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업데이트가 잘못됐는지 퀘스트가 폭주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1일 1퀘스트를 수행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백야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하며 경고창이 떠올랐다.
[경고!]
[스트레스 지수가 ‘경계’ 단계입니다. 61%]
[<병약미(S)> 패시브와 반응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킵니다.]
주륵-.
인중 위로 코피가 흘러내리더니 얼굴 또한 빠르게 창백해졌다. 원치 않은 패시브 두 개가 만나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아직 시한폭탄은 처리도 못 했는데…….’
갈수록 높아지는 게임 난이도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빈도가 전보다 잦아졌다.
“너… 코피!”
“괜찮아?!”
놀란 민성과 율무가 휴지를 뽑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상남자 백야는 손등으로 대충 훔칠 뿐이었다.
“괜찮아. 내가 그 뭐냐, 기린 혈압이 있어서 가끔 이래.”
“…기립성 저혈압 말하는 거니?”
“어 그거, 그거.”
성의 없는 변명에도 두 사람은 의심하지 않았다. 백야니까.
대충 둘러댄 개복치는 잠깐 누워야겠다며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괜찮다는 만류에도 부축해 주겠다는 두 사람은 백야를 소파까지 데려다주었다.
“너 스케줄 갈 수 있어?”
“코피 좀 흘린 게 뭔 대수라고.”
쿨내가 진동하는 대답에 율무와 민성은 할 말을 잃었다.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래. 갈 수 있으니까 시간 되면 깨워 줘.”
“그럼 방에 들어가서 자.”
“아니야. 여기가 편해.”
사실 스트레스 지수를 낮췄음에도 어지러움이 가시질 않아 방까지 걸어갈 기운이 없었다.
결국 시리얼은 한술도 뜨지 못한 백야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배꼽 위로 공손하게 모아진 손 때문에 꼭 시체를 눕혀 둔 것 같았다.
“그림이 좀 이상한데….”
민성이 난감한 듯 입술을 축였다.
“음~ 옷이 검은색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소파도 칙칙하고~”
잠시 거실을 둘러보던 율무는 화병에서 조화 장식을 꺼내 왔다.
“이제 좀 화사하지?”
백야의 가슴 위로 노란 해바라기가 놓였다.
“더 죽은 것 같은데….”
“그건 주위가 너무 허전해서 그래~ 기다려 봐.”
이번에는 백야의 침대에서 햄스터 인형을 가져온 율무가 소파 위로 친구들을 심어 주었다.
“자, 이러면 좀 낫지?”
“아까보다는….”
그러나 민성의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눈을 비비며 나오던 청이 죽어 있는 듯한 햄스터를 발견하고 자리에 굳어버렸다.
“What the….”
잠깐 숨 쉬는 법을 잊은 청이 빠르게 다가가 소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검지를 펴 백야의 코 아래로 가져다 댔다.
새액 새액-.
다행히 피부 위로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Shit. 죽은 줄 알았어.”
절을 하듯 바닥으로 엎드린 청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비슷한 타이밍에 방에서 나온 유연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굳어 버렸다.
엎드린 자세와 널브러진 인형, 그리고 해바라기 꽃. 마치 사이비 단체의 비밀스러운 의식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너 뭐 하냐?”
물어봐도 아무런 답이 없는 청에 유연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창백한 백야가 보였다.
“얘는 또 왜 이러고 있는…. 살아 있는 거 맞아?”
유연도 인중 위로 손가락을 대 보며 백야의 생사를 확인했다.
숨이 느껴지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유연도 청의 곁에 주저앉았다.
털썩-.
“와. 나 진짜 놀랐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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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E_Official]
병약 뱀파이어 그 잡채...(복숭아 이모티콘) photo by.율무
(멍때리는 백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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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나른한 평일 오후.
점심 식사를 마친 뱁쌔는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졸았다 깨기를 반복하다 양치를 하러 나온 참이었다.
강력한 민트 향에도 좀처럼 잠이 달아나지 않아 반쯤 감겨 있던 눈이었는데. 습관적으로 켠 SNS에서 백야의 사진을 보고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뱁쌔는 양치를 하다 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귀여워어헝헝.”
붉은색 액체가 든 테이크아웃 잔을 든 백야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당연히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이겠거니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이 사진은 실시간이었다.
“이거 너무 셔. 뭐야?”
“비트 주스?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율무가 백야의 손에 들린 잔을 가져가며 한 모금 마셨다.
“맛있는데?”
“으…. 너 다 먹어.”
창백한 게 피가 부족해 보인다며 청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데이즈는 <지구 방범대>라는 S사의 간판 예능 촬영을 위해 샵을 찾은 참이었다.
[Q. 예능 깡패(1) : 일어나세요, 용사여. 예능계를 당신의 발 앞에 무릎 꿇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숨겨 두었던 당신의 비기를 세상에 보여 줄 때가 왔어요.
- PD의 눈에 띄기
※ 실패 시 패시브 강화]
오늘 아침, 백야의 혈압을 오르게 한 원인이었다.
예능 관련 퀘스트가 뜰 때마다 피를 봤던 백야는 예능 울렁증이 다시 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름 양호한 편인 건가.’
백야는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중, 최근 예능 신예로 떠오르는 유망주들을 검색해 보았다.
조회 수가 높은 영상을 여러 개 재생해 봤는데, 백야가 봤을 때 이 사람들은 그냥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왜 예능 스킬은 없지.’
쿵-.
차창에 머리를 박은 백야가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짙은 선팅지 때문에 하늘이 우중충해 보이는 게 마치 제 마음 같았다.
잠시 후 촬영장에 도착한 데이즈는 곧바로 오프닝 촬영을 준비했다.
<지구 방범대>는 게스트와 멤버들이 미션과 추리를 통해 숨어 있는 도둑을 잡는 종합 예능으로,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프로그램이었다.
하이틴 컨셉으로 돌아온 데이즈를 위해 제작진이 섭외한 장소는 경기도의 한 중학교.
원래라면 운동장에서 오프닝을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폭염 주의보로 인해 체육관으로 이동한 참이었다.
“아~ 옛날 생각난다. 내가 등교만 해도 학교가 정말 난리가 났었는데.”
프로그램의 간판 MC 현호가 옛 추억에 잠긴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짝꿍 정우가 찬물을 끼얹었다.
“왜요?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학교 안 나오던 애가 갑자기 나오니까 친구들이 놀란 거지.”
“그게 아니지. 아~ 진짜. 얘는 꼭 이렇게 초를 치더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가장 연장자인 민식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나 때는 말이야~”
펑-!
그때였다.
체육관 단상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누군가가 등장했다.
“어? 저기!”
“저게 뭐야?”
“누구야?”
MC들이 단상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곧이어 무대를 덮은 연기가 걷히자 유니폼을 입은 데이즈가 등장했다.
♪♩♬♪♬♪♩
반주가 시작되며 민성이 걸어 나왔다.
- 나 궁금했어 All day
내 첫 키스의 상대 말이야
데이즈의 하이틴 무대가 이어지며 본격적인 오프닝 촬영이 시작됐다.
무대 장치라곤 천장의 조명이 전부였음에도 멤버들의 무대는 빛이 났다.
- 넌 나의 Highteen
곡의 마지막 파트인 유연의 볼 콕을 지나 멤버들이 엔딩 포즈를 취했다. 멋진 무대를 보여 준 데이즈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무대 아래로 내려온 멤버들은 대형의 가운데에 서며 팀 구호를 외쳤다.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이야~ 데이즈! 반갑습니다!”
다시 한번 박수가 이어졌다.
더운 실내에 멤버들이 땀을 훔치자, 천천히 하라며 물과 휴지를 건네는 배려가 이어졌다.
지한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빤히 보던 현호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잘생겼다….”
“푸흡.”
“아 좀! 사람 부담스럽게 왜 그러는 거예요, 정말.”
“아, 지한 씨. 죄송합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현호의 사과에도 그를 향한 비난이 이어졌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개인적으로 무쌍이신 분들을 좋아해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휴지를 받아 든 지한이 쪼그려 앉아 바닥을 먼저 닦았다. 그러자 입을 닦으라고 드린 건데 왜 청소를 하고 계시냐며 MC가 의아해했다.
“더러워서….”
그러자 정우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더럽다니요!”
자신은 지한 씨가 뱉는 물로 샤워도 할 수 있다며 무리수를 던지자, 옆에 있던 또 다른 MC가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내리쳤다.
“1절만 해, 1절만.”
부담스러워하시지 않냐며 대신해서 사과하자 지한이 당황해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방금 지한 씨 뒤로 슬쩍 멀어지는 거 봤어?”
“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데이즈와 안면이 있는 영삼이 장난을 걸어오자 고양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희 지한이가 부끄러움이 많아요~”
율무가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지한을 구해 주었다.
데이즈가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판단한 현호는 자연스레 오프닝을 재개했다.
“요즘 이분들 모르면 정말 간첩입니다. 방금 보여 주신 무대가 하이틴 맞나요?”
“네, 맞습니다.”
“크으~ 지금 이 친구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이 볼 콕.”
현호가 안무를 설명하며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지구 방범대 멤버들이 못 볼 꼴을 봤다며 야유를 퍼부었다.
“아니, 비슷한 처지끼리 정말 이러실 거예요? 진행을 못 하겠네.”
“귀한 게스트 불러 놓고 왜 예시를 본인이 들어요. 백야야, 볼 콕 한 번만 해 줘.”
영삼이 멤버들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며 친근함을 과시했다.
제 발로 굴러온 절호의 찬스에 백야가 정면의 메인 카메라를 바라봤다.
톡톡-.
볼 콕을 한 백야가 눈웃음을 지으며 방긋 웃기까지 하자, 제작진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것 봐. 반응부터가 다르잖아. 근데 백야 이제는 막 안 부끄러워하네? 전에는 부끄러워서 귀 빨개지고 그랬잖아.”
“아…. 연습했어요.”
애교와 별개로 시선이 집중되는 게 여전히 부끄러운지 백야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성 MC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집에서 연습했대.”
“저 오늘 너무 행복해요. 그런데 한 번만 더 해주시면 안 돼요? 멀어서 잘 못 봤어요~”
그 말에 백야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보며 볼을 두드렸다.
톡톡-.
PD의 눈에 띄기 위한 개복치의 눈물겨운 몸부림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