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이게 뭐야!?”
“뭐긴 뭐야~ 19금 햄스텁, 우웁.”
듣고 있다간 수치사 할 것 같았던 백야는 재빨리 율무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대 중 한쪽 팔이 올라가는 안무를 할 때 찍힌 사진 같았다.
“허어….”
인생 최대의 노출 사진에 백야가 낑낑거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리였다.
“이, 일단 보지 마.”
백야가 율무의 핸드폰을 빼앗아 꺼 버렸다. 남사스러워서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왜~ 섹시하게 나왔는데. 부러워~”
“이게 진짜…. 벗겨 줘?”
“꺄악~ 당백이 변태~”
팔을 크로스 한 율무가 가슴을 가리며 수줍어했다. 그 모습이 가증스러웠던 백야는 화를 참지 못하고 와락 달려들었다.
“야 벗어, 벗으라고! 내가 찍어 줄 테니까 벗어!”
“푸하하하!”
율무를 소파 위로 밀어 넘어뜨린 백야가 그의 상의를 마구 잡아당겼다.
저항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율무는 솜방망이 같은 손길을 그대로 받아 주고 있었는데. 마침 유연과 청이 나타나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았다.
“야, 야, 떨어져. 뭐 하는 거야.”
“나도! 나도 같이 놀아!”
청이 달려와 율무의 옷을 잡아당겼다. 유연은 반쯤 벗겨진 상체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형 변태야? 왜 가만히 있어.”
그 말에 방긋 웃은 율무는 백야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들었어? 너보고 변태래.”
“뭐래, 너한테 한 소리잖아.”
“아니지~ 쟤네는 아직 이걸 못 봤잖아.”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든 율무가 검은 액정을 두드렸다. 그러자 배경 화면으로 설정된 니트 백야가 다시 나타났다.
“이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었지 뭐야~ 내 새로운 배경 화면이야. 어때?”
“야악!”
파란짹에 ‘니트’만 쳐도 각도별로 찍힌 사진이 수십 장은 나오는데, 개중 가장 야하게 찍힌 사진이라며 자랑했다.
왼쪽 상단에 박힌 백색소음의 워터마크가 선명했다.
“이 새끼가 진짜.”
잔뜩 약이 오른 백야가 앞발을 들어 가슴 위로 퍽 내리쳤다.
“으윽!”
“넌 오늘 죽었다.”
* * *
비활동기에 접어든 데이즈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가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멤버별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개별 레슨이 진행되고 있었고, 백야는 토요일마다 고정 스케줄을 소화 중이었으니까.
거기다 빗발치는 예능에 광고, 행사 요청까지. 사실상 멤버들은 활동 때와 다름없는 스케줄을 소화 중이었다.
“아이스 딸기 라떼 주세요.”
보컬 레슨을 마친 백야는 허기짐을 느끼고 오랜만에 사내 카페를 찾은 참이었다.
요즘 최고로 핫한 복숭아의 등장에 그를 발견한 직원들이 힐끔거렸다.
“안녕하세요.”
백야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친절히 인사해 주었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목에 걸고 있는 명예 사원증이 달랑거렸다.
“백야 씨?”
“어? 팀장님.”
A&R 팀에서 데이즈를 담당하고 있는 2팀 팀장이었다.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백야가 반색하며 뒤를 돌아봤다.
“왜 혼자 있어요?”
“보컬 레슨 끝나고 나왔는데 배가 고파서요.”
“매니저님이 굶겨요?”
“아니요?!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그냥 멤버들이랑 같이 먹기로 했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서요.”
때마침 주문한 메뉴가 나왔는지 픽업대 위로 분홍색 음료가 올라왔다. 그를 본 팀장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키 클 거라고 우유 들어간 거만 마신다더니. 효과는 좀 있어요?”
“…….”
백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푸흡. 괜찮아요, 아직 어리잖아. 남자는 군대 가기 전까지 큰다던데요?”
“…맞아요. 아직 희망이 있어요.”
백야가 빨대를 크게 한 모금 빨아당겼다.
“응원할게요. 아, 그리고 우리 조만간 또 볼 일이 생길 거 같던데.”
“볼 일이요?”
A&R 팀인 그녀와 볼 일이 있는 경우는 단 하나였다.
컴백.
“설마….”
“생각하는 게 맞을걸요? 거기에 뭐가 좀 더 더해지겠지만.”
“저희 새 앨범 말고 다른 게 더 있어요? 뭐요? 뭔데요?”
원래는 귀띔만 해 주고 말 생각이었는데, 저를 바라보는 처연한 눈망울에 팀장은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아…. 이거 말해 주면 안 되는 건데….”
“제발요. 네?”
백야가 두 손을 모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말랑한 얼굴과 눈이 마주친 순간 팀장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데이즈 콘서트 할 거라던데요?”
“헙!”
백야가 입을 막으며 눈을 크게 떴다. 실로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 비밀이에요. 제가 알려 줬다고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정말요? 저희 정말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거… 해요?”
“네. 축하해요.”
팀장은 자세한 이야기는 조만간 공식적인 자리에서 들으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회의가 있다는 말에 백야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그럼 나중에 봐요.”
“네, 안녕히 가세요!”
홀로 남겨진 백야는 발을 동동 굴렀다. 심장이 간질간질한 게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 들어오는 대환을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갔다.
“형! 형, 형, 형!”
“어, 백야 오랜만이네. 근데 왜 이렇게 흥분했어?”
“형! 저희 콘…!”
콘서트 소식에 신이 난 백야가 ‘형’만 다섯 번을 불렀다.
저희도 드디어 콘서트를 한다며 자랑하려는데, 순간 비밀이라던 말이 생각나 급히 입을 다물었다.
“너희 뭐.”
“코온… 샐러드 먹을 거예요. 점심으로.”
눈알을 굴리던 백야가 대충 생각나는 단어를 덧붙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데 대환은 오죽할까 싶었다.
“마, 맛있겠죠?”
“…….”
무표정한 대환의 얼굴에 백야는 도망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상대는 오랜 연예계 생활로 눈치가 빠삭한 자였다. 그는 이미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너희 콘서트 하는구나?”
“헉.”
“축하해. 초대해 줄 거지?”
대환이 피식 웃으며 백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딱 보면 알지. 방금 팀장님이랑 얘기하고 있었잖아. 그리고 우리 팀에도 너 같은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
지금은 열심히 군대 흙바닥을 구르고 계신 분이라며 시윤을 언급했다.
“그런데 아직 비밀인가 보네.”
“네! 아직 저밖에 몰라요.”
“그럼 나한테 들켰으니까 너 이제 큰일 난 거네?”
신이 나 재잘거리던 백야가 당황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왜요? 말씀하실 거예요?”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그렇게 납치되어 온 곳은 A&R 팀 전체가 모여 있는 대회의실이었다. 조금 전 헤어진 2팀 팀장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뭐야? 왜 둘이 같이 들어와?”
“오다가 카페에서 주웠어요.”
웬 복숭아가 굴러오길래 집어 왔다는 그는 쭈뼛거리는 백야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형, 저는 왜…. 전 연습실로 가 볼게요.”
“괜찮죠? 얘도 관계자는 맞으니까.”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낄 자리도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A&R 팀 직원들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관계자요?”
“너희 타이틀곡 정하는 자리거든, 여기.”
“네?!”
백야가 놀란 마음에 소리쳤다.
A&R 팀은 소속 아티스트별로 팀이 나눠져 있었는데, 팀원들은 각자의 그룹에 어울릴 만한 노래들을 선별하고, 곡이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에임처럼 연차가 어느 정도 쌓인 그룹은 회의에 참여해 의견을 내기도 하지만, 데이즈처럼 연차가 낮은 경우에는 발언권이 없었다.
“그런데 형은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낸 곡도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래서.”
하이틴이 역대급 성적을 거두며 신드롬을 일으킨 지금. 차기 곡은 무조건 좋아야 한다는 애원에 대환은 하는 수 없이 곡을 내놨다고 했다.
그러나 곡을 뜯긴 사람치고는 입가에 걸린 미소가 상당히 여유로웠다.
이에 팀장이 발끈하며 받아쳤다.
“야, 무슨 소리야. 새벽에 자는 사람 깨워서 ‘이 곡 어떠냐’고 설레게 할 땐 언제고.”
“전 그냥 물어만 봤잖아요. 준다고는 안 했는데?”
“네가 데이즈도 이런 컨셉 해보면 좋겠다며.”
데이즈가 데뷔하기 전까진 에임을 담당했다는 그녀는 대환과 무척 가까워 보였다.
“장난이에요. 대신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진행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대환은 블라인드 선정을 요구했다.
블라인드 선정이란, 작곡가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채 오로지 음악만을 듣고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투표에서 떨어지면 겸허한 마음으로 결과를 받아들이고 곡을 폐기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다른 그룹에는 곡을 넘길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데이즈 앨범 타이틀곡 블라인드 선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최종 후보에 오른 곡은 총 세 곡.
순서는 알 수 없지만 대환의 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첫 번째 후보곡입니다.”
록 사운드가 가미된 하드코어 힙합 장르의 곡으로 강렬한 멜로디가 귀를 사로잡았다.
듣고 있자니 제 안의 파괴 본능이 꿈틀거리는 게, 언젠가 다크한 컨셉을 해 보고 싶다던 유연의 말을 생각나게 했다.
“두 번째 곡입니다.”
이번에는 리드미컬한 베이스가 돋보이는 힙합 장르로 독특한 사운드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의 곡이었다.
대체로 회사에서 생각하는 다음 컨셉은 어두운 쪽인 것 같았다.
‘다 좋은데?’
해 보지 못한 장르의 음악이라 그런지 신선하게 다가왔다.
백야는 개중에서도 대환이 쓴 곡이 무엇인지 가장 궁금했다. 곡이 바뀔 때마다 슬쩍 표정을 살폈지만 그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세 번째 곡입니다.”
이어서 공개된 마지막 곡.
전통 악기 사운드로 시작되는 독특한 인트로는 순식간에 귀를 사로잡았다.
앞의 두 곡과 마찬가지로 장르는 힙합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동양적인 색채가 물씬 풍겨 인상적이었다.
‘되게 특이하네.’
A&R 팀 직원들은 고개를 주억이며 각자의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세 곡 다 좋았던 백야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얄궂은 이모티콘과 함께 상태창이 나타났다.
[따라란~! ⸜(*ˊᗜˋ*)⸝
탑텐 귀가 순위를 분석 중이에요.]
‘…탑텐 귀?’
생각해 보니 저런 이름의 스킬을 장착해 놨던 것도 같았다.
‘음악 차트 TOP 10위 안에 들어가는 곡에만 반응한다고 했던가.’
갑자기 떠오른 상태창은 머지않아 팡파르를 터뜨리며 꽃가루를 날려 주었다.
[TOP 1위 예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