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미안. 충전기 좀 가져가려고…. 다음부터 노크할게.”
누가 자기 방을 들어오면서 노크를 한단 말인가. 백야가 그러지 말라며 그를 말렸다.
“알겠어.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
안도의 숨을 쉰 백야는 애써 웃으며 다시 화면을 돌아봤다.
[왜? 이제 가 봐야 해? 얼른 가.]
“아니야, 방금 지한이가 들어와서. 우리 오늘 휴가 받았어. 멤버들이랑 숙소에서 쉬려고.”
백야가 화면을 돌리자 침대 옆에서 충전기 선을 잡아 뜯고 있는 지한이 보였다.
고개를 돌렸다가 핸드폰에 제 모습이 비치는 걸 보고 그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지한이는 갈수록 더 멋있어지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죠? 백야는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
지한은 어른들을 대하는 걸 유독 어려워하면서도 곧잘 했다.
“충전기 안 뽑혀? 내 거 가져가.”
“응.”
카메라를 향해 꾸벅 인사한 지한은 백야의 충전기를 뽑아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다시 열리며 바깥의 소리가 잠시 새어 들어왔다.
“피자 왔어! 피자, 피자!”
“왜 혼자 나와? 당백이는?”
“부모님이랑 통화 중.”
선명한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로도 들린 모양이었다.
[피자 시켰어?]
“응. 청이가 먹고 싶다 그래서.”
[맛있겠네~ 엄마는 얼굴 봤으니까 됐어. 백야도 얼른 가서 먹어.]
“응. 근데 아빠는?”
[아빠 지금 삐졌어. 자기 빼고 우리 둘만 전화한다고. 엄마가 가서 도와드려야겠다.]
“카페에 손님 많아? 아르바이트 한 명이라도 구하지….”
[괜찮아, 백야 얼굴 봐서 하나도 안 힘들어.]
“알겠어. 내가 저녁에 또 전화할게. 아빠한테 삐지지 말라고 해.”
[그래. 얼른 가 봐.]
“응. 사랑해요.”
[엄마도 우리 백야 너무 사랑해~]
백야는 자기도 모르게 볼하트를 하려다 멈칫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거였다.
* * *
- 지나가면서 봤는데 ID 입구에 경호원 서 있더라
└ 그 일 있고 사람 뽑은 거 같더라
- 아 애들 귀여워 미쳐ㅠㅠㅠ 사옥 출근길 처음 보는데 애들 보디가드처럼 백야 둘러싸서 들어갔어ㅠㅠ (동영상)
└ 이것도 사생짓인거 모름?
- 이 안에 복숭아 있어요 (사옥 출근 뒷모습.jpg)
- 숙소, 사옥, 개인 외출 따라다니는 거 = 사생
- 근데 진짜 인맥이라는 게 있나 봐.. 에임도 선 넘은 사생 많았는데 검찰 송치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아? 재벌 매형 짜릿하다
└ 사생에게 법의 철퇴를!!!
└ 형량 제일 세게 때려주세요ㅠㅠ 다시는 울 복숭아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회사 측의 배려로 안정을 취한 백야는 다음 날 웃는 얼굴로 출근했다.
오늘은 콘서트 제작 회의 참여 후 하루 종일 연습을 할 예정이었다.
민성과 지한은 캐비닛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며 지하로 향했고, 청과 유연은 화장실. 덕진은 사무실을 들르느라 율무와 백야만 남겨진 상황이었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기획팀의 막내 직원이 조심스레 안부를 물어왔다.
“저….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안 괜찮은 게 분명한데, 백야는 괜찮다고만 했다.
저희가 물어봐도 대답은 같았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일 게 뻔했다.
해서 멤버들은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대신 저희끼리는 어느 정도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당분간은 백야를 혼자 두지 않기로.
“나랑 같이 카페 갈 당백이~”
“가도 돼? 애들 오면 바로 회의 시작하는 거 아니야?”
“앗. 아니에요. 저희 회의는 10시부터라서 아직 30분 정도 여유 있어요. 다녀오셔도 돼요.”
친절한 안내에 백야와 율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자. 우리 애기 우유 먹을 시간이네~”
“뭐라고?”
“애기야 가자~”
“야!”
백야가 율무의 입을 틀어막으며 뒤를 돌아봤다.
다행이 못 들은 척해 줄 모양인지, 직원은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다과 트레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가. 빨리.”
“가 주는 거야?”
“나가라고…!”
얼굴이 빨개진 백야가 문밖으로 등을 떠밀었다.
회의실을 나오기 무섭게 율무의 목덜미를 잡은 백야가 아래로 당기며 속삭였다.
“죽을래?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웹드라마 속 유연의 대사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가 싶었지만, 그 이유라면 벌써 50번은 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짚이는 건 하나뿐이었다.
“너 설마…. 어제 들었지.”
개복치가 예리한 눈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덜미를 잡힌 율무는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야 하는데 도저히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입술에 힘을 빼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웃음을 참는 콧구멍이 티 나게 벌름거렸다.
‘들었구나.’
반면 백야는 낭패 어린 표정이 됐다.
어젯밤 잠시 거실로 나온 율무는 부엌에서 누나와 통화 중인 백야를 발견했다.
조용히 물만 떠서 가겠다고 손짓한 그는 살금살금 정수기로 향했는데. 그때 매형이 한 말을 들은 눈치였다.
[유명해지니까 별일이 다 생기네. 하아…. 우리 처남 아직 애긴데….]
밤인 데다 주변이 조용해 통화 내용이 들린 듯했다.
“푸하하! 아, 못 참겠다. 근데 너 진짜 집에서 애기라고 불려? 누님이랑 10살 차라 했나?”
“…아니야!”
“아~ 10살이 아니야?”
“그거 말고!”
“그러엄~? 뭐가 아니라는 건지 율무는 잘 모르겠는, 억.”
퍽-
조금 약 올렸더니 기어이 솜 주먹이 날아왔다.
“너 지금 나 때렸어? 안 되겠다. 애들한테 다 말해야지.”
“안 돼…!”
백야가 매달리듯 율무의 팔을 붙잡았다.
“미안.”
“그치? 네가 잘못했지?”
“응. 그러니까 애들한테는 제발….”
백야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백야의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간절해 보이는 눈을 겨우 외면한 율무는 딜을 걸어왔다.
“소원권 1개. 그럼 생각해 볼게.”
“콜! 무조건 콜.”
“오케이~ 나 입 무거운 거 알지?”
율무가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 * *
콘서트 기획팀과의 회의는 약 두 시간가량 진행됐다. 처음 들어 보는 용어와 생소한 대화가 난무했지만 재미있었다.
“우와.”
지금까지 낸 소리라고는 감탄사밖에 없는 백야는 조용히 라떼만 홀짝거렸다.
기획팀에서 저희의 의견을 물을 땐 주로 민성이나 율무, 유연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무대 구성에 솔로나 유닛 무대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데요.”
무대 중간에 나올 VCR을 감안하더라도, 1시간 30분 이상 진행되는 콘서트를 구성하기엔 데이즈가 갖고 있는 곡의 개수가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멤버들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는 팬들 앞에서 솔로 무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무대 위에서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특히 백야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도 속이 울렁거렸다.
‘혼자 올라갔다간 토만 하고 내려오겠네.’
백야가 눈썹을 찡그리며 가슴을 문지르자 멤버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마침 데이즈의 의견을 물어보던 참이라 직원들의 시선까지 백야에게 집중됐다.
“…왜? 왜 그러세요?”
당황한 백야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파?”
“어디 안 좋아?”
유연과 지한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바로 어제 백야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다는 걸 아는 직원들도 말을 얹었다.
“괜찮으세요? 힘들면 먼저 나가 보셔도 되는데…. 어차피 오늘은 이게 마지막이고 회의는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니까,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나가서 좀 쉴래? 아티스트 룸 지금 비어 있을 텐데, 가서 좀 자라.”
남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백야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아니요?! 저 괜찮아요. 진짜 괜찮은데?”
눈을 휘둥그레 뜬 백야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유연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근데 왜 그래?”
“내가 뭘 했는데?”
그야 툭하면 코피 흘리고, 쓰러지고, 납치당할 뻔하고.
복숭아라 그런가, 혼자만 데굴데굴 굴러다니니 멤버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난 솔로 무대라고 하니까 속이 울렁거려서….”
제일 큰 사이즈의 테이크아웃 잔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를 본 유연이 눈썹을 완전히 구기며 퉁명스레 말했다.
“놀랬잖아.”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니까?
백야는 조금 억울했다.
그와 동시에 저 때문에 회의가 이상하게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의 시선이 저를 향해 있으니, 회의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면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저, 그래서 말인데요…. 저는 유닛 무대가 더 좋을 것 같은데 멤버들 의견은 어떤지….”
애들이 싫다 그러면 어쩌나 싶어서 눈알을 굴리는데 청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좋아! 나 백야랑 할래!”
찬성표를 던진 청이 빠르게 선수 쳤다. 그러자 민성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박했다.
“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런 건 공평하게 정해야지.”
“내가 먼저 찜했어!”
“아니야. 이건 나중에 따로 얘기해.”
깔끔한 정리에 율무가 박수 쳤다.
“역시 민성이 형. 리더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끝이 조금 소란스럽긴 했으나, 만장일치로 유닛 무대에 의견이 모아졌다.
데이즈는 다음 회의 전까지 멤버 구성과 하고 싶은 무대 콘셉트를 생각해 오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온 연습실.
“그냥 가위바위보 해. 이긴 사람이 순서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사람 고르자.”
가위바위보를 제일 잘하는 지한이 공평한 척 자신에게 유리한 패를 내밀었다. 그러자 민성이 다시 한번 눈을 부릅떴다.
“이런 걸 무슨 가위바위보로 하니? 됐고, 포지션별로 가자. 일단 나랑 백야.”
“잠깐만, 타임. 나도 보컬이야, 이거 왜 이래?”
자신만 쏙 빼놓고 백야와 한 팀으로 묶이는 민성에 율무가 서운해했다.
“No! 내가 제일 먼저 말했어! 먼저 말하는 사람이 주인인데!”
청은 자신이 햄스터의 주인이라며 백야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지금 장난해? 팀에 얘밖에 없어? 왜 다들 백도랑 못 해서 안달이야.”
유연은 그런 멤버들의 태도가 못마땅한 듯 입꼬리를 삐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