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209화 (209/340)

제209화

자리로 돌아온 사장님은 곧장 부인에게 다가갔다.

“저 테이블에 케이크라도 하나 드려야겠어요. 저기 따님께서 우리 백야 팬이시래요.”

“어머. 정말요?”

백야의 누나를 쏙 빼닮은 여성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음악방송 같은 걸 보고 계시던데. 백야 활동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게요…. 분명 미국 공연이 마지막이라고 들었는데.”

백야의 부모님은 아들의 연예계 활동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방송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토요일에 하는 음악방송이…. 아, 찾았어요. 쇼 플레이리스트.”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자 동영상 썸네일 아래로 백야와 단아의 포스터 사진이 함께 보였다.

“우리 백야인데요?”

“그러게요…. 그런데 왜 말을 안 해 줬을까?”

두 사람은 의아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전화를 걸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귀염둥이 막내인데. 이렇게까지 숨기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 * *

그러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으아악!”

“왜! 무슨 일인데!”

“혀엉…. 저 어떡해요? 부모님께서 다 아셨대요. 망했어. 난 틀렸어.”

음악방송 MC가 됐다는 사실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백야는 다 망했다며 대기실 소파에 철퍼덕 엎드렸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또 뭐라고. 아니, 그걸 왜 아직까지 말씀 안 드렸대? 난 그게 더 놀라운데?”

아들이 매주 방송에 나온다 그러면 누구보다 기뻐하셨을 텐데. 남경은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형은 부모님 앞에서 동물 머리띠 끼고 ‘햄찌 펀치!’ 이러면서 재롱부릴 수 있어요? 오늘처럼 막 장난감 칼 들고 무사 흉내 내고…. 내가… 내가 나이가 몇인데.”

“어우, 난 절대 못 하지. 생각하니까 좀 끔찍하긴 하다.”

“거봐요!”

소파에 길게 엎드린 백야가 두 발을 파닥거렸다.

먼저 한복을 갈아입고 나온 단아가 백야의 심통 난 얼굴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왜 그래?”

“…누나는 부모님께 음악방송 MC 하는 거 말씀드렸어요?”

단아는 백야보다 사정이 나쁘면 나빴지, 좋지는 않았다.

“아니, 몰라. 그래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네?”

“MC가 뭐니? 배우 활동하고 있는 줄도 모르실 텐데. 다음 주에 나 가발 쓰고 나타날지도 몰라.”

헤어스타일이 바뀌어 있으면 머리를 박박 밀려 가발을 쓴 건 줄 알라며 씁쓸하게 말했다.

백야는 그제야 자신의 투정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였는지 깨달았다.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한복 갈아입고 올게요….”

* * *

- 이거 뭐야? 나만 이제 봤어?? (데이즈 헤븐 플레이버7 CF 동영상)

└ 어디 구석기 시대에서 왔어?

└ 1일 되자마자 떠서 짹 난리 났었는데...

└ 뜬 지 한 3일 됨

- 핑크 스푼 받아왔다♡

- 민초 갤러리에서 민성이 보고 대장님이라고 부른다는 거 진짜냐고ㅋㅋㅋㅋㅋ

└ 거기 지금 민초 메이저 되는 거 아니냐고 이미 축제임ㅋㅋㅋ

추석을 겨냥한 헤븐 플레이버7의 마케팅 전략은 완벽하게 통했다.

인기 아이돌인 데이즈를 전면에 세웠으니 당연한 게 아니냐고 하기엔 매출 상승률이 어마어마했다.

매출 30% 성장.

그동안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헤븐 플레이버7을 거쳐 갔지만, 이 정도의 반응은 처음이라 본사도 당황한 것 같았다.

특히 광고 마지막에 쿠키 영상처럼 나온 ‘말랑 아이스’는 물량 부족으로 예약 주문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 찹쌀떡같이 생긴 게 찹쌀떡 아이스크림 먹는 것 좀 보세요 (말랑 아이스 먹는 백야.gif)

추석 기념 유앱에서 말랑 아이스를 먹으며 ‘맛있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파급력은 대단했다.

- ☆말랑 아이스 구해요☆

- 말랑 아이스 실트ㅋㅋㅋㅋ

- 말랑 아이스 먹어본 사람..?

└ 존재하는 음식이긴 한 거야?

└ 오픈런 해도 못 삼ㅠㅠ

- 말랑 아이스 사러 갔다가 없어서 하프갤런 사서 나온 1인...

- 나도 드디어 복숭아가 먹은 말랑 아이스♥ (제품 인증샷.jpg)

- 헤플7 데이즈로 모델 바뀌고 매출 30% 뛰었대ㅋㅋㅋㅋ

물론 기록적인 성장률에는 데이즈 팬 사인회라는 탐스러운 미끼가 걸려 있었다.

- 헤플 팬싸 당첨 소취ㅜㅜ

- 약속 있을 때마다 카페 대신 헤플 갔더니 나 아이스크림에 미친 사람 됨...

- ㅁㅊ 헤플 팬싸 당첨 명단 뜸

└ 광탈이요....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제발 계약을 연장해 주십사 광고주 측에서 허리를 굽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홍보 캠페인의 일환이었던 핑크 스푼 CF와 달리 이번에는 정식 겨울 광고를 촬영하게 됐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Q. 내가 접수한다 : 시작이 반!

대세 중의 대세만 찍는다는 CF를 모두 섭렵해 광고계를 접수해 봅시다!

- 통신사 (0/1)

- 식품 (1/1)

- 아웃도어 (0/1)

- 화장품 (0/1)

- 모바일 게임 (0/1)

※ 실패 시 패시브 강화]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른 상태창이었다.

무려 광고를 다섯 개나 찍어야 하는 퀘스트에 백야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장난해? 광고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노력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데, 이번 건 스킬 뽑기만큼이나 운발을 필요로 했다. 그나마 시간제한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뭐 해? 주먹을 그렇게 움켜쥐고.”

“어?”

“왜. 율무 형 한 대 패려고?”

공교롭게도 백야의 맞은편 방향에는 율무가 서 있었다. 그는 스태프들 틈에서 아이스크림 모형의 트리 장식을 구경 중이었다.

“아니었는데, 그거도 나쁘진 않을지도.”

“푸흡.”

“우리도 가 보자.”

따라 웃은 백야가 유연의 팔을 툭 건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 당백아, 유연아~ 이것 좀 봐. 진짜 아이스크림 같지.”

커다란 트리 장식 볼을 머리 위로 올린 율무가 해사하게 웃었다.

“너희 저기 트리도 봤어? 엄청 커~”

율무가 스튜디오 가운데를 가리켰다. 크로마키 배경의 초록색 벽 앞에는 5m 길이의 대형 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우와.”

“엄청 큰데?”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하자, 신이 난 율무가 두 사람을 데리고 이동했다.

의상을 갈아입고 합류한 멤버들도 어느새 트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 오셨네요.”

잠시 후, 웃으며 다가온 감독은 오늘의 촬영 콘셉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뒤에 초록색 배경은 무시하셔도 되고요. 지금은 겨울이고 여기는 하얀 눈밭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촬영이 시작되면 인공 눈을 뿌려 주겠다는 걸 보니 배경은 CG 처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여러분은 저랑 촬영을 하는 동안 아이스크림 요정이 되는 거예요.”

준비된 장식을 트리에 예쁘게 달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모형을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어 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한 분은 키가 작으시니까 저기 사다리에 올라가서 위쪽에 장식을 달면 될 것 같아요.”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말에 모두 백야를 바라봤다.

“…저요?”

“네. 백야 씨 고소 공포증 같은 건 없으시죠?”

“네. 없어요.”

그렇게 작은 키도 아닌데 멤버들이 너무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난쟁이처럼 느껴졌다.

씨이….

“푸흡.”

“누구냐…. 읏지 므르.”

웃음을 참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뜬 백야가 옆을 흘겨봤다.

“그럼 위치 한번 잡아 볼게요.”

화이트 톤의 의상을 맞춰 입은 멤버들이 각자의 위치를 찾아갔다. 백야도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사다리 꼭대기로 올라갔다.

“지한 씨, 뒤에 사다리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 주시고요.”

“네.”

“그럼 트리에 눈이 좀 쌓이면 촬영 시작할게요.”

조설기가 가동되자 스튜디오 안으로 인공 눈이 내렸다.

“레디, 액션!”

큐 사인이 떨어지자 멤버들은 사전에 맞춰 본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민성과 청은 아이스크림 공을 굴리며 눈사람을 만드는 척했고, 율무와 지한, 유연은 트리 아래서 아이스크림 모양의 볼 장식을 달았다.

사다리 위에 앉아 있던 백야는 감독의 사인에 맞춰 눈이 쌓인 나뭇가지를 툭 건드렸다.

후드득-

눈 뭉치가 지한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멤버들도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백야 씨, 이제 별 꽂아 주세요~”

아래를 보며 까르르 웃던 백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별 장식을 달 차례였다.

끙차.

사다리에서 일어나자 멤버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안전장치 겸 와이어를 달았다고는 하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한백야, 조심해.”

미소로 대답한 백야가 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꼭대기에 커다란 별 장식을 꽂자 감독님의 컷 사인이 들려왔다.

“굿! 백야 씨만 각도 바꿔서 클로즈업 갈게요. 다른 분들은 이제 쉬셔도 됩니다.”

사다리에 선 백야가 힘겹게 별 장식을 회수했다. 그 모습이 불안해 보였던 멤버들은 쉬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대기실로 가 계시면 차례 때 부를게요.”

감독 나름대로의 배려였지만 멤버들에겐 축객령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남경 또한 어서 나오라며 손짓하자 멤버들은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백야 씨, 이어서 들어갈게요.”

“네!”

큐 사인과 함께 백야가 다시 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별 장식을 꽂으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 감독의 모니터에 보였다.

“오케이, 굿! 너무 좋아요.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내려오세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최종 컷 사인이 들려왔다.

백야가 내려가려 하자 다가온 스태프가 사다리를 잡아 주었다.

“눈이 녹아서 바닥이 미끄럽거든요? 제가 잡아드릴 테니까 천천히 내려오세요.”

“감사합니다.”

백야는 한 칸 한 칸 신중히 다리를 밟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순간 상태창이 나타났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경고!]

[사다리 주의!]

작년 시상식 때였나. 비슷한 알림을 받고 계단에서 넘어진 기억이 났다.

설마….

‘요즘 들어 평화롭더라니.’

한시 빨리 사다리를 벗어나야 했다.

엄습하는 불길함에 백야가 걸음을 재촉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직 반도 못 내려온 높이에 마음이 더 급해졌다.

“백야 씨, 천천히 내려오셔도 돼요!”

“네.”

대답만 그러겠다고 한 백야는 여전히 초조했다. 한 걸음에 한 번씩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목도리가 풀리고 있는 줄도 모를 만큼.

툭-

한 번 더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목도리가 스태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목도리가 시야를 가리자, 줄곧 사다리를 잡고 있던 스태프의 손이 잠깐 떼어졌다.

같은 타이밍에 백야의 발도 한 칸 아래를 디뎠다.

덜그럭-

그 순간 사다리가 살짝 미끄러지며 백야가 중심을 잃었다.

“끄악!”

“백야 씨!”

사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며 백야가 아래로 추락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