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 * *
“청아 일어나~ 리허설 하러 가자~”
장비 문제가 해결됐다는 말에 데이즈는 다시 이동해야 했다.
율무가 담요 아래로 튀어나온 발바닥을 간지럽히자 커다란 발이 움찔거렸다.
“일어나~ 일어나~”
율무가 청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자 백색 병아리가 반만 뜬 눈으로 삐악거렸다.
“…우리 가?”
“응. 우리 가야 해. 근데 너 무슨 청 씨야? 매실 청? 푸를 청?”
“…매신?”
매실이 뭔지 몰라 되뇐 것뿐인데 율무는 역시 매실 청 씨였다며 기뻐했다.
“진짜 매실 청이라는 한자가 있어?”
“있겠냐고….”
백야의 중얼거림에 유연은 ‘매실 청’이 ‘포 도’, ‘바나 나’와 다를 게 뭐냐며 한심해했다.
“아니, 나도 아는데 청이가 매실이라니까 순간 헷갈린 거지….”
잘 버티고 있었는데.
결국 말려들고만 백야가 아쉬움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 어제 잠 안 온다고 신나게 놀았지? 애가 정신을 못 차리네~”
“잠이 계속 생겨….”
율무의 등에 이마를 박은 청이 피곤함에 허우적거렸다.
어제의 소동은 청과 같은 방을 쓴 민성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멤버들은 알지 못했다.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지만, 자랑거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네 사람은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일이 없이 울어댄 게 제일 쪽팔렸다.
[업데이트 준비 중… 81%]
느리다고 툴툴대긴 했지만, 다행히 업데이트되는 속도는 지난번과 비교할 수도 없이 빨랐다.
리허설이 끝날 때쯤에는 공포 게임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크 팩이 하나 남는데?”
“민성 님. 마이크 안 챙기셨어요.”
비몽사몽 하는 청이를 챙기느라 정작 민성은 준비를 못 하고 있었다.
콘서트 비하인드 브이로그를 촬영하던 덕진이 귀띔해 주자 그가 손을 들며 달려갔다.
“많이 피곤해?”
백야가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청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목소리에 느리게 눈을 뜬 청이 백야를 내려다봤다.
“No problem. 무대 올라가면 살아나.”
몸을 바로 세운 청은 스트레칭을 하며 잠을 물리치려 노력했다.
다른 멤버들은 한쪽에서 꽤 소란스러웠는데, 사복 위로 이름표를 착용한 덕분에 떠드는 뒷모습이 누군지 단번에 식별 가능했다.
“저희가 드디어 공연장에 도착했습니다~ 지한 씨, 여기가 어디죠?”
“LA입니다.”
덕진의 브이로그 카메라 앞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던 율무가 지한을 부추겼다. 그러자 늘 그렇듯 시니컬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그룹이 오늘 오후 도착 일정이라 저희가 제일 먼저 리허설을 하게 됐어요~”
유연은 이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뒤쪽을 힐끔거렸다.
백야와 청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가자, 가자.”
준비를 마친 민성이 막내들을 챙겨 카메라 쪽으로 다가왔다.
“저희는 그럼 이제 리허설을 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완전체가 된 데이즈. 덕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는 멤버들의 뒷모습을 담았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라 아직은 날씨가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청은 긴 팔 차림이었다.
“청 님 더워 보이시는데….”
“감기 기운 있나 봐. 아침부터 계속 춥다 그러더래.”
LA는 일교차가 심한 편이었다.
오늘 새벽, 청이 줄곧 얇은 옷차림이었다는 걸 떠올린 덕진이 아차 했다.
“민성이가 약 먹였다는데 잘 모르겠네. 컨디션 돌아와야 할 텐데.”
어쩐지.
신이 나 방방 거리며 돌아다녀야 할 인물이 병든 닭처럼 잠만 자는 게 수상하긴 했다.
두 매니저가 걱정 어린 얼굴로 백스테이지에 설치된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으로 무대 위 대형을 갖추는 데이즈가 보였다.
- ‘놀이’ 먼저 가겠습니다.
데이즈가 선보일 곡은 총 3곡.
중간 토크를 포함해 15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M사에서 중계를 맡은 한국을 제외한 국가에선 생중계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체크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내가 개같이 부활!”
“청청. 뛰지 마.”
무대에 올라가면 살아날 거라더니. 리허설이 끝나기 무섭게 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청을 말리는 지한의 목소리와 동시에 그는 덕진을 향해 돌진했다.
“카메라!”
“으앗. 청 님 너무 빠른데…!”
“넌 어떻게 된 게 중간이 없니…. 거기 아니고 여기란다?”
부딪히기 직전, 쏜살같이 달려온 민성이 청의 후드 모자를 낚아채며 멈춰 세웠다.
모자를 당겨 모니터 앞으로 끌어 온 민성은 어느새 모여든 멤버들과 함께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무대가 넓어서 동선을 더 크게 써도 될 거 같은데.”
유연의 의견에 멤버들도 동의했다.
뒤이어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도 체크한 멤버들은 내일 있을 드레스 리허설에서 한 번 더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제 우리 뭐 해?”
오늘 예정되어 있던 유일한 일정이 끝나자, 민성은 은근히 기대에 차 물었다.
그러나 남경은 얄짤없다는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긴 뭘 해. 호텔 돌아가서 쉬어야지.”
청과 백야의 컨디션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공연을 앞두고 돌아다니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남경은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멤버들을 싸고도는 경향이 있었다.
“호텔로 간다고? 지금? 롸잇 나우?”
LA까지 왔는데 곧장 숙소로 복귀한다는 말에 율무가 현실을 부정했다.
“돌아다니는 게 안 되면 드라이브스루라도 데려가 줘. 응? 아아앙~”
아직 한낮이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호텔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율무가 애교를 부렸다.
커다란 덩치로 어깨를 흔들며 치대오자 남경이 버거워했다.
“일단 가자. 차로 가서 이야기해.”
남경이 율무를 진정시키며 멤버들을 이끌었다.
그러는 사이 백야의 업데이트는 준비가 완료됐다.
[업데이트 준비 완료!]
[v.1.3.700 업데이트가 60초 후에 시작됩니다. 복구가 완료되면 게임이 자동으로 실행됩니다.]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업데이트 준비가 완료됐다는 소식에 백야는 당장 ‘설치’를 누를 뻔했다.
그러나 높은 확률로 의식을 잃을 것 같다는 예감에 주저하게 됐다. 이번에 또 쓰러진다면 민폐 등극 물론, 자신의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서버 복구를 수행하는 데는 약 3분 정도 소요됩니다.]
백야가 망설이자 시스템은 재차 상태창을 띄워 주었다. 업데이트 중에는 행동 불능 상태가 된다는 안내와 함께였다.
‘3분? 3분이면 해 볼 만한데.’
알고 보면 시스템도 저만큼이나 급한 거 아닐까.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백야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초 남짓. 이번에는 선택지도 굉장히 다양했다.
‘5분 후 업데이트’와 ‘나중에 알림’에서 고민하던 백야는 결국 전자를 택했다.
이제 백야가 해야 할 일은 화장실로 달리는 일뿐이었다.
“너희는 먼저 차에 타고 있으면… 아. 어차피 장비 때문에 같이 올라가야 하는구나.”
멤버들의 인 이어 케이스와 짐이 모두 대기실에 있었다.
그냥 다 같이 이동하자는 말에 백야가 얼른 손을 들었다.
“백야 왜?”
“저 화장실 좀….”
“누가 같이 가. 쟤는 불안해서 혼자 못 보내겠어.”
“내가 가!”
혼자 보내 주는 게 베스트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럼 인이어 나 줄래? 내가 올라가서 정리할게.”
“역시 민성이야!”
청이 목에 걸치고 있던 이어 마이크와 인이어를 빼 넘겨주었다. 백야의 것은 유연이 받아 들었다.
“핸드폰 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Don’t worry!”
짐을 정리해서 내려올 테니 주차장에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일행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덕진, 청과 움직이게 된 백야는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맞은편에 서있는 낯익은 얼굴을 마주했다.
리허설을 위해 이동 중이던 식스에이엠 멤버들과 매니저였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하랑은 보이지 않았다.
대충 인사만 나누고 각자의 갈 길을 갈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상대 그룹의 매니저가 덕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혹시 영어 잘하세요?”
“저요?”
“죄송해요. 리허설도 늦었는데 이분이 자꾸 뭔가를 요청하셔서요. 통역해 주시는 분께선 아직 도착을 안 하셔서….”
스태프 목걸이를 하고 있는 외국인도 곤란해 보였다.
“왜? 뭔데?”
곤란한 상황 속, 유일한 구원자인 청이 나서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업데이트 시작 1분 19초 남음]
화장실을 눈앞에 두고 멈춰 버린 일행에 백야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백야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를 본 청이 먼저 가 보라며 백야를 보내 주었다.
“그럼 나 먼저 가 있을게?”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장실로 달리는 백야의 뒷모습은 굉장히 급해 보였다.
[업데이트 시작 14초 남음]
실제로도 위급한 상황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가까운 칸으로 달려간 백야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곤 빠른 손놀림으로 1분 간격의 알람을 다섯 개나 설정했다.
혹시 바로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려는 계획이었다.
‘이 정도면 깨겠지.’
마지막 알람 등록을 끝으로 백야의 의식이 끊어졌다.
쿵-.
힘없이 무너진 몸은 벽에 부딪히며 제법 큰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해당 소음을 들은 또 다른 한 사람. 바로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던 하랑이었다.
“……?”
개복치와 달리 하랑은 백야가 화장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다급히 칸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모두 보았다.
원래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라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꽤 커다란 소리에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 문 가까이 핸드폰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손을 넣으면 바깥에서도 집을 수 있을 위치였다.
똑똑-.
그냥 돌아가자니 찝찝했던 하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방송국 대기실에서 코피를 흘리던 모습을 기억하는 그는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야.”
똑똑똑-.
좀 더 신경질이 담긴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큰소리가 난 걸 보면 안에서 쓰러지기라도 한 건가.
마른 몸을 유지하기 위해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아이돌들 사이에서 실신은 꽤 흔한 일이었다.
하랑이 성가시게 됐다는 얼굴로 눈썹을 구겼다.
굳이 자신이 호들갑을 떨며 설칠 이유는 없으니 근처에 있을 관계자를 불러 주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몸을 돌리는 순간, 천장의 전구가 스파크를 튀기며 산산조각 났다.
파직-.
챙그랑!
“아 씨, 깜짝이야.”
끼이익-.
음산한 소리에 하랑이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칸의 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야, 나와.”
조금 전의 소음으로 백야가 문을 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 너 나 무시하냐?”
세 번이나 무시당하자 조금 짜증이 난 하랑은 충동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끼익-.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