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오! 유연 떨어져 나갔다! Nice.”
청은 경쟁자가 한 명 줄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한국인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법.
“그냥 얘한테 정하라 그래.”
“…나?”
“생각 잘해라. 너 아플 때 매일 옷 골라 주고 입혀 준 거 누군지.”
기권 선언이 아니었다.
협박이었다.
유연은 그동안의 헌신을 앞세워 백야에게 자신을 고르라 종용하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관심은 처음 받아 보는 백야가 눈알을 굴렸다. 얼굴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아무나 상관없는데….”
“너는 그런 태도가 문제야. 네 주장을 확실하게 말하라고. 어? 눈치 보지 말고.”
유연은 백야가 자신을 고를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백야가 입술을 할짝대며 고민하는데, 순간 율무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누구보다 시끄럽게 굴어야 할 녀석이 조용히 저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백야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율무의 입 모양이 동그랗게 말리며 움직였다.
애.
기.
야.
‘저 망할 새끼가!’
율무는 기대를 저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놈이었다.
이를 악문 백야가 율무를 노려봤다.
“아유. 여기 웬 애~”
“야아악!”
백야가 기겁하며 율무에게 달려갔다.
“벌레인 줄 알았는데 아니넹. 근데 왜? 당백이 나 불렀어?”
“나, 나는 얘랑 할게. 얘랑 하고 싶은 게 있었어.”
“세상에~ 나랑? 정말?”
율무가 두 손을 모으며 놀란 척 발 연기를 했다. 이로써 데이즈 내 인기투표 1위는 빠르게 품절됐다.
“No! 저거는 안 돼! 나에게 흙을 뿌려라!”
청이 인정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백야는 확고했다.
율무의 목에 팔을 걸어 자신의 키만큼 낮춘 그는 구석으로 끌고 가 나직이 말했다.
“이거로 네 소원권 쓴 거다.”
“왜? 난 쓴다고 말한 적 없는데?”
“뭐 인마?”
“네가 나랑 하고 싶다며~ 어쩔 수 없지. 착한 내가 해 주는 수밖에.”
개복치는 사기당했다.
“이런 썩을 놈을 봤나….”
앞니를 드러낸 백야가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야, 때려치워. 나 너랑 안 해.”
백야가 없던 일로 하자며 팀을 무르자, 율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어, 잠깐! 당백이 잠깐만!”
“놔라.”
“아아앙~”
무릎을 꿇은 율무가 백야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빈정이 제대로 상해 버린 백야는 놓으라며 다리를 털었다.
누가 봐도 문제 있어 보이는 모습에 청이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왔다.
“모냐. 헤어졌나?”
“어. 헤어졌어. 나랑 유닛 할 사람 구한다.”
“나야, 나!”
“아악! 아니야! 쓰읍. 저리 안 가? 당백아 나 소원권 쓸게, 소원!”
율무가 발악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봤으나 돌아오는 건 타격감 0의 앞발이었다.
탁-
“시간 지났다, 이놈아.”
손날로 율무의 정수리를 내려친 백야가 차갑게 돌아섰다.
완전히 갈라선 것 같은 모습에 민성이 박수를 치며 흡족해했다.
“나는 쟤 깐죽거리다가 차일 줄 알았다.”
그렇게 유닛 멤버 정하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음 콘서트 회의까지는 시간이 여유로우니, 각자 누구와 어떤 무대를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에 율무만 울상이 됐다.
“당백아…. 자니?”
제 발로 복을 걷어찬 구 유닛 멤버가 개복치의 주위를 맴돌았다.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관심을 끌어 보려 애썼지만, 그 어떤 행동도 소용없었다.
“흑흑.”
과연 어디까지 구질구질해질 건지, 이제는 바닥에 엎드려 입으로 우는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아, 이 형 왜 이래, 진짜. 길 다 막잖아. 좀 비켜 봐.”
백야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던 유연이 눈썹을 구겼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은데 길을 차단당한 탓이었다.
“차라리 나를 밟고 가!”
“그래. 형이 밟으라 그랬다.”
유연은 망설임 없이 다리를 들었다. 진짜 밟고 갈 생각인지 탄탄한 엉덩이 위로 발이 올라갔다.
그를 본 백야가 말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마침 남경이 들어오며 유연을 발견했다.
“장난 그만 치고 모여 봐.”
남경의 말에 율무가 몸을 옆으로 세우며 돌아누웠다.
“야, 좀 일어나.”
옜다 관심.
보다 못한 백야가 등을 툭 건드리자, 율무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눈을 반짝반짝거렸다.
“당백이 나 불렀어? 왜?”
“부르진 않았는데.”
율무의 등 뒤로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애써 외면한 백야는 남경을 바라봤다. 그는 깜빡하고 잊은 게 있다며 전달 사항을 알려 왔다.
“내일은 광고 스케줄 때문에 연습실 못 오니까 오늘 좀 열심히 해 둬. 유연이는 이따 6시에 하이틱 연습 가는 거 알지?”
“응.”
2주 앞으로 다가온 JAMA 시상식에서 소년천하의 국화와 스페셜 무대를 준비 중인 유연이었다.
그런데 광고라니?
처음 듣는 스케줄에 멤버들이 의아해했다.
“저희 또 광고 찍어요?”
“어. 위에서 멋대로 잡는 바람에 나도 늦게 전달받았어.”
광고 퀘스트 중 남은 목록은 통신사와 게임 광고. 백야는 둘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무슨 광고인데요?”
“뭐라더라. 아이돌 되는 법?”
소속사 광고인가?
그래서 윗선에서 멋대로 잡고 매니지먼트실에는 통보로 알린 건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들이 의아해 보였다.
“회사 광고예요?”
“아니. 게임 광고야.”
“게임이요?”
백야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렇게 술술 풀린다고?’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통신사 광고뿐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게 찜찜했다.
뭔가 생각날 것 같은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놀랐다가 심각해졌다가. 백야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풀네임을 읽어 주는 목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름이 ‘천재 아이돌로 살아남기’라는 게임이래.”
“What? 그게 모야.”
“아이돌 육성 게임 같은 건가?”
관심을 보이는 멤버들과 달리 백야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도, 일본에서 이상한 현상을 겪었을 때도. 여러 번 검색해 봤지만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던 그 게임이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났다.
* * *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었나….’
제 인생의 암흑기.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루하루가 막막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바닥을 넘어 마이너스를 찍는 시력 때문에 사회 복무 요원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던 때였다.
한 섬마을의 전교생 16명의 작은 초등학교.
육지로 나가는 배는 하루에 두 대. 그마저도 주말에만 운행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배도 뜨지 않고 인터넷도 불안정해서 약 2년을 고립되어 있다시피 했다.
‘그때 검은 수염한테 찍혀서 제법 고생했었는데.’
검은 수염은 채강초 6학년 일진 짱의 닉네임이었다.
세수를 하느라 잠시 벗어 둔 안경을 훔쳐 달아나는 바람에 계단을 엉덩이로 내려갔는가 하면, 화단의 잡초를 뽑던 중 물 풍선을 맞아 쫄딱 젖기도 했었다.
던질 거면 여름에 던지지, 하필 겨울이라 감기몸살로 꽤나 앓았던 기억이 났다.
백야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개복치였다.
‘잔인한 놈이었지….’
아직 어리기에 웬만하면 당해 주려 했으나 갈수록 짓궂어지는 장난에 백야도 결국 칼을 빼 들었다.
검은 수염보다 어른이었던 백야는 담임선생님께 고자질했다.
며칠 뒤 퉁퉁 부은 눈으로 찾아온 일진 짱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범행 동기를 털어놨다.
여자 친구가 백야와 결혼할 거라며 검은 수염을 차 버렸다고 했던가.
‘쯧쯧. 잼민이들이란.’
백야는 옛 추억에 아련해졌다.
그러다 불만을 터뜨리는 민성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악! 또 죽었어! 왜? 아니, 왜?”
멤버들은 <천재 아이돌로 살아남기> 베타 버전을 플레이 중이었다.
미팅 전에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말에 설치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엄청 유명한 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판교에 건물 하나를 지어 올렸다던데. 못해도 창문 한 장 정도는 백야에게도 지분이 있었다.
“나 안 해! 이거 이상해!”
청이 핸드폰을 팽개치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백야의 허벅지 위로 청이 머리를 뉘었다.
데이즈는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연말 무대 연습을 하러 간 유연만 자리에 없었다.
“와~ 이거 승부욕 돋게 하네.”
냉수를 떠 온 율무가 원샷을 하며 재시작 버튼을 눌렀다.
“망할 것 같은데.”
지한도 나직이 감상을 늘어놨다.
처음부터 망겜이란 걸 알고 있던 백야만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청. 너 패시브 뭐 나왔어?”
“패시브? 그런 게 있나?”
“이름 입력하고 뽑기 돌리면 제일 처음 나오는 거 있잖아.”
“무아지경 잠자리? 몰라, 기억 안 나.”
무아지경… 잠자리?
백야가 다시 게임을 켜 보라고 재촉하자 청이 순순히 핸드폰을 내주었다.
[패시브 : R <무한한 잠재력>]
“와…….”
<개복치(R)> 패시브 유저는 이유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그때 세 번째 시도 만에 데뷔에 성공한 민성이 고개를 들었다.
“다 똑같지 않아?”
“형도 무한한 잠재력이야?”
“엉. 너는 다른 거 나왔어?”
“몰라. 난 깔리지도 않던데.”
핸드폰이 이상한 건지, 앱스토어 계정이 잘못된 건지, 백야만 다운로드가 되지 않았다.
“햄스터 하고 싶어? 내 거로 해!”
청이 자신의 핸드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미 온몸으로 플레이 중인데 핸드폰으로까지 하고 싶진 않았던 백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햄야랑 놀래. 비켜 봐.”
백야는 청의 머리를 살짝 들었다 내려놓으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찾고 싶어 했던 실마리를 찾았는데 어쩐지 기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