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 * *
두 번째 미션도 무사히 통과한 백야는 3학년 교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걸을 때마다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청의 백금발이 눈에 띄었다.
나름 예쁘게 묶인 머리는 유연의 작품으로, 전자레인지 타이머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받은 ‘사과 머리’ 벌칙이었다.
“너 이따가 사진 찍어. 팬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
“조폭 햄스터.”
눈을 게슴츠레 뜬 청이 새침하게 돌아봤다. 아까 전 귓속말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네가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니까 그러지.”
백야는 숙소로 이사 오던 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지 않았냐고 말했다.
“인생은 삼세판!”
“인생이 어떻게 삼세판이야. 그럼 저번에 졌으니까 지금 네 인생은 2회차냐?”
“당근 하지!”
이런 뻔뻔한 놈을 봤나.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나름 2회차를 살고 있지 않던가.
‘이놈 혹시…….’
가늘어진 눈이 청을 살폈다. 그때 유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3학년 2반 저기 있네.”
“레고 레고~”
유연의 어깨를 두드린 율무가 3학년 교실로 향했다. 교실 앞문에는 ‘절대 정숙’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쉿!”
입술 위로 검지를 갖다 댄 유연이 멤버들을 조용히 시켰다.
멤버들과 시선을 주고받은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앞문을 열었다. 그러자 먼저 도착해 있던 지구 방범대 팀이 반겨 주었다.
“어? 왔다!”
“우리랑 비슷하게 왔네? 역시. 저 팀도 만만치 않아~”
데이즈가 허리를 꾸벅이며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양 팀이 모두 도착하자 제작진도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하겠다며 룰을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음소거의 방입니다. 지금부터는 오직 정답자만 말을 할 수 있고요. 여러분은 게임 진행 여부와 상관없이 소리를 내면 탈락입니다.”
“저희보고 말을 하지 말라고요?”
현호가 그래도 되는 거냐며 진심으로 물었다.
“네.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오디오가 비는데?”
“괜찮습니다.”
예능만 30년을 해 봤지만 이런 게임은 처음이라며 현호가 황당해했다.
“어쨌든 게임 룰이 그렇다면 따라야죠. 저는 지금부터 말하지 않겠습니다.”
“네. 마지막 3학년 미션은 데이즈 대 지구 방범대 팀의 대결로, 종목은 ‘인간 복사기’ 게임입니다.”
제작진이 단어를 알려 주면 오직 몸짓으로만 표현을 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첫 번째 도전자가 단어를 확인하고 두 번째 도전자에게 설명. 두 번째 도전자는 세 번째 도전자에게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마지막 정답자는 소리를 낼 수 있으며, 중간에 소리를 내면 해당 문제는 자동으로 넘어간다.
“이해되셨나요?”
데이즈와 방범대 멤버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그럼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지구 방범대 팀이 먼저 도착하셨으니까 순서를 고르실 기회를 드릴게요.”
그 말에 방범대 멤버들은 고민할 것도 없이 데이즈를 가리켰다.
[동생들한테 먼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저희는 게스트 우선이니까요.]
작가의 스케치북을 강탈해 온 현호는 투 머치 토커답게 목소리 대신 글자를 적어 들었다.
말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저런 식으로 대화를 시도할 줄이야.
희귀한 광경에 데이즈가 웃음을 참으며 앞으로 나왔다.
“정답자 한 분은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만장일치로 율무가 선택됐다.
“오케이~ 순서는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냥 아무렇게나 서~ 내가 다 맞출게.”
율무의 말에 데이즈는 대충 서 있는 위치에서 줄만 나란히 맞췄다.
“준비되셨나요?”
“네에~”
멤버들을 확인한 율무가 뒤돌아서며 대표로 대답했다.
“그럼 문제 드리겠습니다.”
카운트 시작과 함께 정우가 들고 있던 스케치북의 표지를 뒷장으로 넘겼다.
[병따개]
첫 번째 주자는 유연이었다.
단어를 확인한 그는 뒤돌아 민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가락을 펴 세 글자라는 걸 알려 준 그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입술을 오므렸다 뗐다.
음마.
이해가 되질 않는지 민성이 난감해했다.
그러나 유연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손으로 병 모양을 그려 뚜껑을 따는 시늉을 했다.
아!
민성이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돌아선 그가 청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펴 세 글자임을 어필한 민성은 제일 먼저 음료병을 표현했다.
그리곤 뚜껑을 따는 척 손목을 꺾으며 소리가 나지 않게 입 모양을 만들었다.
음마.
청도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뒤돌았다.
톡톡, 등을 두드리자 말간 얼굴의 개복치가 돌아봤다.
음마.
‘아! 뽀뽀?’
개복치는 시작부터 헛다리를 짚었다.
백야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자 청이 다급히 도리질 쳤다.
뒤늦게 손가락을 세 개만 펼쳐보았으나 백야는 알아듣지 못했다.
갸웃.
난감한 듯 아랫입술을 할짝댄 청은 손으로 음료병 모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단어를 눈치챈 백야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청도 밝은 표정으로 안심했다.
[잘하는데?]
[그러게요. 우리가 먼저 할 걸 그랬나.]
순조롭게 게임을 이어 가는 데이즈에 현호와 정우가 스케치북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비슷한 타이밍에 뒤돌아선 백야는 지한의 등을 두드렸다.
손가락을 펼치며 세 글자라는 걸 먼저 알려 준 개복치. 이제 입 모양을 보여 줄 차례였다.
“뽁.”
그 순간 교실에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병따개?”
뒤돌아 있던 율무가 지한을 건너뛰고 정답을 외쳤다. 그 순간 현장은 웃음소리로 초토화됐다.
[<예능 깡패(1)> 완료!]
[<연예인의 연예인(6)> 완료!]
* * *
데이즈 숙소.
어설픈 매력으로 <지구 방범대> 제작진과 MC들을 홀려 놓은 개복치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스트레스 지수를 0으로 낮췄음에도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는 게 아무래도 망할 패시브 때문인 것 같았다.
‘아 맞다. <병약미(S)>.’
힘겹게 일어난 개복치가 상태창을 불러냈다.
[조건 충족 시 패시브 <병약미(S)>를 해제할 수 있습니다.
- 단군신화! 100일 식단
- 헬린이의 역습
- 숨겨왔던 나의 복근♡]
자세히 살펴보니 관련 퀘스트를 모두 완료해야 패시브를 해제할 수 있는 구조 같았다.
요구하는 조건은 다섯 개. 엄청난 장기 프로젝트가 예상됐다.
‘그래서 저 퀘스트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데….’
퀘스트가 떠야 도전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팔자에도 없는 복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개복치가 가혹한 운명에 낑낑거리는데 마침 편한 복장의 유연이 거실로 나왔다.
“어디 가?”
“PT. 넌 연습실 안 가?”
“회사 정전됐대. 남경이 형이 일단 숙소에 있으라던데.”
오전 연습 스케줄은 사실상 취소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후 스케줄 시간에 맞춰 픽업을 가겠다는 말에 연습실 조는 뜻밖의 자유 시간을 얻게 됐다.
백야가 거실에서 상태창을 보며 뒹굴거리는 것처럼 다른 멤버들은 방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넌 왜 지금 가? 율무차는 아까 갔는데.”
“형이랑 쌤이 같으니까. 나는 형 다음 타임.”
“너희는 정말… 부지런하네.”
“운동 안 하면 더 피곤해.”
부엌으로 간 유연이 텀블러를 챙겼다.
“심심하냐?”
“조금.”
“그럼 나랑 같이 운동 가든가. 거기 1층에 카페 있는데 바나나 셰이크 진짜 맛있어.”
유연이 개복치 낚시를 시도했다.
“나 바나나 안 좋아하는데.”
“다른 맛도 많아. 사 줄게.”
개복치가 솔깃해했다.
그렇지 않아도 <병약미(S)> 패시브 때문에 관련 퀘스트를 수행해야 했는데. 못 이기는 척 헬스장에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운이 좋으면 관련 퀘스트가 뜰지도 몰랐다.
“…그럼 한번 가 볼까?”
그렇게 멤버를 따라온 헬스장에서 개복치는 상태창을 마주했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Q. 헬린이의 역습 : 저런….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로 하찮은 몸을 갖고 계시는군요? ( ˃̣̣̥‸˂̣̣̥)
아이돌에게 체력은 필수! 꾸준한 운동을 통해 사람다운 몸을 만들어 봅시다.
- 근육량 5kg 증가
※ 실패 시 패시브 강화]
다만 조금 화가 날 뿐이었다.
시스템에게 팩트 폭력을 당한 백야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안착했다.
“계단 좀 내려왔다고 벌써 힘드냐? 너 도대체 무대는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난 지금 마음이 아픈 거라고….”
카페로 안 가고 곧장 헬스장으로 데려왔다고 그러는 거냐며 유연이 오해했다.
“셰이크는 운동 끝나고 사 줄게.”
“안 먹어도 돼.”
“삐졌냐?”
유연이 백야를 일으켜 세워 율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형.”
“유연이~ 왔, 어? 어어!?”
백야를 발견한 율무가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격하게 반응했다.
“뭐지? 네가 왜 여기 있지?”
“나는 뭐. 여기 오면 안 돼?”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이게 진짜. 내 앞에서 그런 말 금지라고 했지.”
백야가 율무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죽 그어 내렸다.
“으악.”
“그럴 줄 알았다.”
유연이 율무를 보며 혀를 찼다.
트레이너에게 백야를 소개해 준 유연은 PT를 받으러 떠나고, 개복치는 자연스레 율무가 맡게 되었다.
“근데 진짜 여기는 왜 온 거야?”
“쟤가 셰이크 사 준다 그래서.”
“역시.”
백야를 보는 율무의 눈에 측은함이 어렸다.
“역시? 그거 무슨 의미야. 눈빛이 좀 기분 나쁜데.”
“에이~ 기분 탓이야.”
“크흠. 아무튼, 나도 방금 거는 농담이고 이참에 체력 관리나 해 볼까 하고.”
개복치는 의외로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근육을 5kg 증가시킬 거라는 말에 율무가 감탄했다.
“오~ 운동 제대로 하려나 보네?”
“…제대로?”
이게 운동을 ‘제대로’씩이나 해야 하는 수치였나.
사실 5kg 라길래 만만하게 봤는데, 율무의 말에 개복치는 조금 두려워졌다.
“그냥 가끔 너네 따라서 한두 번 와 볼까 했는데….”
사실 퀘스트만 완료하면 헬스장 따위는 거들떠볼 생각도 안 할 예정이었다.
“그게 어디야. 안 그래도 남경이 형이 너 운동 좀 시켜야겠다고 벼르고 있던데. 이참에 복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복근?”
패시브 해제 조건 중에 복근 어쩌고 하는 퀘스트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어쨌든 복근을 만들긴 해야 하는 처지라 나쁘지만은 않은 제안이었다.
“뭐… 나야 만들면 좋지.”
개복치가 미끼를 물었다.
예상외로 긍정적인 반응에 신이 난 율무는 손을 치켜들었다. 자신의 담당 트레이너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형! 얘 등록한대!”
“뭐? 야, 아니야. 잠깐만! 그건 아닌…!”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