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같은 시각.
단잠에 빠진 햄스터는 미끄러운 무언가가 엉덩이를 스치는 감각에 눈을 떴다.
“…방금 뭐지?”
따사로운 햇볕.
적당한 온도.
선선한 습도.
완벽한 삼박자에 노곤하던 눈꺼풀이 결국 감기고 만 모양이다.
상태창을 살피며 닭 가슴살 육포를 질겅이던 백야는 선글라스를 벗어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는데?’
그 순간, 또 미끄덩한 감촉이 다시 둔부에 닿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뭐야!”
놀란 백야가 버둥거리자 튜브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형! 민성이 형…!”
뒤늦게 민성을 불러 보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육지를 등지고 있는 탓에 백야의 시야에는 망망대해만 보였다.
뒤를 돌아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튜브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몸을 들썩이던 백야는 손으로 물을 저어 보기로 했다.
찰박, 찰박-.
열심히 물장구를 치며 오리를 조종하는데, 순간 수면 위로 세모난 형태의 무언가가 다가왔다.
“…응?”
물고기?
처음엔 드러난 크기가 작아서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짙어지는 그림자와 함께 드러난 지느러미가 점점 커져 갔다.
수면 아래를 보던 백야의 얼굴도 점차 사색이 되어 갔다.
‘사, 상어!?’
자신이 위급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에 백야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여기는 수영 금지 구역도 아닌데 상어가 왜…?’
놀란 개복치가 바둥거리는데 발끝에 얇고 긴 무언가가 채였다. 이 이상은 금지 구역이니 넘어가지 말라는 안전선이었다.
끄아악!
일단 물장구를 치던 손부터 거둔 백야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후우, 후우-.
놀란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고, 코에선 거친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해변가에 안전 요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자신은 불운의 개복치라 그들의 가호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사고 회로가 정지된 백야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구조도 구조지만 그전에 물속에 잠긴 엉덩이부터 건져 내야 할 것 같았다.
‘운동한 보람을 이렇게 느끼다니.’
살며시 엉덩이를 올린 백야는 발과 다리로 제 한 몸을 지탱하기 시작했다.
바다 위, 튜브에서 하는 플랭크는 지상보다 훨씬 더 죽을 맛이었다.
“끕.”
1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1시간은 버틴 기분이었다. 공포에 질린 팔과 다리는 벌써부터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먹잇감의 냄새를 맡은 지느러미는 여전히 백야의 주위를 맴돌았다.
“저리 가. 제바알….”
자신은 어떻게 해도 죽을 운명인 걸까.
사실 천재 아이돌은 페이크였고 살아남기가 이 게임의 주된 목적이 아닐까.
시스템이 잠잠해도 이렇게 꾸준히 목숨에 위협을 받으니 의심이 들 만도 했다.
첨벙-!
그러던 어느 순간, 지느러미가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해치웠나.’
헬린이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수면 아래를 내려다봤다.
풍덩-!
그러다 턱 아래에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그만 빠뜨리고 말았다.
‘아악! 안 돼! 선물 받은 건데…!’
아니, 이게 아니라.
선글라스도 선글라스지만, 좀 전의 실수가 지나가려던 상어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듯했다.
사라졌던 지느러미가 다시 올라오더니 기어이 모습을 드러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끄아악!”
풍덩-!
놀란 백야는 팔에 힘이 풀려 튜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꼬로록.
* * *
“한백야!”
백야가 물속으로 빠지는 순간 지한의 카메라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민성과 지한은 즉시 안전 요원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그런데 항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안전 감시탑에는 사람이 없었다.
“시X. 미치겠네.”
지한이 거추장스러운 밀짚모자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형은 저쪽으로 가 봐. 난 이쪽으로 갈게.”
두 사람은 각자 반대 방향으로 찢어지기로 했다.
율무와 유연, 청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 지한은 세 사람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나율무! 큰일 났어!”
“지한이다~”
“큰일 났다고!”
파도를 잡고 있던 세 사람은 지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허허 웃으며 손이나 흔들어 주는데, 지한이 화가 난 얼굴로 저희 쪽을 향해 다가오는 게 아닌가.
“…뭐지? 우리 뭐 잘못했나?”
학습된 공포에 율무가 제일 먼저 찔려 했다.
“백도 어쩌고 하지 않았어?”
“백야? 햄스터 왜? 근데 지한 계속 오는데?”
가까워질수록 지한의 굳은 표정이 드러났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세 사람도 해변가로 움직였다.
“거기 있어. 안 들어올 거라더니 갑자기 왜,”
“나율무. 한백야가 물에 빠졌어. 근처에 상어 지느러미같은 게 맴도는 걸 봤는데….”
“Hey. hey, Calm down.”
청이 흥분한 지한을 진정시켰다.
“세이프 가드 없어? Wait. 내가 갈게.”
굳은 얼굴의 청이 지한을 지나쳐 해변으로 달려갔다.
“상어…는 잘못 봤겠지. 여기에 무슨 상어야.”
“분명 지느러미 같은 걸 봤어.”
“에헤이~ 백야 수영할 줄 아니까 괜찮을 거야. 정확히 어디쯤인데?”
율무가 타이르듯 침착하게 물었다.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이었다.
“저기쯤. 노란색 튜브 있는 곳.”
지한이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자유의 몸이 된 오리가 안전 라인 너머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물 위로 올라오는 건 봤어?”
“모르겠어. 빠지는 거까지만 보고….”
“미치겠네.”
유연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다 보드를 팽개치고 바다 안쪽으로 향하려는 모습에 율무가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려고.”
“빠졌으면 건져야지. 구조대원 올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기다릴 거야?”
그리고 그 시각.
원치 않는 바닷물을 한 바가지 먹은 백야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수면 위로 올라온 참이었다.
“끄악. 짜.”
바닷물에 입 안은 텁텁하고 얼굴은 따가웠다.
가라앉지 않으려 연신 두 다리를 휘젓던 백야는 자신의 등을 건드리는 낯선 느낌에 기함했다.
“으갹!”
맞다. 그러고 보니 튜브에 떨어진 이유가 있었지.
뒤를 돌아보자 귀여운 외모의 회색 돌고래가 백야의 선글라스를 입에 물고 있었다.
뀨?
“히끅.”
놀란 마음에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무, 뭐야…. 돌고래?”
백야가 흠칫거리며 몸을 물리자 돌고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둥이를 자꾸 들이미는 걸 보니 선글라스를 주려는 것 같았다.
“…이거 가져가라고?”
백야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선글라스를 집자 돌고래가 순순히 아가리의 힘을 풀었다.
“고마워….”
상어인 줄 알았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낯선 생물이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건 다행이었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기가 어디쯤….’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안전선 너머로 떠내려가고 있는 유일한 탈것을 발견했다.
“어어, 내 튜브…!”
아련하게 손을 뻗어 보지만 닿을 리 없었다.
‘혹시 이것도…?’
곁을 떠나지 않는 돌고래를 향해 백야가 슬쩍 물장구를 일으켰다.
“야.”
뀨?
“저기 저거도 가져다주면 안 돼?”
고래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현타가 온 백야는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졌다.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멀리도 왔네.”
한없이 멀어 보이는 백사장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잠깐 졸은 것 같은데 이만큼이나 내려왔다니. 갈 길이 멀었다.
힐끔 돌고래를 쳐다본 백야가 머뭇거리다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있어. 난 이제 가 봐야 해. 이거는 고마워.”
백야가 손에 쥔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보였다.
그리곤 해변가를 향해 헤엄을 치는데, 뭉툭한 주둥이가 백야의 손을 건드렸다.
“끄악!”
돌고래의 짓이었다.
“하, 하지 마. 저리 가!”
백야가 발버둥을 치며 죽기 살기로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가까이 다가온 돌고래가 엉덩이를 건드렸다.
“으악! 왜, 왜!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에…!”
개복치의 비명이 망망대해에 울려 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격 의사는 없어 보였는데. 고래가 자꾸 몸을 건드리자 비명과 함께 스트레스 지수가 실시간으로 올라갔다.
“저리 가! 가란 말이야!”
엉덩이를 더듬으며 자신의 살이 뜯기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엉덩이는 두 쪽 다 멀쩡했다.
“따라오지 마!”
백야가 돌고래를 향해 물보라를 일으켰다.
뀨?
그러자 돌고래는 이번엔 수면 아래로 내려가 백야의 반바지를 잡아당겼다.
“끄아악!”
혼비백산이 된 개복치는 바닷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을 단 채 해변가를 향해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헬프 미!”
그러자 순간, 돌고래의 머리가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그대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끄아악! 악!”
그 결과 백야는 얼떨결에 돌고래의 몸에 올라타게 됐다.
[경고!]
[스트레스 지수가 ‘주의’ 단계입니다. 55%]
[<병약미> 패시브와 반응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킵니다.]
“아니야, 이러지 마. 날 내려 주, 끄악!”
백야의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고래는 그를 태운 채 안전선 너머를 향해 힘차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주륵-.
코피가 흘러내렸지만 훔칠 새도 없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이대로라면 바다 한가운데서 익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 미친놈아! 나는 먹는 거 아니란 말이야, 으악!”
점점 멀어지는 육지에 백야가 등에서 내려오려 몸부림쳤다.
그러자 돌연 헤엄을 멈춘 고래가 방향을 돌려 서퍼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됐다! 이대로만 쭉 가라. 제발.’
이대로만 가면 서핑 구역이었다.
그곳이라면 멤버들이 보드를 타고 있을 테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갑자기 얌전해진 백야는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기다려. 너까지 잘못되면,”
“잘못되긴 누가 잘못돼.”
유연이 율무의 손을 뿌리치고 뒤를 돌 때였다.
“야아악! 이거 잡아! 멈춰어어!”
인생이 시트콤 그 자체.
돌고래를 탄 햄스터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