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눈에 뭐가 들어갔어.”
“눈이 빨간데?”
“아니라고!”
대체 이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백야가 발끈하자 곳곳에서 안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개복치의 눈물 덕에 분위기가 빠르게 환기됐다는 점은 참 다행이었다.
“진짜 우는 줄 알고 놀랐네…. 비비지 마. 그러다 상처 나면 어쩌려고 그래.”
유연이 백야의 손목을 잡아 떼어 내며 살펴 주었다.
“눈 떠 봐.”
“못 뜨겠어. 뭐 들어갔는데….”
“나와 봐. 내가 호~ 하고 불어 줄게.”
“싫어. 저리 가.”
율무가 바람을 불어 주겠다며 다가왔다.
원래 처음 사고 쳤을 때 단단히 혼내야 두 번이 없는 법인데. 어쩌다 보니 흐지부지 끝나 버린 잔소리에 남경만 머쓱해졌다.
“형. 내가 잘 말해 놓을게.”
그를 눈치챘는지 조용히 다가온 민성이 동생들의 편을 들었다.
“카페 가고 싶다고 형 부르는 게 더 미안했겠지.”
“편들려고 온 거면 그냥 저리 가라.”
남경이 스트레스받는다며 소파를 턱짓했다.
얼굴을 잡고 바람을 불어 대는 율무와 바둥거리는 백야. 백야의 손에 머리를 맞고 인내하는 유연과 비명을 지르는 청이 보였다.
“햄스터 살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지한까지.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거기다 곳곳에 펼쳐진 캐리어 때문에 이 소란이 더 정신없어 보였다.
“동작 그만!”
마음을 다스린 남경이 사자후를 질렀다. 소란스럽던 공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다 떨어져.”
남경의 말에 엉켜있던 네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멀어졌다.
“너희 짐은 다 쌌어? 내가 분명히 나 오기 전까지 싸놓으라고 했는데.”
케이팝 콘서트를 앞둔 데이즈는 내일 새벽 비행기로 LA 출국이 예정되어 있었다.
차마 짐을 다 싸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막내즈에 남경이 한숨을 쉬었다.
“30분 준다. 마무리해.”
“나 진짜 다했다! 하나만 넣으면 끝이다!”
“나도 닫기만 하면 돼. 진짜야.”
“저도 양말만 넣으면….”
자리에서 일어난 막내들이 각자의 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 * *
- LA 디X니 왕국으로 돌아가는 토끼 왕자 (민성 프리뷰.jpg)
- 지한아 율무야 LA 잘 다녀와~ 간 김에 푹 쉬다 왔으면♡ ICN 출국 (지한 율무 프리뷰.jpg)
- 공출목 지양합시다 제발!
- 오늘 공항 진짜 개판이었음... 멤버 밀고 눈앞에서 플래시 터뜨리고 내가 다 빡침
- 새벽이라 이 정도였지 다른 시간대였으면 아찔하다 정말
- ID 일 안 해? 경호원 더 늘려 XX 상식적으로 12명으로 되겠니?
└ 멤버당 2명 + 매니저까지 있었으니까 적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인기를 간과한 건 사실
- 경호원 두 명씩 붙어 있어서 이 정도였지 아니었으면 진심 누구 하나 넘어졌음. 제발 기본 매너는 지킵시다
- 그냥 공항 자체를 가지 마
- 눈앞에 플래시는 진짜 아니지 않냐.... 민성이 놀라서 눈 감았다가 넘어질 뻔한 거 생각하면 피꺼솟
- 플래시 겁나 터뜨리는데 지한이 눈 하나도 깜빡 안 함... 기존쎄
- 공항에 사람 많아서 정신없었을 텐데 웃으면서 인사해 주는 율무ㅠㅠ 역시 댕댕이는 천사야 (율무 프리뷰.jpg)
“형. 눈 괜찮아?”
“응. 아까보단 나아.”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자리에 앉은 지한과 민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몇 개.”
지한이 민성의 앞으로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네 개. 나 안 보이는 거 아니거든? 그냥 잔상만 보이는 정도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다 하자 지한이 다행이라며 안심했다.
“힘들어…….”
한편 청과 나란히 앉은 백야는 앞 좌석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공항에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던 멤버들은 출국 한 번으로 모든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LA까지 몇 시간 걸린댔더라….”
백야가 티켓을 꺼내려 가방을 주섬거리자 청이 대신 알려 주었다.
“11시 30분!”
거의 하루의 반나절을 상공에 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백야가 경악했다. 아무리 밀린 잠을 자고 영화를 본다고 해도 시간이 남아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마침 상태창이 나타났다.
[업데이트 준비 완료!]
[v.1.3 업데이트가 60초 후에 시작됩니다. 설치가 완료되면 게임이 자동으로 실행됩니다.
▶ 나중에
ㅤㅤ설치]
“히익!”
지난번에는 더럽게 느리던 게 이번에는 왜 이렇게 빠르지?
일본에서의 일이 떠오른 백야는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졌다.
“백야 왜 그러나?”
“…어? 아니야, 아무것도.”
“No. You don’t look good.”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며 청이 백야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고민도 하지 않고 ‘나중에’를 선택한 백야는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확률로 다시 나타날 상태창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근데 눈은 왜 감나? 나 봐.”
“청, 미안한데 나 물 좀.”
“물? 기다려!”
자리에서 일어난 청이 기내 뒤편으로 달려갔다.
이마를 짚은 백야가 숨을 고르는 사이 청이 일회용 용기에 담긴 물을 가져왔다.
“백야, 물!”
“고마워.”
아니나 다를까, 눈을 뜨자마자 새로운 상태창이 보였다.
[v.1.3 업데이트를 진행합니다.
▶ 1시간 후에 시도
ㅤㅤ잠든 후에 시도
ㅤㅤ내일 다시 알리기]
‘잠든 후에 시도?’
혹시 자는 동안 업데이트를 시도한다는 뜻인 걸까.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또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중간의 선택지가 제일 나아 보였다.
물을 원샷 한 백야가 ‘잠든 후에 시도’를 선택하자 상태창이 사라졌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빤히 봐?”
“Are you Okay?”
“미안. 숨 참는 연습하다가.”
“그런 걸 왜 하나?”
“음…. 폐활량이 늘어난다 그래서.”
“깜짝했네. 물도 괜찮아?”
“물?”
백야가 빈 컵과 청을 번갈아 봤다.
“응. 괜찮은데.”
이번에는 청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는 점술사에게 ‘물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뒤로 백야의 주변에서 물을 치우느라 홀로 바빴다.
“…왜 또 그렇게 보는데?”
“It’s nothing.”
“왜. 뭔데.”
백야가 더 자세히 물으려는 타이밍에 스튜어디스가 다가왔다.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자세를 바로 해 달라는 요청에 청이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백야 조용히 하래.”
이때다 싶어 자세를 바로 앉은 청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했다.
-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이제 이륙하겠습니다.
기내 방송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외국으로 나갈 때마다 업데이트를 하는 것 같은데.’
해외에서 죽을 팔자인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청이 기내식 팸플릿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백야, 아침 먹나?”
“응.”
순순히 식사를 하겠다는 말에 청이 놀라워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밥 먹고 계속 잘 거야.”
그러나 기대했던 대답과 다른 내용에 금세 눈썹이 찌푸려졌다.
“Why! 나랑 놀자!”
“너도 자.”
“이 망할 햄스터.”
같이 놀자며 보챌 줄 알았는데 청은 의외로 조용했다.
이륙하기 전에 창백한 안색을 봐서 그런가, 자꾸 얼굴을 힐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대신 좌석벨트 표시등이 꺼지자마자 민성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마 자리를 바꾸자고 말하러 간 느낌이었다.
‘형 옆자리가 율무던가.’
옆자리에 누가 앉든 상관없는 백야는 업데이트 전, 만반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지난번처럼 이상한 곳에서 눈을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드폰과 지갑, 이것저것을 담아 가방을 멨다.
“모냐.”
민성이나 율무가 올 줄 알았는데 청이 작은 갈색 병을 들고 돌아왔다.
작은 봉처럼 생긴 저것은 죽을 거 같을 때 먹는 부활 포션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비타민이라고 불리는 제품이었다.
“어디 가? 여기는 하늘인데.”
금방 내릴 것처럼 채비를 하는 백야에 청이 의아해했다.
“너는 왜 다시 와?”
“내 자리 여긴데?”
“나는 너 자리 바꾸러 간 줄 알았는데?”
“No! 세상에 그런 일은 없어.”
그러는 너야말로 왜 가방을 메고 있냐는 말에 백야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어서. 이런 건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지.”
“몬데?”
청이 가방을 당겨와 안을 살피자 여권과 체크카드, 그리고 닭가슴살 육포 같은 과자가 들어 있었다.
“꼬꼬댁칩?”
트레이너가 간식으로 챙겨 먹으라며 선물해 준 것이었다.
“모…. 많이 먹으면 좋지.”
율무가 먹는 맛없는 과자로 기억하는 청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 먹기 전까지는 놀 수 있어. 얼른 앉아.”
백야는 중앙의 팔걸이 위로 책 두 권을 올려놓았다. 청의 서운해 하는 표정이 내심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백야는 샌프란시스코 여행 책자를 펼쳐 한곳을 가리켰다.
“너 여기 가 봤어?”
“당근 하지.”
“우와. 언제?”
“거기 나 살던 곳인데.”
“…….”
“햄스터야. 나한테 관심이 없나?”
이거 LA 책 아니었나.
차갑게 식은 시선이 백야를 향했다.
머릿속에 온통 업데이트에 대한 걱정뿐인 개복치는 코를 쓱 훔쳤다.
하핫.
청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백야는 곧이어 나온 기내식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죽과 크루아상을 남김없이 해치운 개복치는 슬슬 잘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아침인데 진짜 자나? Really?”
“그럼 미국은 밤이겠네. 시차 적응 연습이야.”
“연습 애벌레야 모야.”
백야는 매일 연습만 한다며 청이 입술을 삐죽였다.
민성에게는 100% 통하는 필살기. 시무룩한 얼굴로 졸라 보았으나 백야는 단호했다.
“잘 자!”
의자를 최대한 젖힌 백야는 안대까지 야무지게 착용한 뒤 발라당 누웠다.
활동하는 내내 잠이 부족했던지라 잠들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 * *
그렇게 비행 8시간째.
백야는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한 번도 깨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불편하지도 않은지 작은 뒤척임조차 없어서 청이 코 아래로 손가락을 몇 번이나 가져다 댔는지 모른다.
“왜 안 자?”
화장실을 다녀오던 지한이 홀로 깨어 있는 청의 옆으로 다가갔다.
“잠이 안 와.”
“그래도 좀 자는 게 좋을 텐데. 쟤는 아까부터 계속 자네.”
“괜찮아, 살아 있어.”
햄스터 장례식의 세 번째 피해자인 지한이 관심을 보이자 청이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자 그 순간 햄스터가 움직임을 보였다.
꼼지락-.
“오! 일어난다!”
깊게 잠들어 있던 백야가 의식을 되찾자마자 들린 건 청과 지한의 목소리였다.
‘다행이다.’
잠들기 전까지 줄곧 일본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멤버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안심한 백야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번에도 백야를 제일 먼저 반겨 주는 건 역시나 상태창이었다.
[v.1.3 업데이트 안내
- 13일의 금요일/폐쇄병동 맵 추가
- 새로운 스킬 추가
- 버그 수정 및 서버 안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