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거기 서!”
남경의 고함이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살벌한 추격전에 인파도 하나둘씩 몰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카메라를 꺼내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이 와중에도 사진을 찍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백야는 얼른 후드를 뒤집어썼다.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릴까.’
그러나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낯선 여자와 단둘이 갇혀 있던 기억 때문이었다.
여자가 저를 보며 웃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아….”
숨을 길게 내쉰 백야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차에서 조금 떨어진 담벼락 아래에 자리를 잡은 백야는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곤 곧장 덕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처가 터졌는지 붕대가 붉게 물들고 손목 전체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더럽게 아프네.’
인상을 찡그린 백야는 신호음을 들으며 덕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번호를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가, 덕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매니저 형들이 없는 방에다가 새로 바뀐 번호를 공유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멤버에게 전화를 걸기로 한 백야는 연락처를 보며 잠깐 고민했다.
‘누구한테 걸어야 덜 혼나지….’
이 와중에 잔소리는 걱정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고른 게 민성이었다.
[여보세요?]
“형, 나 백얀데….”
[알아. 왜? 우리 먹고 싶은 거 없으니까 그냥 빨리 와.]
민성이 헛다리를 짚었다.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덕진이 형 옆에 있어?”
[엉. 왜?]
“그럼 형한테 나 좀 데리러 와 줄 수 있냐고 물어봐 주면 안 돼? 전화하니까 안 받아서.”
[데리러 오라고? 남경이 형은 어쩌고?]
“그게….”
[너 형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너 지금 어디야?]
“형이랑 있긴 한데, 일이 조금 생겨서 형은 경찰서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뭐라고!?]
수화기 너머로 경악에 찬 비명이 들렸다.
* * *
익숙한 번호판의 차량이 골목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차가 멈춰 서자 문이 열리며 민성과 유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도!”
“백, 숭아야!”
이름을 부르려다 아차 싶었는지 민성이 뒤늦게 별명을 외쳤다.
“어떻게 왔어? 덕진이 형만 오는 줄 알았는데.”
백야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멤버들의 등장에 우울하던 얼굴이 조금은 생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반대였다. 피로 얼룩이 진 상의와 미처 닦지 못한 자국이 그에게 일어난 일을 짐작게 했기 때문이다.
다가온 유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다더니 이게 어딜 봐서 괜찮은 거야. 너 또 코피 흘렸냐?”
“아니야, 안 흘렸어.”
“피나 좀 닦고 거짓말하든가.”
닦는다고 닦았는데 남은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매를 끌어 내린 백야가 아닌 척 인중을 문질렀다.
“스트레스받아서 그래.”
한동안 코피를 안 흘리길래 조금 건강해졌나 싶었는데,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백야의 얼굴에는 지친 티가 역력했다.
“일단 타자. 뒤에 차 들어온다.”
민성이 등을 토닥이며 동생들을 챙겼다. 백야가 올라타자 덕진이 걱정 어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백야 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당연히 와야죠! 오는 길에 남경 매니저님이랑 통화했어요. 방금 경찰서 도착하셔서 진술하고 회사로 복귀하신대요. 어떻게 이런 일이….”
덕진이 입술을 짓씹으며 욕을 삼켰다. 그러다 백미러를 확인하곤 일단 출발하겠다며 차를 움직였다.
올 때와 달리 뒷좌석에 올라탄 민성이 물티슈를 꺼내 들었다.
“백야야, 나 봐.”
“어? 아니야, 내가 닦을게.”
“손도 다쳤다며. 그냥 있어.”
백야의 옷을 죽 잡아당긴 민성은 얼룩진 핏자국을 대충이나마 닦아 주었다.
가만히 손길을 받고 있기도 잠시. 백야가 태연하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연습 시간 아니야?”
“지금 연습이 문제냐?”
차에 올라탄 뒤로 줄곧 핸드폰을 만지던 유연이 불쑥 고개를 들며 노려봤다. 눈빛이 살벌했다.
“다 따라오겠다는 거 겨우 말리고 우리 둘만 온 거야. 자, 봐라.”
유연이 핸드폰을 내밀자 단체 메신저 방이 보였다.
[율무차 형 : 도착하면 연락 줘]
[청이 : 만났어?]
[청이 : 백야 괜찮아?]
[지한이 형 : 전화해도 돼?]
연습 중이라 조용한 건가 싶었는데 저만 뺀 단체방을 만든 모양이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아침에 율무를 놀리던 게 이렇게 돌아오나 싶었다.
“내가 일일이 답장하는 것보다 그냥 네 목소리 들려주는 게 더 빠르겠어. 전화 건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전화가 연결됐다.
[한백야. 괜찮아?]
[너 손가락 잘렸어?!]
[백야 다쳤어? 많이 아파?]
지한과 율무, 청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손가락이 잘리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괜찮아. 애들 만나서 지금 가고 있어. 걱정 끼쳐서 미안.”
세 사람은 백야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안도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봉합 수술은 또 뭐고.]
보이진 않지만 굳은 목소리가 지한의 표정을 짐작하게 했다.
“아…. 편지에 칼날이 붙어 있었는데 내가 못 봤어. 조금 깊게 베이는 바람에 네 바늘 정도 꿰맨 게 다야.”
[Fuxk.]
청이 욕을 읊조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이어서 남경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났던 일까지 모두 들려주자, 멤버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
그런 사람은 콩밥을 먹어야 한다부터 시작해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 고소를 하자, 보디가드를 고용하자까지.
저보다 더 열받아 하며 화를 내는 멤버들에 오히려 백야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와… 씨. 피가 거꾸로 솟네.”
내내 조용히 있던 민성도 이마를 짚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앞머리가 우스꽝스럽게 올라가 조금 웃긴 모습이 되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잇새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어? 넌 지금 웃음이 나오니?”
“아하하! 미안. 근데 웃긴 걸 어떡해.”
백야가 배를 잡고 웃자 유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야,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너 진짜 굿이라도 해야…. 우냐?”
“아니, 저거 좀 봐. 형 얼굴이 너무 웃기게 생겼지 않아? 아하하!”
“염병…. 너 오늘따라 웃음 포인트가 좀 이상하다?”
민성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말이라며 어이없어했다. 그러나 눈물까지 훔치며 웃는 모습에 더는 나무라지 못했다.
“그래, 웃어라, 웃어. 우는 것보다 낫다.”
피식 웃은 민성은 일부러 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주었다.
“푸흡. 아, 이게 아닌데.”
그에 결국 유연까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야? 바보야! 지금 웃는 타이밍 아니야!]
[한백야 웃음소리 같은데.]
[웃는 타이밍이야!]
[키티야… 너 편애 쩐다 진짜.]
수화기 너머도 소란스러웠다.
* * *
[데이즈 백야, 차량에 ‘무단 탑승’한 사생팬 경찰에 신고, ID 사생에 강력 법적 대응 예고]
[데이즈 백야, “도심에서 사생팬과 추격전까지” 충격]
[ID 아티스트 스토킹 피해 심각, 무선처 무합의 대응할 것]
그날 저녁, 백야의 소식으로 SNS가 떠들썩해졌다.
도로 한복판에서 그 난리를 친 데다 경찰까지 출동했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기 아이돌답게 뉴스에도 보도되어 조용히 넘어가는 것 또한 힘들게 되었다.
- 너무 소름 돋는다...
- 사생은 팬 아니라고 ㅅㅂ 기사 제목이 뭐 저따위야
- 남매가 사생 잡으러 뛰어가는 거 영상도 뜸 (동영상)
- 몰래 벤에 숨어있다가 매니저 잠깐 내렸을 때 애 덮친 거잖아. 이건 걍 범죄임. 빡돌게 하지 마
- 백야 안 그래도 겁 많은데 얼마나 놀랐을 거냐고....
- ID 사생에 얄짤없음.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
- 같은 날 편지에 커터 칼 들어있었다던데. 그냥 싹 다 잡아서 감방에 처넣어버려
└ 편지 커터 칼은 뭐예요?
└ 지인이 방송국 스태프라서 들었어요
- 병원 목격담 올라왔다가 삭제된 게 저거구나
- 유앱 할 때마다 애들 폰 계속 울리잖아. 그거 다 사생 전화
- 제발 애들 좀 건드리지 마!! 가까워지려 하지 말고 그냥 떨어져서 보라고!!!
- 얼마나 놀랐을까ㅠㅠ
- 저 정도면 진짜 트라우마 생겨도 할 말 없다... 이번 일로 팬들까지 무서워할까 봐 겁난다...
남경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사생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가해를 가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탓에 사생은 금방 귀가 조치 되었다.
평소 아티스트의 스토킹 피해가 극심한 건 알고 있지만, 소속사에서도 ‘접근 금지 요청’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백야의 제우스표 금 숟가락.
솜방망이 처벌에 분개한 매형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사생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 결과 지속적인 문자와 협박 선물. 칼날이 들어간 편지까지 동일 인물의 소행이라는 걸 알게 돼, 사생은 곧장 재검거되어 검찰에 송치됐다.
[백야야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다친 데는 없고? 엄마가 올라갈까?]
“아니야. 나 다친 데도 없고 건강해. 엄마 걱정할까 봐 전화했어.”
당연히 손가락 부상은 숨겼다.
누나라면 모를까 부모님은 SNS를 하실 줄 몰랐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면 알 방법이 없었다.
[너무 힘들면 그냥 내려와. 뒷일은 엄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지?]
그게 무슨 무책임한 소리냐 싶겠지만,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백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런데 나 하나도 안 힘들어. 재미있어.”
그때였다.
달칵-
방문이 열리며 지한이 고개를 내밀었다.
원래도 잘 놀라는 편이었는데, 지난밤 이후로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뒤를 돌아보는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미안. 놀랐어? 살살 열었는데.”
지한도 당황했는지 방문을 반만 연 채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