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살기 힘드네.’
공허한 눈빛의 백야가 피곤한 얼굴로 우유를 홀짝였다.
“크으으.”
“…술 마시니?”
입가에 흰 우유 자국을 묻힌 백야가 아저씨 같은 효과음을 내자 민성이 떨떠름해했다.
컵을 힐끔거리는 리더와 눈이 마주치자 백야는 한 손을 들며 민성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마.”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민성은 빠르게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오늘의 안건은 1위 공약에 관한 거야. 조금 김칫국 같긴 하지만 아마 곧 그렇게 될 것 같아서. 하핫.”
가족회의의 진행만큼은 리더인 민성이 도맡아 했는데, 그는 말하면서도 쑥스러운 듯 귀를 붉혔다.
“아, 그리고 라이브 클립 어떤 곡 할지도 내일까지 말씀드려야 해.”
먼저 첫 번째 안건으로 1위 공약에 대한 의견을 하나씩 내주길 바란다며 민성이 포스트잇을 돌렸다.
바닥에 엎드린 청은 다리를 달랑거리며 영어로 크게 휘갈겨 적었다.
[Part exchange!]
파트 바꿔서 부르기였다.
그를 발견한 백야가 눈썹을 삐죽 세우며 청에게 항의했다.
“그거 내가 적으려 했는데!”
“No. 먼저 한 사람이 인간이야.”
“인간? 뭐가 이상한데….”
“No. 어제 배운 거야.”
바보들의 대화에 모두가 탄식했다. 특히 유연은 민성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형은 왜 책을 한 권만 사 줘서 이 사단을 만들어? 같이 사 줬어야지. 한국어 못하는 애가 둘이잖아.”
“그냥 사이좋게 봐~ 청아, 당백이도 좀 빌려 주고 그래~”
“Okay!”
“필요 없거든!”
0개 국어 확인 사살을 받은 백야가 억울해했다. 이게 다 청 때문이었다.
“너 때문이야!”
“내 핑계하지 마, 햄스터야.”
너는 원래 그랬다며 청이 얄미운 표정을 짓자 백야가 분노의 우유 원샷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민성의 앞으로 1위 공약 후보 여섯 개가 나란히 펼쳐졌다.
[파트 바꿔 부르기]
[헹가래]
[얼굴에 낙서하기]
[하이틴 섹시 버전]
[아이스크림 먹기]
[백야가 율무 업고 노래하기~]
개중 마지막 포스트잇을 발견한 백야가 인상을 찡그리며 율무를 바라봤다.
“야, 이거 너지.”
“형 믿지? 팬분들 무조건 좋아하실 거야.”
“웃기지 마. 그건 핑계고 네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적은 거잖아.”
“오~ 예리한데?”
율무의 깐족거림에 백야가 약 올라 했다.
“다리 끌릴 것 같은데….”
“안 끌려!”
지한의 중얼거림에 백야가 발끈했다. ‘겨우 10cm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하자 율무는 얄미운 얼굴로 11cm라고 정정해 주었다.
“너 또 키 컸어?”
“그러게~ 커 버렸지 뭐야.”
율무가 눈가로 브이를 가져다 대며 앙증맞은 포즈를 취했다. 그 모습에 열이 받은 햄스터가 앞니를 드러냈다.
“쓰읍. 어허! 당백이 진정해. 너는 네 문제점이 뭔지 알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맨날 그 뭐냐, 브로콜리, 견과류 이런 거만 먹으니까 그렇지. 네가 뭐, 진짜 햄스턴줄 알아?”
우유만 마신다고 되는 게 아니라며 훈수를 두자 백야는 아닌 척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도 갑자기 백야를 불렀다.
“백야 Love yourself! You are cool~ 지금도 멋진데 왜?”
과연 긍정충의 지역. 캘리포니아 출신다운 위로였…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고오맙다.”
“Your welcome!”
평균 키 181.1cm의 그룹에서 혼자만 평균 미달인 자신의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요즘 들어 자주 눈물이 앞을 가리는 백야였다.
“자, 자, 그만. 그럼 1위 공약은 이 중에서 뽑아서 하는 거로 하고. 다음은 라이브 클립 곡을 정해야 하는데,”
“무지개 길!”
청이 의견을 내기 무섭게 다른 멤버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 보려던 민성의 계획이 1분도 지나지 않아 틀어졌다.
“다른 곡들도 많잖아? 우리 좀 더 이야기를….”
“No. 이건 무조건이지!”
“그래도 좀 더….”
“No!”
필사적인 모습이 안쓰러워 민성의 편을 들어 줄까도 생각해 봤으나, 시간을 지체할수록 수면 시간만 줄어들 뿐이었다.
백야는 얼른 퀘스트를 끝내고 자고 싶었다.
“나도 무지개 길이 좋을 것 같은데. 수록곡 중에 반응도 제일 좋고 이번 기회에 우리 보컬을 좀 더 들려드리면 좋지 않을까?”
백야의 말에 율무가 박수를 치며 바로 그거라고 호응했다. 그렇게 가족회의가 끝이 나나 싶던 순간, 유연이 대뜸 소리쳤다.
“잠깐! 우리 벌칙 안 정했는데?”
“벌칙?”
“1화 보다가 먼저 소리 지르거나 포기하는 사람 벌칙.”
“Oh my god! 제일 중요한데!”
청이 큰일 날 뻔했다며 호들갑을 떨자 민성의 얼굴 위로 낭패 어린 기색이 스쳤다. 1위 공약을 정할 때보다 더 열정적인 멤버들 때문이었다.
“염병….”
나직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게임을 시작한다!”
그렇게 정해진 벌칙은 다음 주 음악방송 출근길 코스프레하기.
태블릿을 가져온 백야가 가운데로 내밀며 재생을 눌렀다.
* * *
- 복숭아에 진심인 쇼플리 (엔딩 볼 콕 백야.gif)
- 인기뮤직 페이스캠 마지막 볼 콕만 모아서 움짤 쪄왔는데 눈부셔서 실명할 뻔 (단체 볼 콕.gif)
- 웹드 하이틴 1화 조회 수 100만 돌파! 화력 도랏음
- 하이틴 왜 터졌는지 이 짤 하나로 설명 가능 (단체 볼 콕.gif)
- 데이즈 항마력 만렙 복숭아ㅋㅋㅋㅋ 멤버들 다 중도 하차했는데 백야 혼자 예고편까지 다 봤대 (웹드 보고 있는 백야 뒷모습.jpg)
- 하이틴 초동 73만 / 탑백 1위 / 실차 1, 2위
└ ★데이즈 붐은 왔다★
- 우리 애들 그냥 밀리언도 아니고 한 번에 더블 밀리언셀러 되는 거 아니야? 가슴이 웅장해진다
└ 2연속 앨범 팔아야 더블이고 200만은 그냥 200만 장...
- 이제 남돌 떡상 공식은 역시 교복인 건가... 에임, 소천, 데이즈 다 교복으로 대박 났네
└ 그래봤자 다음 곡 말아먹으면 끝 아님?
- 살짝 미소만 지었을 뿐인데 전국 급식이들 홀려버린 fox 클라스 (유연 보조개.gif)
- 데이즈 하이틴 아이돌판 전례 없는 떡상이다
- NAN으로 이미 반응 오던 상태 ▷ 희망콘에서 실수로 한 키 올려 부름 ▷ 알티 탐 ▷ 4단 고음 챌린지 붐 ▷ 역주행 ▷ 바로 컴백 ▷ 하이틴으로 홈런
- ID가 제일 잘하는 거 뭐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거
- 쇼플리 인하트 들어갔다가 백야 사진으로 도배돼있어서 깜놀;;
- 데이즈 붐으로 지금 제일 신난 사람 = 하이틴 터지기 전에 데이즈 섭외한 방송 프로그램 & 쇼플리 제작진ㅋㅋㅋㅋㅋㅋ
- 자칭 라이벌이라는 옆 동네 불쌍해서 어쩜ㅠ 사실 안 불쌍해
- ID 뚝딱즈 (율무 백야 투샷.gif)
└ 백야는 늘은 게 저거라 개 노답이고 율무는 왜 퇴화했냐?
지난주 음악방송 직캠을 보며 모니터링을 하던 율무가 댓글을 발견하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보컬에 더 무게를 두고 있지만 이래 보여도 춤으로 들어온 몸이었다.
그런데 이런 평가라니. 율무는 조금 속이 상했다.
게다가 첨부된 동영상 속 동작은 정말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었다.
“원래 안무가 이런 건데.”
신고를 눌러 소심한 복수를 한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방을 나섰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민성이 일어나 있는 듯했다.
“아침?”
“좋지~”
미리 율무의 그릇을 세팅해 둔 민성이 커다란 볼 위로 시리얼을 가득 부어 주었다.
“너 또 댓글 봤지.”
“와~ 우리 형 귀신이네.”
“웬만하면 보지 말라니까.”
“궁금하잖아~”
율무가 우유를 부으며 한 수저 크게 떠먹었다.
“어떤 거 봤는데.”
“그냥~ 나 춤 뚝딱거린다고.”
“네가 뚝딱이면. 나는 각목이냐.”
“으악! 와 씨, 깜짝이야….”
식탁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온 백야에 율무가 크게 놀랐다.
“뭐야, 왜 거기서 튀어나와? 설마 나 올 때까지 그러고 있던 거야? 당백~ 나 조금 감동이,”
“꿈이 야무지네. 숟가락 떨어뜨려서 주운 건데.”
백야의 시니컬한 반응에 민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부터 너 먹는 거 그대로 따라 할 거래.”
새 숟가락을 가져온 백야가 율무의 그릇을 보곤 흠칫거렸다.
자신의 그릇과 비교하듯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시리얼을 조금 더 부었다.
“무리하지 말지~”
“…그럴까 그럼.”
백야가 자신의 시리얼을 율무의 그릇 위로 덜어 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뭐지. 이 자연스러움은?”
“너 많이 먹으라고.”
백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밥그릇을 사수했다. 혹시 율무의 마음이 바뀌어 시리얼을 돌려줄지도 모르니까.
일종의 방어 자세였다.
그러나 상대는 개복치의 행동을 조금 오해한 것 같았다.
“안 뺏어 먹거든?”
뭐래…. 방금 내가 줬잖아.
백야가 황당한 얼굴로 율무를 바라봤다. 그러다 평소와 달리 처진 눈썹을 발견하고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야, 그리고 뭐 뚝딱이? 그런 말 하나도 신경 쓸 필요 없어.”
“갑자기?”
그 사람이 진정한 뚝딱이를 못 봐서 그런다며 백야가 대신 화내 주었다. 그러자 율무가 감동 받은 척 가슴 위로 손을 포개었다.
“우리 당백이가 날 이렇게 걱정해 주다니.”
“맞아. 네가 춤을 얼마나 잘 추는데.”
민성도 귀담아들을 말이 못 된다며 거들었다.
“근데 나 별로 상처 안 받았는데. 이것도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해.”
“글쎄. 비난이랑 비판은 다른 거야. 후자라면 네 말이 맞지만, 직업 특성상 우리는 비난이 더 많을 수밖에 없지. 걸러 들을 줄도 알아야 해.”
“형 말이 맞아. 너는 며칠 전에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그게 어딜 봐서 피가 되고 살이 되더냐며 백야가 열받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말없이 시리얼을 퍼먹기 시작했다.
“어우~ 맛있다. 그치, 형.”
“응. 많이 먹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딴짓을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내 말 들어. 그런 게 계속 쌓이다가 나중에 곪아서 터지는 거라고.”
멘탈이 좋은 것도 아니면서 그런 걸 본다며 못마땅해하자 율무가 가볍게 웃으며 변명했다.
“에이~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누구야. 누가 우리 당백이 화나게 했어.”
“너다, 이놈아!”
딱-!
백야가 숟가락으로 율무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정신 차려. 그런 악플 따위에 휘둘리지 말란 말이야!”
“아오… 아파. 이거 깡패 다 됐네.”
며칠 전 루머 관련 퀘스트와 정의 구현의 여파로 전투력이 200% 상승한 조폭 햄스터였다.
그 순간 또 상태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아악!
그만!
제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