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하나씩 눌러 봤지만 연기 스킬은 없었다. 그러나 쉽게 물러날 개복치가 아니었다.
‘10번 더!’
백야에게는 아직 163점의 스타 포인트가 남아 있었다.
[스킬 획득!]
[<가면 가왕(C)>, <머리만 닿으면 기절(C)>, <동굴 저음(C)>, <걸그룹 각선미(C)>, <이거 무슨 냄새야?(C)>, …….]
‘이런 C!’
C등급 스킬이 또 한 번 무더기로 떴다.
사실 지금 장착 중인 스킬이 D등급이니까 이 중에서 하나만 나와 줘도 성공인 셈인데, 그 하나가 뜨질 않고 있었다.
‘너무해….’
백야의 입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그러나 상남자 개복치는 이번에도 10회… 가 아닌 5회를 돌렸다. 거듭된 실패에 조금 소심해졌다.
[스킬 획득!]
[<강철 모발(B)>, <방청객 리액션(C)>, <또르르(C)>, <풋풋하다 풋풋해(C)>, <아 진짜요?(D)>]
시스템도 양심은 있는지 포인트를 25점이나 쓰고 나서야 B등급 스킬을 뱉어 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기와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강철 모발(B)>
: 튼튼하고 건강한 모발로 탈색에도 끄떡없다.
오?
그래도 조금 솔깃하는 능력이었다. 탈색은 아이돌의 숙명이 아니던가.
마침 업데이트 오류 보상으로 받았던 스킬 슬롯 2칸 중 한 칸이 남아 있기도 했으니 <강철 모발(B)>은 잠시 보류해 두기로 했다.
<방청객 리액션(C)>
: 생생한 리액션으로 상대의 호감을 산다.
예능감이라곤 쥐뿔도 없지만 지금까지 리액션 하나로 버텨 온 백야였다. 생존 리액션은 이미 S급이나 다름없으므로 이 능력은 탈락이었다.
다음!
<또르르(C)>
: 원하는 순간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 있다.
마침내 연기 스킬을 마주했다. 심지어 난이도가 높은 눈물 연기를 가능하게 하는 스킬이었다.
‘세상에!’
입을 틀어막은 백야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뻐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포인트를 25점이나 쏟아부은 보람이 있는지 연속해서 연기 스킬이 나왔다.
<풋풋하다 풋풋해(C)>
: 기본 연기 실력은 갖춰진 상태로 풋풋함이 넘쳐난다.
‘됐다!’
신이 난 백야가 발을 동동거리자 유연이 이상한 사람을 본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넌 웃음이 나오냐? 좋아?”
지한과 유연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백야만 좋아하고 있었다.
“어! 난 자신 있어.”
“와…. 하이틴 웹드라마는 이제 생각도 안 나나 보네. 셔틀 선언하면서 NG 내던 거 잊으셨나 봐요.”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 봐, 날씨도 너무 좋잖아. 연기하기 딱 좋은 날이네.”
창문을 내리자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우중충하니 날씨가 흐린 게 뱀파이어 컨셉을 촬영하기에 제격이었다.
“숙소에서 혼자 연기 연습이라도 했냐?”
“그랬을 수도 있지~”
창틀에 팔을 걸쳐 기댄 백야는 바람을 느끼며 남은 스킬을 확인했다.
<아 진짜요?(D)>
: 동태 눈깔을 가려 준다.
아 진짜?
등급만큼이나 쓸모없는 스킬은 빠르게 패스했다.
그렇게 장착 단계로 넘어온 백야는 찜해 둔 세 가지 스킬 중 두 개만 고르면 됐다.
‘연기 스킬 하나랑 <강철 모발(B)>을 하면 되지 않을까?’
두피가 소중했던 백야는 <강철 모발(B)>이 욕심났다.
그러나 ‘확인’을 누르기 직전, 자신이 왜 죽기 살기로 연기 스킬을 뽑으려 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3달 안에 드라마 캐스팅. 실패 시 죽음뿐.’
이제 보니 3달 시한부 선고였다.
자칫 사사로운 욕심에 눈이 멀어 대의를 그르칠 뻔했다.
두피보다 목숨이 소중한 백야는 정신을 차리고 연기 스킬에 올인했다.
* * *
[데이즈 둘 셋 투어 : 샌프란시스코 VLOG Part.5]
푸른 잔디가 넓게 펼쳐진 공원.
율무를 방패 삼아 숨은 백야와 웬 강아지 한 마리가 대치 중인 썸네일이었다.
‘분명 하나만 보려고 했는데.’
백야의 반딧불 직캠으로 시작된 영상은 또 한 명의 나잉이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 남자…. 더 알고 싶다.’
사실 썸네일 속 니트 백야에 이끌려 시작했으나, 보면 볼수록 청순하게 생긴 얼굴에 눈길이 갔다.
‘심지어 이름도 유연.’
리얼리티와 데뷔 초에 찍은 브이로그, 돈 냄새 팍팍 나는 자컨을 지나, 어느새 공식 계정의 마지막 영상까지 와 버린 뉴비 나잉이었다.
원래 최애는 취향이랑 별개로 멱살 잡고 끌려가는 거라지 않던가. 뉴나잉은 유연에게 멱살을 잡혀 버렸다.
[DASE in San Francisco]
벌써 다섯 번째 보는 인트로 영상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웠다.
[민성 :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저희는 오늘 곰돌이를 데리러 갈 거예요. 해피.]
해피는 청이의 반려견으로 첫날에 사고를 치는 바람에 호텔에 격리된 친구라고 했다.
[민성 : 해피 진짜 크거든요. 백야보다 컸던 거 같아요.]
[백야 : 내가 더 크거든!?]
[민성 : 뭐야. 귀가 왜 저렇게 밝아?]
[백야 : 다 들려!]
[민성 : 와… 소름. 저 지금 거실이거든요? 백야는 부엌에 있고.]
자기 이야기는 귀신같이 알아듣는다며 민성이 신기해했다. 그리곤 소리를 따라 부엌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유연과 백야, 율무가 어머님께서 싸 주신 음식들을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민성 : 여기서 그게 들려?]
[율무 : 그럼~ 형 발성이 좋아서 다 들리지.]
[백야 : 자기 혼자 키 컸다 이거지? 이 배신자!]
백야가 눈을 부릅뜨며 민성을 노려봤다.
[민성 : 그… 우유를 좀 더 마셔 봐.]
아무래도 자신의 성장 비결은 모닝 시리얼인 것 같다며 비법을 전수해 주자 햄스터의 공격력이 줄어들었다.
[유연 : 지금보다 더? 그러다 너 피 대신 우유 나온다.]
[율무 : 푸하하!]
카메라가 흔들리는 걸 보니 민성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부모님의 배웅을 받은 데이즈는 해피가 있는 애견 호텔로 향했다.
[청 : 해피이이! 데리러 왔어!]
청의 영어에 화면 아래로 자막이 깔렸다.
햄스터 인형을 문 해피가 뽀송뽀송한 털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함께 물놀이를 다녀왔는지 인형이 물에 쫄딱 젖어 있었다.
[청 : 잘 놀고 있었어? 해피 물놀이했구나! 좋은 냄새 나.]
무릎을 굽혀 앉은 청이 해피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해피도 냄새를 맡는 듯 코를 킁킁거렸다.
[청 :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못 본 사이에 더 잘생겨졌는데?]
[해피 : Woof!]
청의 말을 알아들은 듯 해피가 우렁차게 짖었다. 살랑살랑 움직이던 꼬리도 더 빠르게 흔들렸다.
[청 : 우리 다 같이 놀러 가자! 가서 내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도 먹고 원반 놀이도 해. 너도 좋지?]
목줄을 찬 해피는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호텔을 나섰다.
[율무 : 해피야~ 그 인형이 좋아?]
[해피 : Woof!]
청과 해피를 데리러 갔던 율무는 주둥이에 물려 있는 햄스터 인형을 보며 밝게 웃었다.
[율무 : 차에 가면 그 인형이랑 똑같이 생긴 형아가 있는데, 그 형아는 물면 안 돼~]
해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율무 : 한국어라 못 알아듣나? 청아 통역.]
[청 : 해피, 백야는 먹는 거 아니야. 지난번처럼 달려들면 안 돼. 알지?]
해피의 검은색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민성 : 오, 곰돌이~ 좀 탄 것 같은데?]
[지한 : 원래 검은색이잖아.]
차 안에서 해피를 기다리던 멤버들도 두 사람이 돌아오자 밖으로 나왔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백야만 창문을 내려 해피를 맞이했다.
[유연 : 안 문다니까?]
[백야 : 아니야. 난 다리가 아파서 그래…. 그냥 여기서 보는 게 좋아.]
거짓말을 할 거면 겁먹은 얼굴이나 좀 풀던가. 유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한이 트렁크를 열어 주자 해피가 폴짝 뛰어올랐다. 똑똑한 강아지는 자신의 자리를 아는 듯했다.
[청 : Good boy. 이제 진짜 출발이야!]
트렁크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한 청이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백야 : 근데 쟤 앞으로 넘어오면 어떡해?]
[청 : No. 해피 운전할 때는 안 움직여.]
원래 조수석은 민성의 자리였으나, 뒷자리는 해피와 거리가 가까워 특별히 바꿔 앉았다.
[청 : 해피한테 간식 주면서 친해져!]
[백야 : 아니야. 나는 그냥 너희 노는 거 구경할래.]
[청 : 왜? 해피 백야 좋아해.]
[백야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해피야? 해피냐고.]
[청 : 당근 하지! 나는 형이니까 다 알아.]
백야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유연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해피가 보였다.
[유연 : 야, 잠깐만 줘 봐.]
[지한 : 하지 마. 인형 뺏는 줄 알고 경계하잖아.]
[유연 : 아니, 나는 스티커 떼 주려고 그러지.]
해피와 유연의 기 싸움을 본 백야는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저러다 유연이 잡아먹히진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돌로레스 파크.
경사진 언덕을 오르니 푸른 잔디와 동상,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이 보였다.
[민성 : 날씨 좋~ 다. 사람도 별로 없고.]
[지한 : 저기 나무 아래로 가자.]
돗자리를 든 지한이 앞장서서 걸었다. 피크닉 바구니를 든 유연도 뒤를 따랐다.
한쪽에서는 해피보다 작은 강아지가 원반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해피도 놀고 싶은지 자꾸 그쪽으로 가려 해서 청이 목줄을 꽉 쥐었다.
[청 : Nonono. 해피, 저거 우리 거 아니야. 우리는 저기 가서 해.]
장난감을 보여 주며 관심을 유도한 청이 능숙하게 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청 : 저기 가서 간식 먹고 하는 거야. 알겠지?]
[해피 : Woof!]
금세 얌전해진 해피는 청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행렬의 제일 마지막에 선 율무와 백야. 두 사람은 해피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이동 중이었다.
[율무 : 당백아 우리 계속 이렇게 걸을 거야? 강아지 무서워?]
[백야 : 아니, 안 무서운데 저렇게 큰 개는 조금….]
[율무 : 그게 무서운 거 아니야?]
[백야 : 아니라니까 그러네.]
율무의 뒤에 숨어 양팔을 움켜쥔 백야는 자신보다 큰 체구를 조종하고 있었다.
[율무 : 괜찮아~ 해피는 안 물어.]
백야는 괜찮다는 말에도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뭐지. 이 하찮음은….”
생긴 것만큼이나 겁이 많아 보이는 백야에 뉴나잉의 광대가 올라갔다.
[지한 : 청청. 얘 간식 줘도 돼?]
[청 : 응! 한 개만.]
[민성 : 야, 곰돌이. 이거 먹어. 쭈쭈쭈.]
민성이 손바닥 위로 간식을 올린 뒤 내밀자 해피가 날름 받아먹었다.
[민성 : 봤어? 봤어? 얘가 내가 주는 거 먹었어. 잘했어 곰돌이~]
[지한 : 귀엽네.]
그사이 많이 다가오긴 했지만 여전히 경계 모드인 백야를 향해 청이 고개를 돌렸다.
[청 : 백야도 할래?]
[백야 : 아니? 나 보지 마. 제발. 고개 돌려, 고개.]
네가 자신을 보면 해피도 관심을 가질 게 아니냐며 백야가 질색했다. 그러나 해피의 고개는 이미 돌아간 뒤였다.
줄곧 율무의 뒤에 숨어 있던 백야는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쉽게 발각되고 말았다.
툭-
청이 내놓으라 해도 절대 입에서 놓지 않던 햄스터 인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연 : 어? 쟤 뱉었다.]
[해피 : Woof!]
자신이 물고 있는 것보다 더 크고 좋은 걸 발견한 눈이었다.
[백야 : 오, 오지 마아….]
[해피 : Woof!]
[백야 : 나 먹는 거 아니, 끄아악!]
[청 : 해피! No!]
겁먹은 백야가 율무를 버리고 도망가자, 신이 난 해피가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