행되고 있었다.
[단아 : 그럼 기다려 주신 팬분들께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유연 : 네, 저희가 NAN 활동에 이어 한 달 만에 하이틴으로 돌아왔는데요. 올여름, 그리고 여러분의 하이틴을 톡톡히 책임지겠습니다.]
유연은 ‘톡톡히’라는 부분에서 볼을 두드리며 끼를 부렸다. 멤버의 자발적 애교가 마음에 들었던 멤버들은 광대를 숨기지 못했다.
[백야 : 하이틴 무대. 여기에 집중하면 무대를 더 잘 즐길 수 있다, 하는 포인트 세 가지. 어떤 게 있을까요?]
[율무 : 네~ 우선 한 곡에 두 가지 컨셉. 교복 데이즈와 농구부 데이즈를 만나 보실 수 있고요.]
[백야 : 네, 그리고요?]
[율무 : 두 번째는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안무와 퍼포먼스. 그리고 세 번째는~]
율무는 준비해 온 대사를 까먹었는지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코를 찡긋거리며 백야를 바라봤다.
[율무 : 백야의 깜찍한 얼굴?]
[청 : 푸핫!]
율무의 뒤로 청이 지한의 팔을 때리며 즐거워했다.
[율무 : 장난이고요. 세 번째는 저희 데이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하이틴 뮤직 드라마입니다~]
[단아 : 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그럼 하이틴은 어떤 곡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한 : 네. 설렘 가득한 첫사랑을 십 대의 학창 시절에 비유한 고백 송입니다.]
지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백야 : 빨리 만나 보고 싶습니다. 혹시 무대를 보기에 앞서 간단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민성 : 네, 물론이죠. 저희 팀 막내가 준비했습니다.]
막내라는 말에 청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청 : 햄… 야는 안 오나?]
[백야 : 저요? 저는 막내가 아닌데요.]
[청 : 아니야, 같이해야지.]
청이 백야의 손목을 잡아당겨 나란히 섰다.
[청 : 음악 큐!]
[지한 : 한국인 다 됐네.]
구수한 바이브로 노래를 요청하는 청에 멤버들이 단체 후렴구를 불러 주었다.
포인트 안무를 멋있게 소화해 낸 두 사람은 주먹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백야 : 우와~ 정말 너무 멋있습니다. 그럼 데이즈의 무대는 언제 만나 볼 수 있나요?]
[민성 : 그전에 활활 타오르는 열정, 라우드가 Fire 무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체 : 함께~ 보시죠!]
데이즈와 단아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자 화면이 전환됐다.
백야가 사라지자 다시 이성을 되찾은 복쑹은 방으로 돌아가려는 남동생의 발목을 붙잡았다.
“야, 잠깐만. 스돕.”
동생이 자신이 덕질하는 그룹의 멤버와 친구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예전과 같은 취급은 곤란했다.
“너… 뭐 먹을래?”
“누나 미쳤어?”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복쑹은 언제 어떻게 떨어질지 모르는 콩고물을 위해 기꺼이 감내하기로 했다.
“사랑스러운 동생아. 누나한테 미치다니…. 그냥 누나가 오랜만에 너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어서 그래. 치킨? 피자? 뭐 먹을래.”
“아무거나. 사 주면 먹지.”
“그래? 잠깐만 기다려.”
벌떡 일어난 복쑹이 치킨 쿠폰을 가지러 냉장고 앞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없을 때 몰래 써먹으려 했으나 대의를 위해 이 정도 투자쯤이야. 아깝지 않았다.
‘혹시 모르잖아? 쟤가 콘서트 티켓이라도 받아 올지.’
복쑹은 다 계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