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 * *
1위 발표를 마친 데이즈는 대기실 앞 복도에 서 있는 중이었다.
“우리 스케줄 하나 더 있지?”
“응. 보이는 라디오.”
지한의 물음에 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복에 달린 데이지 꽃 브로치를 관찰하던 백야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초면의 아이돌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미소를 지은 백야가 고개를 꾸벅이며 먼저 인사했다. 그러나 상대는 백야의 인사를 보지 못한 척 눈을 돌려 버렸다.
‘뭐지? 분명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졸지에 혼잣말을 한 꼴이 되어 버린 백야가 멋쩍어했다.
고개 숙인 백야가 손을 꼼지락거리자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지한이 옆을 바라봤다.
“왜.”
“어?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백야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자 지한이 맞은편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저희 쪽을 힐끔거리며 수군대던 무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지한이 빤히 바라보자 개중 한 명이 지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나 지한은 받아 주지 않았다.
“…방금 너한테 인사하셨는데.”
“못 봤는데 난.”
지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렇듯 복도에는 데이즈뿐만 아니라 많은 가수들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이는 PD를 기다리는 긴 행렬이었다.
“In your heart! 하트비트입니다!”
마침 기다리던 인물의 등장에 신인 그룹들이 앞다투어 팀 구호를 외쳤다.
점점 가까워지는 인영에 데이즈도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For your days! 감사합니다!”
일반인이 본다면 이 무슨 기괴한 장면인가 싶겠지만, 방송이 끝나고 PD를 기다렸다가 인사를 하는 건 음악방송 프로그램의 오랜 관례였다.
강제성을 띠지도 않을뿐더러, 신인의 경우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본인들의 의지로 하는 행동이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물론 끝이 허무하긴 했다. 30분을 넘게 기다린 것치고 PD는 눈 깜빡할 사이 사라져 버리곤 했으니까.
“우리도 가자~”
율무가 대기실 문을 열며 멤버들을 이끌었다.
뒤를 따르던 백야가 힐끗 돌아보자, 잠깐 사이 한산해진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로 빽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끝났어? 우리도 얼른 옷 갈아입고 이동하자.”
활동기는 항상 바쁘지만, 컴백 주는 다른 때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스케줄을 자랑했다.
오늘만 해도 오전 사전 녹화, 점심시간을 이용한 방송 인터뷰, 다시 방송국으로 복귀해 음악방송 일정을 소화한 후, 드디어 마지막 스케줄인 보이는 라디오를 하러 갈 차례였다.
“이것만 하면 오늘은 끝이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그래도 오늘은 연습 없어. 와~ 너무 좋다. 그치.”
남경이 밝은 척하며 피곤해 보이는 멤버들을 다독였다. 그러나 ‘내일 몇 시에 일어나냐’는 청의 질문에는 잠깐 입술이 굳어 버렸다.
“…다, 다섯 시?”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건 연습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며 구시렁거렸다.
오늘이 컴백 1일 차인데 이렇게 힘들면 다음 주는 어떻게 버티냐는 청이 백야를 바라봤다.
“그래도 스케줄 없는 거 보단 낫지 않아?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무 데서도 안 불러 주면 그게 더 슬플 것 같아.”
백야의 어른스러운 대답에 남경이 감격에 겨워했다.
“역시. 백야가 형은 형이구나? 의젓한 것 좀 봐.”
백야는 참 생각이 깊다며 남경이 칭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야가 자신의 동생이라 굳게 믿고 있는 청은 계속해서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햄스터야. 내가 죽으면 적에게 알리지 마라.”
“그전에 내가 죽고 없을 걸. 그러니까 장난치지 말고 빨리 옷이나 입어.”
백야가 목 아래부터 배꼽까지 일자로 드러난 청의 맨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단추를 잠글 힘이 없다.”
“그럼 그냥 그렇게 가.”
백야가 어리광을 받아 주지 않자 입술을 삐죽인 청은 민성에게로 갔다.
“형.”
“왜 또 불안하게 형이래….”
“…….”
“뭐. 잠가 달라고? 네가 애야? 애냐고.”
청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아프다 하자 민성이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단추를 채워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알아서 채워 주는 민성에 막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야, 넌 손 없냐? 형도 자꾸 받아 주니까 쟤가 저러는 거라고. 징그러워 죽겠어, 진짜.”
“나 어제 유연이 연습실에서 내 손 밟아서 손가락 아파.”
“…….”
청이 아픈 척 오버 액션을 취하자 유연이 탈룰라를 시전했다.
“너는, 어? 바로 나한테 왔어야지. 비켜 봐. 내가 해 줄게.”
결국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셔츠 단추를 모두 잠근 청은 다시 백야의 곁으로 돌아왔다.
“봤나?”
“좋냐?”
“자! 장난 그만 치고 조금만 더 서두르자. 퇴근길이랑 겹치면 너희 스케줄 펑크 난다.”
남경이 손뼉을 치며 환복을 서두르라 재촉했다.
“다 입었어요~”
율무의 목소리에 멤버들의 차림을 확인한 남경은 곧장 덕진에게 연락을 취했다.
미리 차를 대기시켜 놓으라고 해 둔 덕분에 데이즈는 따라붙는 팬들 없이 무사히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 * *
라디오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순간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
[새로운 퀘스트(히든)가 도착했습니다!]
[Q. 보아라 나의 잔망을! : 카메라를 향해 대놓고 애교를 부리는 건 하수나 하는 짓. 은근한 잔망으로 머글의 취향을 저격할 입덕 짤을 생성해 보자!
※ 제한 시간 내 성공 못 할 시 패시브 강화]
간만에 뜬 히든 퀘스트라 반가웠던 마음이 제목을 본 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보긴 뭘 봐. 미쳤나 봐 진짜….’
퀘스트 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물론. 백야는 아직 하수라 은근한 잔망 같은 고급 스킬은 사용할 수조차 없었다.
눈앞의 퀘스트는 패시브 강화 직행버스였다.
‘응. 거절.’
그렇게 당연히 거절을 누르려 했는데….
갑자기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나타난 누군가에 의해 ‘수락’을 하고 말았다.
“아악!”
“어우. 깜짝이야. 백야야 내가 더 놀랐다.”
에임의 구양이었다.
그는 국방의 의무를 하러 간 리더의 뒤를 이어 <비긴 어게인>의 DJ를 맡아 진행 중이었다.
“선배니임…….”
요단강행 버스에 올라탄 백야가 원망 어린 눈으로 구양을 올려다봤다.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꼼짝없이 귀염을 떨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미안. 이렇게 놀랄 줄 몰랐어. 괜찮아? 얘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혹시 나 때문이야?”
오늘도 열일하는 병약미 패시브 덕분에 백야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괜찮냐는 확인을 받곤 했다.
“괜찮아요….”
“아픈 거 아니고 그냥 이렇게 생긴 햄스터야. 근데 잘 놀라니까 앞으로 조심해.”
청이 백야 취급 주의 사항을 알려 주며 구양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런데 구양이 아무리 편하게 대하라고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격 없이 굴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을 텐데.
중간이라고는 없는 어린 외국인의 만행에 지한이 청의 팔을 잡아 내렸다.
“저희 최근에 건강 검진도 했어요. 백야가 제일 건강하대요.”
“아닌 것 같은데….”
미심쩍어하는 구양의 눈빛이 백야를 훑었다.
잠시 후, 부스 안으로 들어선 데이즈는 세 명씩 양쪽으로 나누어 앉았다.
광고가 몇 초 남지 않았다는 사인에 구양이 자세를 바로잡자, 멤버들도 헤드셋을 쓰며 PD의 사인을 기다렸다.
- 비긴~ 비긴~ 에임의 비긴 어게인.
오프닝 송이 흘러나오고 큐사인과 함께 구양의 오프닝 멘트가 시작됐다.
“여러분의 10대는 어떠셨나요? 저 때는 말이죠 하이틴 영화가 굉장한 인기였습니다.”
잘생긴 풋볼 주장과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지만, 어째서인지 평범한 학생으로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특히 인기였다고 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 코리아 하이틴으로 돌아온 여섯 명의 남자들이 있다며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우리 학교에는 풋볼 주장이 없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후속곡 ‘하이틴’으로 돌아온 농구부 주장들이 비긴 어게인을 찾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아름답게 조작해 드릴게요. 어서 오세요, 데이즈~!”
“둘, 셋.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데이즈의 팀 구호가 우렁차게 울렸다.
“와~ 두 달 만에 다시 뵙네요. 그동안 더 잘생겨지셨어요.”
“감사합니다~”
“비긴 어게인이 두 달 만이신 거고 컴백은 한 달 만인 거로 알고 있는데. 그럼 NAN 활동을 하시면서 같이 준비하신 거죠?”
“네. 맞아요.”
한 달 만에 컴백을 했다는 건 사실상 두 개의 타이틀을 동시에 준비한 거라며 구양이 감탄했다.
“정말 바쁘셨겠어요.”
“조금 바쁘긴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하긴, 지금은 힘들어도 재밌을 때죠. 엇. 방금 조금 꼰대 같았나요?”
구양이 농담을 섞어 가며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어쩔 수 없어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거든요.”
- 우리한테는 여전히 아가야ㅠㅠ
- 데이즈랑 구양이 둘 다 너무 귀여워서 할머니처럼 웃고 있어요
- 우리도 이제 할미 드립은 못 치겠어... 진짜 늙어서..
마크들의 거침없는 댓글에 구양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제 눈에 우리 맠둥이들은 영원히 소녀예요.”
과연 노련미가 느껴지는 멘트에 백야가 감탄했다.
“그런데 저희가 같은 회사긴 한데 자주 뵙지는 못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대표로 율무 씨가 근황을 들려주시겠어요?”
“네~ 일본으로 리얼리티 촬영도 다녀오고, 또 저희 데이즈가 단체로 연기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맞아, 저도 예고편 봤어요. 굉장한 걸 찍으셨더라고요.”
구양은 데이즈의 웹드라마가 엄청난 화제라며 자연스럽게 토크를 이어 갔다.
특히 예고편에 나왔던 유연의 명대사가 인상적인데, 청취자분들을 위해 잠깐 들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네. 가능합니다.”
유연이 입술을 할짝대며 당황했지만 빼진 않았다.
“애기야, 가자.”
“우와~ 이 박력! 유연 씨 너무 멋있는데요? 따라가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요.”
구양의 칭찬에 유연이 능글맞은 보조개를 지었다.
그러나 혼자 죽을 수는 없었는지, 저만큼이나 멋진 대사를 멤버들 모두가 하나씩 갖고 있다며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그럼 딱 한 분만 더 볼까요?”
구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야의 앞으로 또 상태창이 떠올랐다.
바야흐로 퀘스트 풍년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