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안녕하세요! 저는 데이즈 백야라고 합니다. 여름쯤 일본에서 만나 뵌 적 있는데 혹시 기억하실까요?]
겜박스의 에이스.
<천재 아이돌로 살아남기> 개발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던 핵심 멤버였으나 돌연 퇴사를 선언한 천재 개발자.
이제는 세상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아 떠난 김 모 씨는 며칠 전부터 수상한 문자를 받기 시작했다.
본인이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라 주장하는 문자를 처음 받은 건 일주일 전.
웬 미친놈인가 싶어서 쿨하게 무시했는데 3일 뒤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저... 바쁘실 텐데 자꾸 연락 드려서 죄송해요ㅠㅠ 꼭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한 번 더 연락 드립니다.]
자신의 장기라도 노리는 건지 밖으로 불러내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당연히 무시했다.
그러나 이틀 뒤, 또 문자가 왔다.
[혹시 겜박스 김필승 개발자님 연락처가 아닌가요? 저는 절대 절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ㅠㅠ]
‘내 이름은 어떻게 알지.’
절대 절대 이상한 사람 같았다.
‘응. 차단.’
백야는 그렇게 차단당했다.
그러나 필승은 오랜만에 만난 팀장님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맞다. 필승 씨, 그 아이돌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누구요?”
“데이즈에 제일 어려 보이는 친구. 그분이 네 연락처를 실수로 지웠다길래 내가 명함 드렸는데.”
필승은 방금 먹은 스파게티가 코로 나올 뻔했다.
“콜록, 예?”
“원래 아는 사이라던데. 아니야?”
“제가 연예인을 무슨 수로 알아요….”
그럼 그렇지.
코딩밖에 모르는 바보에겐 과분한 인맥이다 싶었다.
“그럼 그 사람은 뭐지? 네 명함 가져갔는데. 연락 온 거 없어?”
“이름이 뭐라고요?”
“이름은 모르겠고, 그룹 이름이 데이즈야.”
못 본 사이 다크서클이 한층 더 짙어진 필승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이상한 문자를 보내던 사람의 이름이 데이즈 어쩌고라고 했던 거 같았다.
해당 문자는 번호를 차단해 버린 탓에 스팸 함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었다.
[010-XXXX-0503]
‘찾았다.’
차단한 번호를 눌러 보자 그새 몇 통의 문자가 더 와 있었다.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닌데...]
[혹시 저를 차단하신 건가요? 아님 개발자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차단을 풀까 말까 망설이는데, 마침 한 통의 문자가 또 도착했다.
[사실 저는 미래에서 왔어요!]
“이 새끼 미친놈 같은데.”
* * *
어느새 3일 앞으로 다가온 JAMA.
오랜만에 숙소 안까지 들어온 남경이 협찬으로 들어온 물건을 내려 주며 말했다.
“내일 저녁에 출국인 거 알지? 짐 미리미리 싸 놓고. 백야는 곰돌이 챙기고.”
“네에…. 네?”
백야가 대답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챙겨요?”
“네 부적이라며. 그 머리맡에 세워 둔 거.”
“앙몽 인형!”
“애착 인형~”
청과 율무의 대답이 나뉘었다.
악몽을 잡아먹는다는 곰 인형은 확실히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장난을 치고 싶어서 씰룩거리는 율무의 입꼬리를 본 백야가 눈을 흘겼다.
“혹시 저희 독방 써요?”
“그건 아닌데 해외 나갈 때마다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니까…. 뭐 의지할 거라도 있으면 좋지 않겠어?”
“지금… 말도 못 하는 솜뭉치한테 의지하라고요?”
남경을 바라보는 눈에는 ‘혹시 제가 너무 민폐라 귀찮으신가요?’라는 의문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뜻이 전달됐는지 남경은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어우, 아니. 야, 그런 거 절대 아니다.”
“그럼 됐어요. 저는 독방만 아니면 돼요.”
“그래. 아무튼 내일 회사에서 공항으로 바로 출발할 거니까 숙소 들릴 일 없게 준비 잘해 놔.”
남경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오겠다며 등을 돌렸다.
하루 종일 멤버들을 뒤치다꺼리하다가 드디어 퇴근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백야가 그를 멈춰 세웠다.
“아, 형! 잠시만요!”
“또 왜.”
남경이 뒤를 돌아보자 백야가 그를 앞질러 먼저 현관으로 달려갔다. 뒤를 따라가 보니 입구에 쌓여 있는 귤 상자가 보였다.
“이게 웬 귤이야?”
“부모님께서 보내 주셨어요.”
“맞다. 부모님께서 제주도에서 귤 농장한다고 하셨지?”
“농장까진 아니고 작게 밭 가꾸고 계세요. 하나는 덕진이 형 거예요.”
“두 개 다 가져가라고? 아니야, 우리는 이렇게 많이 필요 없어. 하나는 너희 먹어.”
그러자 민성이 고개를 저으며 걸어 나왔다.
“이게 다일 것 같아?”
“그럼?”
“테라스에 두 상자 더 있어.”
“네 박스나 보내 주셨어?”
“네 박스나라니….”
민성의 눈썹이 작게 찌푸려졌다.
“형.”
“…어?”
저를 부르는 비장한 목소리에 남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시작이야.”
포도와 샤인 머스캣 지옥에서 풀려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귤이었다.
여름과 가을이 그러했듯, 겨울도 만만치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 그러냐.”
민성의 말에 딱히 부정하지 않은 백야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래. 부모님께 잘 먹겠다고 말씀 전해 드려.”
“넵.”
“형, 두 개 다 들 수 있어? 하나는 내가 들어 줄게.”
성대한 배웅을 받은 남경은 유연과 함께 현관을 나섰다. 남은 멤버들은 짐 정리를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안경, 렌즈, 세안 도구….’
바닥에 캐리어를 펼쳐 놓은 백야는 침대에 엎드려 챙겨야 할 목록을 대충 리스트 업하고 있었다.
지잉-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개발자님’이었다.
“오! 오!”
벌떡 일어난 백야가 핸드폰을 높이 치켜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책상에 앉아 목록을 작성 중이던 지한도 옆을 돌아봤다.
“왜 그래?”
“왔어!”
“그때 그 사람? 개발자랬나.”
“응!”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자 백야가 순순히 대답했다. 비밀이었던 것치곤 대화가 퍽 자연스러웠다.
역시 허술했다.
[개발자님 : 진심이세요?]
간결한 답장에 백야는 잠시 버퍼링이 걸렸다.
‘진심이냐고? 내가 뭐라고 보냈더라.’
얼핏 봐도 일방적으로 보낸 말풍선이 족히 10개는 돼 보였다.
자중한다고 했는데 언제 이렇게 많이 보냈는지….
백야는 이러다 자기도 감옥에 가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됐다.
“힝.”
시무룩해진 백야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신기했던 지한은 대놓고 백야를 구경 중이었다.
[사실 저는 미래에서 왔어요!]
[게임을 다운로드하고 예명을 입력했는데 눈을 떠 보니 3년 전으로 돌아와 있었어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여기는 게임 안이에요.]
‘세상에.’
저 때는 몰랐는데 다시 읽어 보니 너무 수치스러웠다.
“끕.”
입술을 앙다문 백야는 이불을 팡팡 두들기며 후회했다.
‘그나저나 뭐라고 답장하지….’
연락만 오면 당장 만나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힘들 것 같았다. 짐도 싸 두어야 하고,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연습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녁에는 시상식 스케줄로 출국까지 해야 했다.
초조해진 백야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하는데,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지잉, 지잉-
이번에는 전화였다.
“으갹!”
깜짝 놀란 백야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바닥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에 지한의 시선이 머물렀다.
“안 받아?”
“어? 아, 받아야지.”
백야가 허둥거리며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핸드폰을 숨긴 백야가 방문을 나섰다. 그러나 거실에 멤버가 있었던 모양인지 다시 돌아와 화장실로 쏙 숨어 버렸다.
달칵-
어쩐 일로 문을 잠그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여, 여보세요?”
그러나 소리는 문을 잠가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백야가 미처 닫지 못한 방문을 닫아 준 지한은 살금살금 화장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귀를 기울이자 백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진짜 데이즈 백야 맞는데…. 네? 아니요, 처음부터 아이돌이었던 건 아니고요….”
화장실인 데다 백야가 워낙 작게 말하고 있어서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다.
대충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는 것 같은데, 진짜라며 믿어 달라는 걸 보니 아는 사이라던 말은 다 거짓말인 듯했다.
“문자요? 저 거짓말한 거 하나도 없어요. 진짠데….”
“제가 만나서 더 자세히 설명 드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번 주는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소리가 울려서 들리는 탓에 지한의 미간도 점점 찌푸려졌다.
“혹시 밤늦게도 괜찮으세요? 제가 낮에는 시간을 내기가 조금….”
“아, 아니에요! 제가 무조건 시간 맞출게요. 제발 딱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약속 시간을 잡는 것 같았다.
“저요? 일요일 밤에 돌아와요.”
“아니요. 사실 전 새벽이 더 좋은데 개발자님께서….”
그러나 정작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럼 시간이랑 장소 남겨 주시면 늦지 않게 나갈게요.”
어느새 끊어진 통화에 지한은 얼른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곤 책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털썩-
다행히 간발의 차로 의자에 앉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동으로 빙그르르 도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뭐 해?”
문을 열고 나오던 백야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지한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 그냥.”
지한은 굉장히 당황한 상태였다.
말을 더듬기까지 했으나 상대는 막 비밀 통화를 끝내고 나온 개복치. 자신의 비밀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벅차 판단력이 흐린 상태였다.
“안 어지러워?”
“…재밌는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한은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것처럼 연기하기로 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의자를 돌리기 시작했다.
책상을 짚은 손을 힘껏 밀자 의자가 팽이처럼 돌았다.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아니야. 너도 할래?”
“아니…. 재미있게 놀아.”
제 코가 석 자였던 백야는 지한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냥 ‘또 이상한 데 꽂혔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이제 정말 짐을 싸야 하는 백야는 옷을 가지고 오겠다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걸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의자를 돌리던 지한은 백야가 방을 나서자마자 책상을 짚으며 멈춰 세웠다.
눈을 감은 얼굴이 창백했다.
“하 씨. 어지러워….”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내려온 지한은 즉시 바닥에 누워 새우 자세로 몸을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