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왜 한숨이야. 힘들어?”
유연이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최근 데이즈는 본격적인 연말 무대 준비에 돌입했다.
하이틴 신드롬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올해는 작년보다 더 바빠질 예정이라 조금 서두르게 됐다.
“연습 시작도 안 했는데 힘들 게 뭐가 있어. 그리고 컴백하려면 체력도 더 길러야, 헙.”
백야가 눈을 홉뜨며 입을 가렸다. 누가 봐도 말실수를 한 얼굴이라 유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컴백?”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백야가 고개를 도리질 치며 어색하게 뒷걸음질 쳤다.
‘나 거짓말했어요!’라고 온몸으로 티를 내는 개복치에 멤버들이 그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왜, 왜 이래…. 저리 비켜. 나 햄버거 먹을 거야.”
백야가 유연과 민성의 틈 사이를 파고들어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뒤에서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는 손길에 백야의 시야가 빙글 돌았다.
눈앞에는 귀신보다 무서운 조용한 또라이가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A&R 팀 회의 들어갔었지. 거기서 뭐 했어?”
“그, 그건 그냥 대환이 형이 막무가내로 데려간 거라….”
눈을 맞추지 못하고 피하는 모습에 지한은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거기서 뭐 했냐고.”
“히끅.”
겁먹은 백야가 딸꾹질을 했다.
그를 본 남경이 중재에 나섰다.
바람난 애인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애를 너무 몰아붙이는 것 아니냐 하자 대열이 느슨해졌다.
그사이 얼른 도망쳐 나온 백야는 덕진의 뒤로 몸을 숨겼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위아래로 마구 흔들렸다.
“맞아! 사람을 막 협박하고…. 내가 다 말해 주려고 했는데.”
사실 끝까지 모른척할 생각이었다.
“그럼 말해 봐. 뭔데. 뭘 듣고 저러는 거야.”
유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더 이상 뜸을 들였다간 돌을 맞을 것 같았던 백야는 비밀이라며 신신당부한 끝에 입을 열었다.
“우리 다음 컴백 후보곡 데모 버전 듣고 왔어.”
“진짜?!”
“노래 좋아?”
예상한 반응이었다.
대충이라도 좋으니 생각나는 멜로디가 있으면 불러 보라는 요청에 백야가 기억을 더듬었다.
“음…. 대충 뚱 땅 뚱 화아~”
싸늘했다.
입술을 앙다문 청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보였다. ‘망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안 망했거든? 노래 엄청 좋아.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그래, 뭐…. 어련히 알아서 좋은 곡 골라 주셨겠지.”
민성이 애써 분위기를 수습했다.
“나도 들어 보고 싶다.”
유연은 자신도 후보곡을 들어 보고 싶다며 백야를 부러워했다.
“당백이도 들었으면 조만간 알려 주시겠네~ 오케이. 그때 가서 놀란 척하면 되는 거지?”
자기만 믿으라며 율무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이제 밥 먹어!”
청이 바닥으로 햄버거를 펼치며 식사를 챙겼다.
둥글게 모여 앉은 데이즈는 각자 예상하는 컴백 시기를 얘기하며 대화를 이어 갔는데. 생각해 보니 백야가 멤버들에게 말하지 못한 한 가지의 비밀이 더 남아 있었다.
‘이것까지 말해 줘야겠지?’
잠시 고민하던 백야는 그냥 숨기는 것 없이 모두 털어놓기로 했다.
팀장님께는 죄송하지만 기쁜 소식을 하루라도 더 빨리 멤버들이 알아줬으면 했다.
“아, 그리고 우리 콘서트 할 거래.”
툭-
지한이 들고 있던 햄버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응들이 왜 이래?”
이번에는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자신이 실수한 건가 싶은 백야는 우물쭈물하며 멤버들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굳어 버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다들 그런 이유로 반응이 없는 거였으나 백야는 이를 오해하고 말았다.
‘당연히 나처럼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때 민성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넌… 그런 말을 무슨 케첩 짜면서 하니?”
그 순간 벌떡 일어난 율무와 청이 정적을 깼다.
“와아악!”
“Oh shit!”
두 사람은 괴성을 지르며 연습실을 뛰어다녔다. 늦게 터져 나온 만큼 격렬한 반응이었다.
유연은 백야의 어깨를 쥐면서 정말이냐며 재차 확인했다.
“진짜? 우리 진짜 콘서트 한대?”
“응. A&R 팀장님이 말해 주셨, 끄악!”
유연이 백야의 어깨를 흔들며 환호하자 개복치가 팔랑거렸다.
지한은 넋이 나간 듯 여전히 말없이 앉아 있었고, 민성은 남경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백야의 귀에 들어갈 정도라면 분명 그도 알고 있는 게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아니, 쟤가 저걸 어떻게….”
민성의 예상이 맞았는지 두 매니저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형. 진짜야?”
“어? 아니, 그게….”
허탈한 웃음을 지은 남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까지 확정되면 알려 주려 했는데 백야가 선수 쳤네.”
남경의 확답에 민성이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다.
“미리 축하한다. 너희 앞으로 더 바빠질 텐데 어떡하냐.”
이젠 잠도 하루에 2시간 밖에 못 잘지도 모른다고 농담하자, 민성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 안 자도 돼. 지금 잠이 대수야? 우리 콘서트라는데….”
기어이 눈물이 터진 민성이 소매를 들어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옆 사람이 울면 따라 우는 습성을 가진 개복치는 턱에 호두를 만들며 울먹거렸다.
“형, 울지 마아…. 왜 울고 그래. 좋은 소식인데….”
“너무 좋아서. 푸흐흐.”
민성이 울면서 웃자 백야도 기어이 따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혀엉….”
“백야야….”
쪼꼬미즈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 * *
제주도 서귀포시.
명절 연휴를 맞아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오게 된 복쑹은 한 귤 카페에 입장했다.
원래는 SNS에서 핫하다는 카페를 가려고 했으나, 가는 곳마다 만석이라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곳이었다.
“아빠는 시원한 거.”
“나는 아아.”
“아들~ 엄마도 아이스커피.”
“왜 다 나한테 말해?”
이 집의 머슴이자 복쑹의 30초 남동생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야, 올 때 와이파이 비번도.”
빨리 다녀오라는 재촉에 동생은 구시렁거리며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랑 감귤 에이드 두 잔 주세요.”
“자리에 앉아 계시면 가져다드릴게요.”
다른 알바는 보이지 않았고 고운 인상의 사장님 부부만 보였다.
자리로 돌아가자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리던 복쑹이 손을 내밀었다. 제주도까지 와서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겠다고 저러는 게 동생의 눈에는 마냥 한심해 보였다.
“야, 와이파이.”
“감사.”
와이파이를 연결하자 검은 화면이었던 실시간 스트리밍이 재생됐다.
[단체 : 생방송 쇼 플레이리스트!]
[백야 : 안녕하세요~ 플레이리스트 MC 백야.]
[단아 : 단아입니다.]
백야는 추석을 맞이해 분홍색 한복을 입고 나타났다. 거기에 구슬 끈이 달린 갓까지.
갓기 그 자체였다.
“돌았다. 졸라 귀여워.”
음악방송 MC가 이래서 좋았다.
명절마다 한복 입혀 줘, 핼러윈 데이 때 코스프레 해 줘, 크리스마스 때 캐럴 무대 만들어 줘.
모든 아이돌 팬들이 바라는 최고의 프로그램이 아닐까.
“얘가 네가 좋아하는 애야? 귀엽게 생겼네.”
“그치! 완전 귀엽지?”
“엄마, 쟤가 좋아하는 애랑 내 친구랑 한 팀이다? 내 친구도 가수야. 엄청 유명해!”
두 쌍둥이가 자신의 최애와 친구를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백야 : 드디어 민족의 대명절 추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단아 씨. 단아 씨는 보름달에 빌 소원 정하셨어요?]
[단아 : 네, 그럼요. 저는 많이 먹어도 살 안 찌게 해 달라고 빌 거예요. 백야 씨는요?]
[백야 : 음~ 저는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할 거예요.]
어쩜 마음씨도 이렇게 고운지. 천사가 따로 없었다.
[단아 : 뭐야~ 백야 씨가 그렇게 말하면 제가 조금 이상하잖아요. 잊어 주세요. 저 소원 다시 말할래요.]
그러자 갓을 쓴 백야가 진지한 표정으로 준비된 멘트를 했다.
[백야 : 한번 뱉은 말을 다시 담다니요. 송구하오나 잊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딱복 백야였다. 앙다문 입술이 제법 단호했으나 귀 끝이 빨갰다.
[단아 : 정말 너무하십니다. 어찌 소녀의 청을 그리 단번에 내치실 수 있습니까?]
물론 오그라드는 대사는 백야에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단아가 토라진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당황한 복숭아가 단아의 한복 소매를 잡아당기며 낑낑거렸다.
[단아 : 소녀를 놀리신 거지요?]
[백야 :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단아 : 그럼 다음 무대는 소녀가 직접 소개하게 해 주십시오.]
[백야 : 물론이죠! 아니, 물론이오.]
대사를 절은 백야는 웃음을 참느라 카메라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런 최애를 보며 행복해하는 사이, 음료를 트레이에 담은 남자 사장님이 다가왔다.
복쑹의 아버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어유~ 사장님, 카페가 너무 멋집니다. 밖에 감귤밭도 있던데 직접 키우시는 거예요?”
“네. 겨울에는 감귤 체험 농장도 하고 있어요.”
“여보, 우리도 은퇴하고 제주도 내려와서 카페 할까?”
“돈 없어.”
복쑹의 어머니는 단호했다.
“가족 여행 오셨나 봐요.”
“예. 애들 다 키우고 20년 만에 제주도 와 봤습니다. 하하하!”
“이럴 때가 제일 좋죠. 저희 애들은 다 서울에 있어서 못 본 지 꽤 됐네요.”
쌍둥이들을 보며 미소 짓던 사장님은 태블릿에 집중한 복쑹을 발견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마침 백야가 이번 주 1위 후보를 보여 달라며 손짓하는 장면이 비쳤다.
“어?”
그러다 발견했다.
카메라를 향해 잔망을 떨고 있는 자신의 아들과 똑 닮은 남자를.
복쑹의 아버지는 딸이 조금 부끄러웠는지 애써 변명했다.
“큰애가 데슨지 뭔지 연예인을 좋아하는데, 걔가 나와서 그거 본다고 저러고 있는 거예요.”
“아빠! 데이즈라고, 데이즈.”
복쑹이 발끈하며 고개를 들자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화면 속 남자를 가리켰다.
“그 친구가 유명한가요?”
“네. 완전 유명한데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울 복숭아 모르면 간첩인데.”
“…복숭아?”
“아, 이름 아니고 별명이에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사장님은 미소를 머금으며 기어이 망발을 내뱉었다.
“신기하네요. 저희 집 막내랑 많이 닮았어요.”
“네?”
“거기 분홍색 한복 입은 복숭아 분이요.”
“아…. 예….”
복쑹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중년치고 아저씨의 미모가 꽤 귀염상이긴 했지만 백야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라는 말로 가볍게 인사한 사장님은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생의 눈에는 복쑹이 좋아하는 멤버랑 저 아저씨가 닮아 보이는데 그녀는 아무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