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 빛을 삼켜 버린 Eclipse
달이 가려지면 본색을 드러내
2절 랩 파트가 시작되며 사이드로 빠져 있던 지한이 중앙으로 이동했다.
타고난 리듬감과 귀에 박히는 딕션.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 지한이 뒤를 돌자 이번에는 청이 나타났다.
차가운 인상에 서슬 퍼런 눈빛.
- 깊게 박아 도망 못 가게
비슷한 제복이지만 재킷을 풀어헤친 차림이 상당히 불량해 보였다.
이후 지한과 번갈아 가며 맡은 파트를 마무리한 청은 동선을 이동하며 반지를 빼 무대 뒤로 던져 버렸다. 시작부터 헐거웠던 반지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카메라가 청의 뒤를 쫓는 바람에 해당 장면은 그대로 송출됐다.
발 카메라의 삽질 덕분에 뜻밖의 장면을 건진 나잉이들은 환호했다.
- 내 뜨거운 숨을 앗아가
Night After Night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하던 무대는 유연의 후렴구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함께 무대를 채우던 댄서들이 분주하게 모습을 감췄다.
- 하아, 하아
그러나 공연장에는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그 순간 다시 시작되는 반주.
무대가 끝난 줄 알고 터져 나오던 함성이 다시금 줄어들었다.
편곡된 반주가 재생되며 아웃트로 무대가 이어졌다.
차락, 차락-
격렬한 안무에 견장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려왔다.
실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멤버들에 비해 부족한 백야는 철저히 수납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틀리지 않기 위해 앙다문 입술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 Na na na night
오롯이 이 무대만을 위해 만들어진 반주 위로 NAN의 후렴구 가사가 리믹스 되어 울려 퍼졌다.
팀 내에서 댄스 실력 상위권으로 뽑히는 율무와 유연, 청이 주로 동선의 가운데에서 활약했다.
2분 동안 이어진 댄스 브레이크가 슬슬 끝이 날 때쯤. 줄곧 뒤쪽에 머무르던 백야가 중앙으로 치고 나오며 관중을 사로잡았다.
이내 가운데 멈춰 서자, 네 명의 멤버들이 백야를 결박하는 것처럼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그사이 뒤로 숨어들었던 지한이 차가운 얼굴을 드러냈다.
손으로 백야의 눈을 가린 지한은 고개를 기울여 하얀 목덜미를 무는 흡혈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 순간 반주가 뮤트 되며 송곳니가 살을 파고드는 소리만이 적나라하게 울렸다.
백야의 고개가 꺾어지며 지한의 몸에 기대듯 쓰러졌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지한이 쥐고 있던 어깨를 놓자, 멤버들과 백야가 힘없이 바닥 위로 늘어졌다.
잠시 쓰러진 멤버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곧장 지한을 클로즈업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뱀파이어의 얼굴.
손등을 들어 입가를 훔치자, 립스틱이 번지며 붉은 핏자국을 만들어 냈다.
* * *
- 오늘부터 뱀파이어의 존재를 믿기로 했음 (지한 캡처.jpg)
- 아웃트로 진짜 레전드다....
- VCR이랑 이어지는 거면 결국 백야 뱀파이어 만들어 준 거네? 그래ㅜ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영원히 데이즈 하자 얘들아
백스테이지로 내려온 멤버들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성공적인 무대를 축하했다.
“와~ 찢었다. 마지막에 당백이 목 물 때 함성 들었어?”
지한과 백야 사이에 선 율무가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신나 했다.
“지한아, 복숭아 맛있었어?”
“응. 달더라.”
“꺄악~ 역시 당도 100프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한도 기분이 좋은지 흔쾌히 율무의 장난을 받아 주었다. 얼굴이 빨개진 백야만 소름 끼친다며 두 사람의 곁에서 멀어졌다.
대기실로 간 멤버들은 땀에 젖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다시 대기석으로 돌아왔다.
무대를 하는 사이 데이즈가 앉아 있던 자리는 다른 그룹이 차지하고 있었다.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멤버들은 대충 계단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5분도 채 되지 않아 일곱 번째 본상 그룹으로 호명되며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올해의 TOP 10. 데이즈.”
무난히 받을 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이름이 호명되지 않아 불안해지려던 참이었다.
마침내 울려 퍼지는 데이즈의 이름에 백야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동료 가수들의 축하를 받으며 중앙 무대로 걸어간 데이즈는 준비해 둔 소감을 전했다.
그렇게 어느덧 2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시상식.
다시 돌아온 대기석은 앞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소년천하는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데이즈 앞쪽에 앉아 주세요.”
선두에 서 있던 백야가 뒤쪽으로 오려 하자, 스태프가 팔을 교차하며 앞쪽에 앉아 달라 눈짓했다.
“형, 앞에 앉으래.”
“저기?”
1열 중앙.
대기석 중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부담스러운지 멤버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자리에 앉자 뒤쪽에 있던 BB9의 금일이 백야의 어깨를 건드렸다.
툭, 툭-
“끕!”
역시나 낯선 손길에 놀란 백야가 자리에서 통 튀어 올랐다.
흠칫거리는 개복치에 율무가 뒤를 돌아보자 금일이 미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야, 미안. 놀랐냐?”
백야도 울상을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누가 봐도 놀란 얼굴이었다.
“에헤이~ 금일이! 복숭아는 함부로 누르면 안 되는 거 몰라?”
율무는 ‘복숭아 누르지 마세요’ 라는 종이라도 붙여 놔야 되는 게 아니냐며 이상해질 뻔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아…. 얜 아예 복숭아가 된 거야? 너 이제 사람 취급도 못 받냐.”
금일이 떨떠름한 얼굴로 율무와 백야를 번갈아 봤다.
“얘가 장난치는 거야. 오랜만이네.”
“그러니까. 너 몸은 좀 괜찮냐? 연락해 본다는 게 깜빡해서.”
사실 아까부터 말을 걸고 싶었는데, 자리가 멀어서 그러지 못했다며 금일이 안부를 물어왔다.
“괜찮아.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다행이네. 본상도 축하한다. 너희 무대 하고 내려가자마자 우리도 받았어. 바로 앞에.”
“대기실에서 봤어. 너도 축하해.”
같은 해에 데뷔한 그룹들 중, 본상을 받은 남자 그룹은 데이즈와 BB9뿐이었다.
“쟤는 배 좀 아플 거다.”
금일이 멀리 떨어진 하랑을 눈짓했다.
시선을 따라 백야도 식스에이엠 쪽을 쳐다봤는데 하랑과 눈이 마주쳤다.
“쟤는 아직도 너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난리네. 저러다 사시 되는 거 아니냐?”
“냅둬. 저러는 게 한두 번인가.”
“오~ 복숭아, 좀 단단해졌는데? 작년에는 찍소리도 못하더니. 이제 팬 많아졌다 이거냐?”
“당연하지. 나잉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래.”
백야가 가슴을 펴며 우쭐거렸다.
그 모습이 어이없는지 금일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청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금일을 거꾸로 바라봤다.
“Hey. 백야는 조폭 햄스터라서 다 이겨. 내가 강하게 키워.”
“아…. 네가 키우는 중이야?”
“당근하지. 그러니까 막 만지지 마. 이거 문다. 진짜야.”
청은 자기 할 말만 하곤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문다는 말에 율무가 진짜라며 정색하며 호응하자 금일의 얼굴이 더욱 떫어졌다.
그사이 베스트 OST와 퍼포먼스 디렉터 상, 세션 상 수상이 모두 끝나고 이제 한 팀의 무대와 대상 발표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야, 무대 시작하나 보다. 나중에 더 이야기하자.”
“응.”
백야의 어깨를 두드린 금일이 몸을 바로 했다.
팬들 중에는 대기석만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어, 다른 그룹의 무대 중에 떠드는 모습이라도 찍힌다면 어떤 비난을 받을지 몰랐다.
[Love is Blindness]
어두워진 공연장.
데이즈 때와 마찬가지로 VCR로 시작된 무대는 무려 30분이 넘게 이어졌다.
인트로를 제외하고도 네 곡이나 선보인 소년천하는 시상식을 단독 콘서트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경력은 무시할 수 없는지, 무대 장악력과 능숙한 퍼포먼스에서 노련미가 돋보였다.
- 꺄아아악!
소년천하의 무대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곧바로 이어진 영상은 세 부문의 대상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올해의 베스트 송.
올해의 앨범.
올해의 아티스트.
영상이 끝나자 다시 밝아진 공연장 위로 대상을 발표할 남자 배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신우입니다.”
스탠딩 마이크 앞에 멈춰 선 그는 준비해 온 멘트를 능숙하게 뱉었다.
“저도 무대 뒤에서 시상식을 함께 즐기고 있었는데요. 직접 이 자리에 서 보니 무대가 정말 크네요.”
이렇게 큰 무대를 열정으로 꽉 채워 주신 아티스트 분들이 멋지고 존경스럽다는 소감을 한 그는, 손에 쥔 금색 봉투를 들어 보였다.
“제가 발표하게 될 부문은 ‘올해의 베스트 송’인데요. 먼저 후보부터 만나 보시죠.”
배우의 손짓에 VCR이 재생됐다.
소년천하, 로즈데이, 브랜드뉴, 악동 남매, 데이즈, 러브유.
올 한해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은 곡과 아티스트들이 소개됐다.
“20XX JAMA MUSIC AWARDS. 올해의 베스트 송.”
봉투를 뜯어 카드를 펼쳐 본 배우는 결과를 확인하곤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연장은 소년천하와 데이즈를 연호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섞여 소란스러웠다.
객석을 돌아보며 잠깐 뜸을 들이던 배우는 이내 진중한 목소리로 아티스트를 호명했다.
“데이즈. 축하드립니다.”
- 꺄아아악!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오며 카메라가 데이즈를 비췄다.
‘정말 운이 좋으면 받을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막상 호명되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붙은 백야가 옆을 돌아보자 멤버들도 비슷한 상태였다.
청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힘껏 박수를 치고 있었다.
“Really? 진짜 우리야?”
지한을 일으켜 세운 청은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청의 악력에 지한이 팔랑거렸다.
“햄스터 일어나! 민성!”
눈치껏 일단 일어나고 본 유연, 율무와 달리, 민성과 백야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앞으로 달려간 청이 두 사람을 일으켜 세우자, 감격에 겨운 율무가 멤버들을 모아 끌어안았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제자리를 방방 뛰길 잠시. 팔을 풀기 무섭게 무대 아래의 스태프가 얼른 이동하라며 손짓했다.
“형, 일단 가야 할 것 같은데.”
겨우 정신을 차린 유연이 민성에게 귓속말하자 함성은 더욱 커졌다.
데뷔 2년 만에 대상.
모두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백야는 청의 손에 이끌려 이미 중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마이크 앞에 선 민성이 수상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 나잉이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북받치는 감정에 말문이 막히는 듯 민성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대상을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트로피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유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지한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항상 저희를 이끌어 주시는 대표님과 ID 엔터테인먼트 식구들. 남경이 형, 덕진이 형….”
민성이 계속해서 스태프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사이, 카메라는 다시 멤버들을 비췄다.
율무 역시 눈가가 붉었지만 민성의 곁을 듬직하게 지키며 서 있었고, 막내즈는 턱에 호두 한 알씩을 나란히 품은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청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멤버들의 감정에 물든 듯했다.
“마지막으로,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음악이 더 많은 분들께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남경의 말처럼 정말 최고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