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 * *
샵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친 백야는 무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평소보다 무대를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신재현 : (사진)]
[신재현 : 우리 반디월드 도착]
[김유경 : 대존맛 한입 드실?]
초록색 빙수 사진이었다.
‘다행이다. 즐거워 보이네.’
자신 때문에 열리는 줄도 몰랐던 반딧불 축제를 보러 와 준 친구들이었다.
사실 퀘스트가 뜬 날 밤까지만 해도 백야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 9월은 뭐다? 지방 행사 풍년의 달ㅎㅎ 축제 안 하는 도시가 없음
- 반딧불이 축제 D-1 이런 누추한 곳에 데이즈가 온다니ㅜㅜ
- 유기농율무 LA까지 따라가서 사진 당일 보정해서 올린 게 레전드... 내가 저 성실함의 반만 닮았어도 당장 카메라 드는 건데
└ 백색소음? 신생 같던데 거기도 올라옴. 분위기 미쳤음
- 엠소데의 시대가 도래했다... 에임.. 소년천하.. 그리고 데이즈
- 애들 신생홈 또 우르르 생기겠네 너무 조아
- 내일 무주 반딧불이 반 찍덕 반일 예정
‘그래. 적어도 한 명 정도는 날 찍는 사람이 있겠지.’
하이틴 열풍 이후 데이즈의 인기는 확실히 전과 달랐다. 어딜 가나 팬들이 따라붙었고 그만큼 2차 콘텐츠도 많이 생겨났다.
당장 너튜브만 검색해 봐도 핸드폰으로 찍은 실물 짤, 음악방송 출근길 등, 다양한 영상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번 퀘스트는 그냥 직캠도 아닌 레전드 직캠. 대충 살펴보니 몇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될 것 같았다.
1. 얼굴
2. 동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카메라
3. 고화질일 것
1번은 제가 노력해 볼 수 있는 유일한 항목인 만큼 최선을 다한 상태였다.
“한백야. 너 샵에서 실장님한테 예쁘게 해 달라 그랬다며.”
지한의 기습 질문에 백야는 당황했다.
“…어?”
“쟤가 그런 말을 했다고?”
돌아보는 유연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아니야.”
그러나 표정에 다 티가 나는 백야는 거짓말을 더럽게 못했다.
“맞나 보네. 왜. 거기에 잘 보여야 할 사람이라도 오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백야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요청 사항이 제대로 반영됐는지, 창문에 비친 머리는 평소보다 컬이 살아 있었다. 통통한 뺨은 분홍 기가 돌아 오늘따라 더 복숭아 같았다.
이제 남은 건 최대한 많은 카메라에 찍혀 레전드를 건져 내는 것뿐이었다.
사실 ‘백야현상’이나 ‘스윗백’같은 자신의 홈마들이 와 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분들도 할 일이 있을 텐데 어떻게 매번 스케줄을 따라오겠는가. 그것도 지방까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못 오실지도 모르니까….’
저야 행사를 뛰면 돈을 번다지만, 그분들은 자신을 따라다녀서 얻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애정 하나로 응원해 주는 분들인데 지방 행사까지 와 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떠오른 게 바로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다.
‘없는 거보단 낫겠지.’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쯤은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나 : 맛있겠다]
[나 : 녹차 맛?]
[김유경 : ㄴㄴ 이거 반딧불이 맛임]
[나 : 거짓말하지 마]
[김유경 : 진짜야]
[신재현 : 녹차 맛 맞아]
[신재현 : (사진)]
재현은 한 장의 사진을 더 보내왔다. ‘녹차 빙수’라고 적힌 창밖의 입간판이었다.
그런데 창문에 비친 재현과 유경 말고도 낯선 실루엣이 함께 보였다. 무려 긴 생머리였다.
[나 : 너희 누구랑 있어?]
[나 : 둘이 간 거 아니야??]
[신재현 : 어떻게 알아?]
[나 : 창문에 비치잖아...]
재현은 같은 버스를 타고 온 나잉이분들인데, 어쩌다 보니 함께 움직이게 됐다며 쑥스러워했다.
[신재현 : 이따 공연장에도 같이 가기로 했어ㅎㅎ]
[신재현 : 유연 민성 님 팬이래]
[나 : 아니 왜???]
[신재현 : 왜라니?]
[신재현 : 아... 네 팬 아니라서 실망했어?]
[김유경 : 짜식.. 넌 좀 더 분발해야겠더라ㅠ]
[김유경 : 그래도 걱정ㄴㄴ 내가 오늘 너 찍으려고 형 디카도 훔쳐 옴]
[김유경 : 기깔나게 찍어드림]
* * *
“야, 그런 소리는 왜 해.”
“뭐가. 분발하라는 거? 그냥 열심히 하라는 응원이잖아.”
유경과 재현이 투닥거렸다.
“그리고 넌 매너 없이 왜 자꾸 폰을 하냐.”
“뭐래. 자기도 해 놓고.”
“너 때문에 자꾸 진동 울리니까 그러지.”
유경은 여성분을 두고 핸드폰을 만지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전화기를 빼앗아 버렸다.
“그런데 두 분은 어쩌다 입덕하신 거예요? 남자가 남자 아이돌 좋아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나잉1이 관심을 보였다.
백야와의 친분을 섣불리 밝히지 않은 두 사람은 대충 둘러댔다.
“그냥, 뭐.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죠.”
“어느 날 갑자기 아이돌이 돼서 제 앞에 나타났거든요.”
딱히 거짓말도 아닌지라 입에선 입덕 계기라 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가 술술 흘러 나왔다.
특히 유경은 말하다 보니 학창 시절이 생각났는지 우수에 찬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약간 마약 같은 놈이랄까? 그 쓰레기 같은 안경 뒤에 그런 얼굴을 숨기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 그 졸업사진?”
“네.”
“맞아요. 솔직히 그 안경은 진짜 쓰레기….”
나잉1과 2도 공감하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데 백야가 눈이 많이 나쁘대요. 지금은 라식 했다는 거 같던데.”
“엥? 아닌데. 걔 렌즈 낄 텐데?”
“백야 렌즈 껴요?”
“당연하죠. 걔가 겁이 얼마나 많은데, 눈 수술 절대 안 하죠. 세상에서 귀신 제일 무서워하고.”
방청객 같은 리액션에 신이 난 유경이 백야의 TMI를 늘어놓았다.
이대로 두면 말실수를 할 것 같았는지 재현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좀.”
“아, 왜.”
눈치 없는 새끼.
유경은 역시나 알아듣지 못했다. 이를 뿌드득 간 재현은 하는 수 없이 대화에 참여했다.
“그냥 제일 귀엽게 생겼잖아요. 뭐든 열심히 하고.”
“맞아요. 우리 복숭아가 귀엽긴 해요.”
각자 유연과 민성을 좋아한다고 밝힌 나잉이들이 백야를 앓기 시작했다. 그러자 입술을 달싹이던 재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백야 안 좋아하시고 다른 멤버를….”
사실 재현은 은근히 서운해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최애를 영업하는 거라 오해한 나잉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재현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차애는 백야예요.”
“차애? 차애가 뭐….”
“두 번째로 좋아한다고요.”
그 말에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아, 그리고 곧 오기로 한 친구 최애가 백야예요. 완전 찐팬.”
“맞아요. 신생이긴 한데 홈도 있어요.”
나잉이들은 자신보다 먼저 출발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마침 근처에 있다며 함께 이동해도 되느냐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홈이요?”
“집?”
남팬 코스프레 중인 머글1, 2가 어리둥절하고 있던 와중, 마침 카페 문이 열리며 대화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검은색 후드에 검은색 모자, 검정 마스크를 낀 인영이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입장했다.
“어? 야! 여기!”
나잉1이 손을 크게 흔들자 블랙 나잉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범상치 않은 기운에 두 사람은 조금 주눅이 들었다.
그 사이 블랙 나잉은 지인들과도 인사를 나눴으나, 그녀는 여전히 서 있는 상태였다.
“왜 안 앉으시고….”
“바로 이동하실래요? 공연장에 사람 많을 거 같아서.”
블랙 나잉은 곧장 목적지로 이동하길 원했다. 그러나 공연 관람 자체가 처음인 두 사람은 태평한 소리로 반문했다.
“벌써요? 아직 공연 시작하려면 4시간이나 남았는데?”
“미리 가서 자리 잡아야죠. 사실 지금도 늦은 건데.”
지정 좌석이길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자신은 어제 아침부터 공연장이었을 거라고 했다.
분명 한국어인데도 알아듣지 못한 두 사람은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예?”
“하…. 두 분 구역 어디신데요?”
구역이 어디길래 그렇게 태평하냐는 뜻이었다.
역시나 알아듣지 못한 재현은 순수한 마음으로 티켓을 꺼내 보여 주었다.
“여기요.”
S석 초대권.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최고 좋은 좌석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히익!”
“대박!”
나잉1, 2가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감탄했다.
‘뭐지? 많이 좋은 자리인가….’
그때 블랙 나잉이 눈을 번쩍이며 재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 티켓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S석은 표도 몇 장 없고 관계자들한테만 뿌렸다던데?”
그마저도 발 빠른 홈마들이 다 쓸어 가서 양도도 없는 전설의 아이템이었다.
“어, 이거…. 그냥 아는 분이 공연 관련 일하셔서 저희도 운 좋게 얻었어요.”
재현은 당황을 넘어서 살짝 겁을 먹은 상태였다. 블랙 나잉의 눈에 광기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랙 나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진짜 무례한 말인 거 아는데…. 혹시 저한테 티켓 파실 생각 없으세요? 제 거랑 교환하고 거기에 원하시는 만큼 차액 더 얹어 드릴게요.”
“느에?!”
재현과 유경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 아니 잠시만요. 이것 좀 놓고 말하세요.”
손목을 빼낸 재현이 티켓을 품 안으로 숨기며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유경이 은근히 그 앞을 막아섰다.
“아니, 사실. 하…….”
한숨을 쉬던 블랙 나잉은 핸드폰을 꺼내 SNS를 켰다. 그리곤 앞으로 내밀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제가 백색소음이라고 백야 홈 하나 굴리고 있거든요? 이번에 LA 다녀오면서 행사 있는 걸 늦게 듣는 바람에 표를 제대로 못 구했어요.”
‘백색소음’은 혜성같이 나타난 백야의 신생 홈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유망한 홈이었다.
백야를 최애로 두고 있는 나잉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름이었다.
물론 재현과 유경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도 보는 눈은 있었다.
“제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아……. 근데 자연광 복숭아는 도저히 포기가 안 돼서….”
블랙 나잉이 한탄하듯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든 두 사람은 사진을 넘겨 보며 심각해졌다.
“LA를 다녀오셨다고요?”
“이걸 직접 찍으셨다고요?”
질문이 동시에 쏟아졌다.
고개를 끄덕인 블랙 나잉은 자신의 백팩을 내려놓으며 각종 장비를 보여 주었다.
텀블러만 한 카메라 렌즈와 본체, 그리고 삼각대와 캠코더까지.
저희의 작고 귀여운 디지털카메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가의 장비였다.
“두 분께는 제가 찍은 사진이랑 영상 다 공유해 드릴게요.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