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아니야. 얘랑 싸워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백야는 <예능 깡패(1)> 퀘스트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숙소로 돌아가서 살펴봐도 충분했다.
“녹화 다시 갈게요~”
백야가 잡생각을 떨쳐 냈다.
첫 번째 미션을 통과한 데이즈는 2층으로 이동하는 장면부터 촬영했다.
“2학년 4반 저기다!”
팻말을 가리킨 청이 달려가 앞문을 열어젖혔다.
“뚜둥!”
제일 먼저 교탁 위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모냐.”
교탁 주위로 모인 멤버들이 물건을 확인했다. 컵라면, 빵, 샌드위치 등.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간편식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 차례 미션을 경험한 멤버들은 미션이 급훈과 관련이 있음을 눈치채고 칠판부터 살폈다.
[아침밥 먹고 오세요.]
이번에도 심상치 않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한이 음식을 가리키며 ‘이걸 먹는 게 미션인 것 같다’고 하자 율무가 손을 들며 능청을 부렸다.
“아침 안 먹은 사람~ 저요~”
백야의 것까지 두 그릇이나 먹어 놓고 거짓말하자 민성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야. 너 나랑 같이 먹었잖아.”
“그건 밥 아니고 시리얼이잖아~”
“아침에 먹는 건 다 아침밥이지.”
“아니야, 달라.”
때아닌 아침밥 논쟁이 이어졌다.
잠시 후, 제작진의 간단한 게임 설명이 이어졌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필기하는 동안 몰래 도시락을 드시면 되는 게임이고요. 70dB을 넘거나 선생님께 걸리면 벌칙이 주어집니다.”
벌칙 수행 후에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미션을 이어서 진행할 수 있으며, 전원이 미션을 통과해야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컵라면은 어떻게 먹어요? 조리가 안 된 건데?”
유연이 컵라면을 흔들자 부스러기가 용기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 전기 포트와 전자레인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컵라면과 만두는 직접 조리해서 드셔야 하고요. 마찬가지로 선생님 몰래 하셔야 됩니다.”
라면과 냉동 만두는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음식으로 분류됐다.
잠시 후. 사다리 타기로 정한 멤버들의 메뉴가 공개됐다.
[민성 : 냉동 만두
율무 : 샌드위치, 우유
지한 : 계란, 사이다
유연 : 삼각김밥
백야 : 컵라면, 우유
청 : 핫바, 콜라]
“컵라면이라니…. 내가 컵라면이라니!”
“그걸 꼭 그렇게 말해야 하니?”
고자라니도 아니고. 컵라면 하나 걸린 것 가지고 그렇게 절망하기 있냐며 민성이 어이없어했다.
“심지어 매운 라면….”
“내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구나?”
민성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옆에서 뭐라고 떠들든 말든, 붉은색 라면만 노려보던 개복치는 제작진을 향해 조심스레 질문했다.
“혹시 국물까지 다 마셔야 해요?”
“아니요. 국물은 남기셔도 됩니다.”
“휴.”
자비로운 답변에 개복치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던 그때,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청이 백야에게 접근했다.
“매찌리. 바꿔 줄까?”
“…진짜?”
핫바와 탄산음료를 쥔 청이 흔쾌히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커다란 속셈을 품고 있었으니….
“대신 막내도 바꿔!”
네놈이 그럼 그렇지.
손을 까딱이며 청에게 가까이 와 보라 한 백야가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꺼져.”
“……!”
조폭 햄스터의 협박에 청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친구들을 구경하던 유연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눈치를 주었다.
“뭐해? 얼른 앉아.”
“난 라면 끓여야 해서 뒤로 갈래. 귀여운 막내가 앉아.”
백야가 일부러 막내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넋이 나간 청은 멀어지는 백야와 핫바를 번갈아 보며 여전히 경악에 찬 표정이었다.
“왜 그래? 앉아.”
“유연…. 저거 진짜 조폭이다.”
“이제 알았냐.”
청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 백야는 전기 포트와 가까운 자리를 골랐다. 짝꿍은 지한이었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들어오시자 본격적인 미션이 시작됐다. 1층에서 떡을 썰던 한문 선생님은 이번엔 문학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자, 수업 시작한다.”
남자가 칠판에 시를 적기 시작하자 멤버들도 하나둘씩 움직였다.
먼저 책을 펼쳐 세로로 세운 백야는 컵라면 포장을 벗겨 내는 것부터 시도했다.
한쪽으로 몰려 있는 분말수프를 세게 털고 싶었으나, 소리 때문에 생략한 백야는 머뭇거리다 포장지를 찢었다.
“으에취!”
그러자 절취선 쪽에 뭉쳐 있던 가루가 흩날리며 재채기가 터졌다.
“누구야.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자 사부작거리던 멤버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저, 저요….”
“백야 앞으로 나와.”
벌칙 스타트를 끊게 된 백야가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하나를 뽑거라.”
벌칙 상자에서 종이를 뽑은 백야가 멤버들 앞에서 큰소리로 읽었다.
“짝꿍 안고 앉았다 일어나기 3회…. 이게 뭐예요?”
백야가 지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자 선생님이 대신 설명해 주었다.
“너 짝꿍이 누구야. 지한이?”
소란스러운 틈을 타 계란을 깨 보려던 지한이 흠칫거렸다.
“지한이 앞으로 나와.”
“저요?”
“그래. 빨리 나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지한이 앞으로 나오자 교탁이 잠시 치워졌다.
“네가 지한이를 들고 앉았다 일어났다 세 번 하면 되는 거야.”
“세 번이요?!”
백야가 지한을 훑어보며 무게를 가늠했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반면 아침에 백야가 코피 쏟는 걸 목격한 민성과 율무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 네. 한번 해 볼게요.”
“그런데 이거 백도보다 지한이 형한테 더 벌칙 아니야?”
유연의 말대로 졸지에 멤버에게 공주님 안기를 당하게 된 지한은 봉변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아! 지한 컴백한다고 다이어트했어!”
청이 응원 아닌 응원을 해 주었다.
“후우.”
지한의 뒤로 다가선 백야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한 손으로 허리를 감았다.
그를 도와주려는 듯 지한이 한쪽 다리를 들자, 백야가 팔을 깊이 넣어 무릎 뒤를 안아 들었다.
“뜨읍!”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에 백야가 잠깐 휘청거렸다.
“어어…!”
“아니야! 됐어! 오지 마.”
율무가 두 사람을 받아주기 위해 다가오려 하자, 백야가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떨어지지 않게 목 뒤로 팔을 두른 지한은 힘이 빠지기 전에 얼른 하라며 재촉했다.
“푸흐흐.”
많이 힘든지 실성한 것처럼 웃는 백야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도 잠시. 그 모습이 우스운지 지켜보던 멤버들도 금세 즐거워했다.
“한다.”
백야가 무릎을 굽혔다 일어났다.
하나!
멤버들이 대신 카운트를 해 주었다.
두울!
이를 악문 백야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세엣!
허벅지를 파들거리며 올라온 백야가 손을 풀자 지한이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끕.”
“둘 다 자리로 돌아가. 수업 시간에 떠드는 거 아니야. 알겠지?”
“네에….”
미션 시작 1분 만에 체력을 모두 소진한 백야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자리로 돌아갔다.
한편 냉동 만두를 돌려야 하는 민성과 핫바에 당첨된 청은 전자레인지 사용 순서를 두고 눈치 게임이 한창이었다.
“민성아, 나 30초면 된다.”
“난 이거 뜨겁잖아. 식혀서 먹어야 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속닥거림이 이어졌다. 그때 율무가 손을 들며 미션 완료를 외쳤다.
“선생님 저요~”
난이도 상을 고른 멤버들이 고전하는 동안, 샌드위치를 한입에 넣은 율무는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성공을 외쳤다.
“벌써 다 먹었다고?”
“넹~”
율무가 씩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엄지를 들었다.
확인 결과 우유까지 모두 마신 그는 1등으로 성공 판정을 받았다.
미션에서 자유로워진 율무는 몸을 틀어 앉으며 다른 멤버들의 미션을 관람했다.
“자, 집중.”
선생님이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가 전기 포트 앞으로 달려가 물을 콸콸 쏟아붓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처음 보는 날렵한 동작에 율무가 책상을 두드리며 웃어 댔다.
“당백이 순간 이동 하는 줄 알았네~ 쥣과라 그런가? 역시 날쌔~”
읏즈므.
백야가 입 모양을 벙긋거리며 경고했다. 눈을 부릅뜨며 나름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그 순간, 이때다 싶었던 민성이 전자레인지를 노리며 엉덩이를 뗐다.
“선생님 저요!”
그러나 눈치 없는 유연 때문에 다시 앉아야만 했다.
커다란 삼각김밥을 단 세 입 만에 끝내 버린 그는 휘파람까지 불며 여유로움을 어필했다.
“유연이도 통과.”
“앗싸.”
이제 남은 멤버는 4명.
탁-!
마침 전기 포트 물이 끓으며 스위치가 오프 되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70dB를 넘기며 사이렌이 울렸다.
“또 누구야.”
백야가 고개를 도리질하며 자신은 아니라고 팔을 엑스 자로 교차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전기 포트에 물 누가 올렸어.”
“저요….”
“앞으로 나와.”
백야가 울상을 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이번에도 종이를 뽑은 백야는 벌칙을 소리 내어 읽었다.
“얼굴에 스티커 붙이기. 오!”
백야는 양 볼 위로 커다란 하트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왔다.
다시 수업을 시작하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백야가 재빨리 전기 포트를 가져왔다. 물을 부은 그는 이제 면이 익기만을 기다리면 됐다.
“…근데 너는 왜 안 해?”
“이게 안 깨져.”
10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처음 모습 그대로인 계란에 백야가 답답해했다.
“책상에 내려쳐야지. 손톱으로 그걸 언제 뚫어?”
“벌칙 받기 싫어.”
“줘 봐. 내가 해 줄게.”
대신해 준다는 말에 지한이 순순히 계란을 내밀었다.
그러나 계란 대신 지한의 손을 잡은 백야는 그대로 책상 위로 내려쳤다.
퍽-!
“또 누구야! 수업 좀 하자.”
계란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사이렌이 울렸다.
지한이 놀란 얼굴로 백야를 바라봤다. 입술은 닫혀 있었지만 분명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지한이요!”
백야는 뻔뻔하게 지한의 이름을 말했다.
“지한이 앞으로 나와.”
“너…!”
“괜찮아, 괜찮아. 대신 내가 껍질 까 줄게. 벌칙 받고 오면 너 이거 먹을 수 있어.”
이게 다 팀을 위한 거라며 멤버들을 방패 삼자 지한은 더 착잡해졌다. 자신이 백야에게 속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한 눈치였다.
덕분에 재미있는 장면을 건지게 된 PD는 흡족한 얼굴로 백야를 바라봤다.
“윙크 10번 하기….”
“푸하하! 쟤는 맨날 저런 거 걸리더라~”
지한의 애교 벌칙에 율무가 제일 즐거워했다.
짝꿍이 벌칙을 수행하는 동안 약속대로 껍질을 까 놓은 백야는 이어서 자신의 컵라면을 도전하기로 했다.
선생님이 지한의 애교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뚜껑을 뜯어낸 백야는 젓가락으로 면을 대충 휘저었다.
호오-.
그리곤 한 젓가락 크게 떠 입 안에 넣는데 생각보다 너무 뜨거웠다.
“앗 뜨.”
백야의 라면 먹뱉짤 탄생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