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 * *
[뮤직스테이 출근길에 등장한 시계 토끼, 데이즈 민성]
다시 돌아온 일주일.
율무의 말장난에 넘어간 개복치는 생각보다 더 본격적인 운동을 하게 되었다.
“나 근육이 찢어진 것 같아….”
“그래? 어디 한 번.”
“끄악!”
개복치의 엄살을 받아 주는 척하던 율무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꾹 눌렀다. 그러자 백야가 비명을 지르며 율무의 손을 쳐냈다.
“죽고 싶냐!”
“에이~ 잘만 움직이네, 뭘. 안 찢어졌어.”
“저런 것도 친구라고….”
이곳은 음악방송 대기실.
장난을 치며 차례를 기다리는 백야에게 덕진이 말을 걸어왔다.
“백야 님. 요즘 운동 열심히 하신다면서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솜 주먹으로 허벅지를 통통 두드리는 모양새가 안쓰러워 보였다.
“알 배셨나 봐요.”
“네! 저놈들 때문에요.”
개복치가 율무와 유연을 노려봤다.
“건강해지고 좋지~ 너의 수명이 일주일 연장됐어. 그치 유연아?”
“어. 트레이너 형도 그랬잖아. 너 그 몸으로 스케줄 소화하는 게 신기하다고.”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런가 성한 곳이 없었다.
걷기만 해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대는데, 안무 연습에 스케줄까지 뛰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냥 둘걸…….’
괜히 패시브를 해제해 보겠다고 설쳤다가 오히려 명을 재촉한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콘서트 생각해서 미리 체력 관리하는 것도 나쁘진 않죠.”
“콘서트요?”
성난 콧바람을 뿜어내던 백야가 덕진을 돌아봤다.
“네. 이번 앨범 성적도 좋고, 곧 3년 차니까 회사에서도 슬슬 계획하고 계실 것 같아서요.”
콘서트라는 말에 멤버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나 덕진의 말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괜한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얘들아. 가자.”
마침 대기실 문을 열며 남경이 나타났다. FD와 함께 돌아온 그는 데이즈의 무대가 임박해졌음을 알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는 시한폭탄의 남은 시간도 확인했다.
[Q. 아이돌 하려고 태어남(1) : 1일 8시간 34분 남음]
돌발 상황 퀘스트는 종료 시간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엿을 먹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백야는 마음이 불안했다.
“긴장하지 말고 연습하던 대로만 하고 내려오자. 할 수 있지?”
무대에 오르기 전, 여느 때처럼 손을 내민 민성은 멤버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었다.
“당근히 할 수 있지!”
기합이 잔뜩 들어간 청의 대답에 힘찬 팀 구호가 이어졌다.
컴백 2주 차.
1위 후보에 오른 데이즈는 공약으로 ‘파트 바꿔 부르기’를 내걸었다.
특히 이번 주는 초동 성적이 반영되는 주라 1위는 데이즈가 유력한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멤버들은 기쁜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뮤직스테이 K-차트 10위부터 3위까지 순위입니다.”
“계속 듣고 싶은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인공. 해바라기가 이번 주 10위~”
이번 주 차트 순위를 소개하는 MC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사이 대형을 갖춘 데이즈는 침착하게 생방송 사인을 기다렸다.
“뮤직스테이 K-차트.”
순위 소개가 끝나자 큐사인과 함께 MR이 흘러나왔다.
오늘의 무대 의상은 빨간색 교복. 화려한 목걸이와 장신구가 돋보이는 옷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명씩 앞뒤로 선 데이즈는 첫 박자에 대형을 넓히며 안무를 시작했다.
멤버들은 반주가 이어지는 동안 여유롭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 나 궁금했어 All day
내 첫 키스의 상대 말이야
노래가 시작되자 무대 정면을 비추던 카메라는 민성을 부드럽게 클로즈업했다.
첫 소절을 시작한 민성은 준비한 제스처를 하며 느긋이 파트를 소화했다. 함께 카메라에 잡힌 유연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반면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시작과 동시에 불행해진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백야였다.
안무가 시작되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진 청의 브로치 때문이었다.
‘저건가. 저게 나의 시련인가.’
아직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유일해 보였다.
장식의 크기도 제법 커 멤버들이 밟기라도 하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선 안 될 것 같은데.’
브로치가 떨어진 위치는 무대 중앙. 백야가 가운데로 이동하는 타이밍은 후렴이 시작되는 구간이었다.
‘망했어. 망했다고!’
아슬아슬하게 브로치를 비켜 가며 스텝을 밟는 멤버들 때문에 백야의 심장만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이쯤 되니 퀘스트보다 멤버들의 안위가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걸 빨리 치워야 하는데.’
후렴 파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백야의 동선은 줄곧 뒤쪽에 머물러 있었다. 덕분에 브로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주시할 순 있었지만, 애가 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청과 지한의 랩 파트를 지나 드디어 백야의 차례가 다가왔다.
드디어 중앙 진출을 할 수 있게 된 백야는 평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센터로 걸어갔다.
- 나의 시간을 함께 걸어 줘
My Highteen
불이 들어온 카메라를 정확히 찾아낸 백야가 손 키스 안무를 선보였다.
후렴구가 끝나기 무섭게 사이드로 빠진 백야는 날렵한 동작으로 브로치를 무대 밖으로 걷어 냈다.
‘그런데 왜 완료가 안 뜨지?’
시스템이 제 사정을 배려해서 상태창을 띄워 주지 않을 리는 없었다. 이건 조금 전의 브로치가 돌발 상황이 아니었거나, 아직 다른 게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브로치 하나 걷어 내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쏠려 무대에 집중하기가 어려운데. 이것보다 더한 게 터진다면 방송 사고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꼭 제가 방송 사고를 치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 너의 볼에 입 맞춰
My Highteen
그 사이 율무의 파트를 지나 다시 민성의 후렴구가 돌아왔다.
<갓끼(S)>로 버티고는 있지만, 데뷔한 지 겨우 1년을 넘긴 신인에게 이 이상은 돌발 상황은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그때, 두 번째 이벤트가 발생했다.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백야가 반 바퀴를 돌며 동선을 이동하는데 허리춤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이크 팩이 빠진 것이다.
‘아악!’
백야는 정말 소리 지르고 싶었다.
다행히 고급 스킬로 미소만큼은 유지한 백야가 빠르게 마이크 팩을 잡아챘다.
‘제발.’
안무를 하면서 다시 꽂아 보려 했지만 한 손으로 하기엔 쉽지 않았다.
파트도 어느새 자신의 차례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다시 꽂기를 포기한 백야는 대충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무 일도 없던 척, 사이드로 이동해 율무의 고음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원한 애드리브를 내질렀다.
- My Heart
백야를 클로즈업하던 카메라가 부드럽게 줌 아웃되며 무대 전체를 담아냈다.
경쾌하게 울리는 하이라이트에 맞춰 멤버들이 손 키스 안무를 잔망스럽게 소화했다.
그사이 센터로 돌아온 유연은 정면 카메라를 보며 화제의 파트를 불렀다.
- 넌 나의 Highteen
유연의 볼 콕 엔딩과 함께 3분 동안 이어진 개복치의 외로운 싸움도 막을 내렸다.
[<아이돌 하려고 태어났구나?(1)> 완료!]
흩날리는 꽃가루를 맞으며 숨을 헐떡이던 백야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퀘스트라고.
‘망겜 망해라!’
* * *
- 오늘 뮤직스테이 방송사고 날 뻔한 거 백야가 하드캐리 함 (동영상)
- 아기 복숭아가 무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법 프로 그 자체
- 청 슬랜더 몸매에 치임... 이게 어딜 봐서 교복이야 (대기실 셔츠 사진.jpg)
- 나 생방으로 봤는데 전혀 몰랐어
- 백야 안무하는 척 브로치 걷어내는 거 센스 미쳤네... 얘 아이돌 2회차가 확실함
- 지금 제일 신난 거 ID랑 기자들ㅋㅋㅋㅋㅋ 기사 제목 댕웃김 (타래로)
└ 데이즈 백야, 1위다운 침착한 대처로 방송사고 막았다
└ ‘뮤스’ 데이즈 백야, 돌발 사고에도 침착한 MZ 세대 역시 ‘하이틴’
- 1위 공약으로 파트 바꿔 부른 거 레전드ㅋㅋㅋㅋ 염불 래핑 하는 토끼 너무 소중해♥ (동영상)
└ 염불ㅋㅋㅋ 절 오빠 신앙심으로 무대를 찢어버리셨다
└ 민성이 가사 다 틀려ㅋㅋㅋㅋ
└ 토끼 교회 다니지 않아?
└ 얘 민성교야
└ 무교인 애들 특 : 자기 자신을 믿는다 함ㅋㅋㅋㅋㅋㅋㅋ
- 율무는 왜 랩 잘해..?
- 지한이 하필 백야 걸려서 고음 애드립 내 웃음벨ㅋㅋㅋ 열심히 해서 더 웃겨 (동영상)
└ 목에 핏대 선 거 봐ㅋㅋㅋㅋㅋ
└ 청이도 하필 율무 파트 걸려서 둘이 하이라이트에 불협화음 작렬ㅋㅋㅋㅋ
└ 유연이 옆에서 우는데요ㅋㅋㅋ
- 래퍼 라인 고음에 진심이더라...
- 율무 동굴 저음에 치였습니다 (오열 짤.jpg)
- 직캠 보면 유연이도 브로치 발견하고 걷어내려 했는데 지한이가 차는 바람에 못 치운 듯 (무대 유연.gif)
퇴근 후 SNS에 접속한 뱁쌔는 비명을 삼켰다.
회사에 얽매인 몸이 속세와 단절당한 사이, 그녀의 최애가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이다.
그뿐인가. 메인을 장식한 데이즈의 1위 소식에 뱁쌔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꺄악! 너무 귀여워!”
특히 뮤직스테이 트로피를 들고 찍은 단체 사진이 눈물 나게 귀여웠다.
공방의 맛을 알아 버린 뱁쌔는 빨간 교복 백야를 생눈으로 보지 못한 게 천년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고 만다.”
뮤직스테이는 평일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두 개의 음악방송이 남아 있었다.
점심도 포기해 가며 회사 근처 PC방으로 달려간 그녀는 쇼플리 사녹 명단이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도 만만치 않았는데, 최근 데이즈의 인기가 급부상하면서 폼림 난이도가 대폭 상승했다.
[나라 님 : 태어나서 제일 잘못한 짓 = 레드 교복 지한 못 본 거]
[나라 님 : 죽어야지.......]
마침 같이 결과를 기다리던 나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 : 플리즈 컴다운...]
나라를 진정시킨 뱁쌔는 지금부터 무대 영상에 풀캠, 직캠, 페이스 캠까지 보려면 매우 바빴다.
그러던 그때, 핸드폰 상단으로 유앱 알람이 나타났다.
[DASE|안녕하세요. 지한입니다. 오늘은 뮤직스테이 1위를 했고 공약으로 파트 바꿔 부르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연습실이고 저녁으로 샐러드 먹었습니다. 쉬는 시간인데 함께 하이틴 2화를 보면 좋]
“…이게 무슨?”
글자 수를 초과했는지 문장이 제대로 끝맺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긴 알람은 처음이라 뱁쌔는 그저 당황스럽기만 한데, 나라는 눈물로 한강을 만들고 있었다.
[나라 님 : ㅠㅠㅠㅠㅠㅠㅠ]
유앱은 1초라도 더 빨리 들어가는 게 이득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나라를 달래 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검은 화면에 채팅창만 빠른 속도로 올라가다 드디어 멤버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백야 : 아니야, 어색해.]
[율무 : 아~ 나 원래 잘했는데. 그럼 형이 해 봐. 네이티브 사투리.]
[청 : 오! Son of Ulsan!]
로딩 시간이 꽤 걸린다 싶더니 앞부분이 조금 잘린 모양이었다.
화면 너머의 데이즈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사투리 배틀을 벌이는 중이었다.
멤버들의 기대에 찬 시선이 모이자 민성이 조금 부끄러워했다.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댓글을 살피던 토끼는 무심한 듯 설레는 사투리를 뱉었다.
[민성 : 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