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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230화 (230/340)

제230화

데이즈는 다음 날 오전 비행기로 귀국했다.

그러나 멤버들은 쉬지 못하고 개인 스케줄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남은 시상식의 특별 무대와 내일 있을 쇼플리 스페셜 스테이지 때문이었다.

“연습 잘했어?”

“네. 단아 누나가 노래를 엄청 안정적으로 하더라고요. 민성이 형 닮아서 그런가 봐요.”

이 말을 민성이나 단아가 들었다면 학을 떼며 비명을 질렀을 텐데. 자리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단아 누나 배우 활동 계속하는 거 부모님께 허락받았대요. 말씀드리기도 전에 알고 계셨대요.”

“그럼 그렇지. 이 직업을 몰래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처음엔 진짜 모르셨는데 관리실에 택배 찾으러 갔다가 아셨대요.”

처음엔 재수 학원에 있어야 할 애가 왜 TV에 나오나 싶어서 당장 방송국에 쳐들어가려고 하셨다는데.

주변인들의 칭찬과 관심이 내심 기분 좋았던 민성의 고모는 금세 마음을 바꾸셨다고 한다.

“민성이 형네 가족분들은 다 재미있는 것 같아요.”

“너희 집도 만만치 않아.”

“저요? 아닌데. 우리 집은 진짜 평범한데.”

보통 대기업과 사돈 관계인 집안을 평범하다고 하진 않는단다….

남경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특히 이번 사생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 인맥과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는 몸소 깨달았다.

악질이라던 에임의 사생팬도 접근 금지가 전부였는데, 제우스 그룹이 나서자 곧바로 검찰 송치에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지 않는가.

눈앞의 복숭아는 하는 짓이 하찮아서 만만해 보여도 절대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었다.

“백야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형한테 얘기하고.”

“갑자기요?”

“갑자기는 무슨. 형은 항상 네가 잘되길 바라고, 걱정하고, 누구보다도 널 아낀단다?”

재벌 사돈을 백으로 둔 동생에게 미리 줄을 대어 놔서 나쁠 건 없었다.

“감사합니다. 저도 형 좋아요.”

“진짜? 야, 잠깐만 백야야. 방금 그 말 녹음해야 하는데.”

“네?”

동그랗게 뜨인 눈이 남경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뒤늦게 자신이 오버했다는 걸 깨달은 그는 농담이었다며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하하하! 하하. 하….”

민망해진 그는 깜빡이를 켜며 괜히 차선을 변경했다.

남경은 개인 연습을 간 멤버들의 픽업을 맡은 참이었는데, 슬슬 보이기 시작한 목적지에 이때다 싶어 청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

“어, 청아. 우리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슬슬 나올 준비해.”

[Got it!]

이제 민성만 태워서 숙소에 내려 주면 남경의 스케줄도 끝이었다.

드르륵- 쾅!

차가 멈춰 서기 무섭게 청이 문을 거칠게 열며 나타났다.

“야, 야. 문 다 부서지겠다.”

그러나 청의 귀에 남경의 잔소리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햄스터! 이거 먹어!”

다짜고짜 백야부터 찾은 청은 종이 포장지에 싸인 무언가를 내밀었다. 백야가 얼결에 받아 들자 따끈따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게 뭐야?”

“유명한 햄스터 먹이!”

포장지를 들춰 보자 감자 모양의 동그란 물체가 보였다.

“…감자?”

“No! It’s bread. 백야가 간 데는 이런 거 없지?”

진짜 감자처럼 생긴 빵은 함께 연습하는 타 그룹 멤버가 지방 행사를 다녀오면서 사 온 거라고 했다.

옆자리에 앉은 청은 안전벨트를 하면서도 얼른 먹어 보라며 재촉했다. 요란한 등장에 정신이 없었다.

“알겠어, 먹을게. 너 연습은 많이 했어? 걱정했잖아.”

“당근하지! 이거 Really 맛있어! 근데 하나밖에 없으니까 빨리 먹어.”

아무래도 지금 청에겐 감자빵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든 끝은 빵인 걸 보니.

“청아, 형 입은 주둥이냐? 네 눈에 나는 안 보여?”

백야가 빨리 먹어 봤으면 하는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는데, 마침 남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운해하는 어투에 청의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흔들리는 눈은 누가 봐도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어…….”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은 모습에 백야가 중재에 나섰다.

“형, 같이 먹자.”

“이거 백야 건데….”

“아니야, 나눠 먹으면 돼.”

그러자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라는 얼굴로 청이 입술을 할짝댔다.

“그럼 백야, 이거 진짜 진짜 조금만 떼서 남경 주면….”

“진짜 진짜 조그음? 야, 됐어. 안 먹어. 청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겠다.”

“No! 그런 거 아니야…!”

장난삼아 던져 본 말에 진심으로 반응하자 남경은 재미가 들린 듯했다.

결국 진짜 진짜 조금에서 그냥 조금만 떼어 주는 것으로 합의한 남경은 남은 빵을 모두 백야에게 양보했다.

마지막으로 태운 민성의 몫 따위는 진짜 진짜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숙소로 돌아온 백야는 일찍 잠에 드는 척했다. 그러나 1시가 되자 감고 있던 눈이 스르륵 뜨였다.

‘잠들었나.’

옆을 보자 지한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늘은 개발자와 만나기로 한 대망의 디데이였다.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 침대에서 내려온 백야는 핸드폰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어차피 아침에 다시 입을 거라며 막무가내로 벗어 둔 패딩이 소파 위로 널브러져 있었다.

플래시를 켜 자신의 것을 건져 낸 백야가 팔을 끼워 넣으며 살금살금 현관으로 움직였다.

괜히 도둑이 된 기분이라 죄책감이 느껴졌다.

달칵-

문고리를 돌리자 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소리가 났다. 제 발 저린 개복치가 휘둥그레 눈을 뜨며 숨을 참았다.

‘심장 터지겠네, 진짜.’

백야가 만들어 내는 소음을 제외하면 집 안은 고요했다.

까치발로 나온 백야는 천천히 현관문을 닫았다.

철컥, 삐리릭-

문이 닫히자 도어 록 잠금장치가 작동되며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악! 제발 조용히!’

이러다 멤버들이 다 깨겠다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휴.”

잠시 현관문에 귀를 대고 서 있었지만, 집 안에선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몰래 숙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백야는 핸드폰을 꺼냈다.

[개발자님 : 근처에 24시인 데가 이곳밖에 없더군요. 저는 먼저 가 있을 테니 오시면 전화 주세요.]

개발자가 주소를 남겨 놓은 곳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모자에 마스크, 패딩까지 눌러쓴 백야는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같은 시각.

숙소에는 자는 척을 하고 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지한이었다.

달칵-

백야가 방문을 열고 나가기 무섭게 눈을 뜬 지한도 핸드폰을 챙겨 일어났다.

이불을 걷고 나오자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옷차림이 드러났다.

부스럭, 부스럭-

방문을 살짝 열어 귀를 가까이 대자, 패딩을 찾는 듯한 소리와 플래시 빛이 간간이 비쳤다.

잠시 후, 플래시가 꺼지자 지한은 문을 조금 더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까치발을 든 백야가 살금살금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는 데까지 10분이 넘게 걸려 지한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얼마나 답답하던지 제가 대신 열어 주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다 났다.

철컥, 삐리릭-

짝!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났을 땐, 지한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드디어!

[1층] [▲14층]

겨우 방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지한은 가장 먼저 엘리베이터부터 확인했다.

인터폰의 ‘승강기 호출’을 누르자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 한 대가 보였다.

움직이는 한 대는 분명 백야가 누른 게 틀림없었다.

멈춰 있는 다른 한 대를 호출한 그는 올라오고 있던 2호기가 저희 층에 멈춰 서는 걸 확인했다.

[▲4층] [▼15층]

백야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지한도 곧장 현관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백야를 너무 얕잡아 본 걸까. 곧장 뒤따라 나왔지만 백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씨.”

모자를 벗은 지한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을 쓸고 있는 경비 아저씨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저…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이고. 연예인 청년이네요. 이제 들어와요?”

“그건 아니고…. 죄송한데, 혹시 저랑 같이 다니는 친구 못 보셨어요? 키 작고 귀엽게 생겼는데. 아마 흰색 패딩 입고 있었을 거예요.”

“아~ 흰색 옷? 택시 타고 어디 가던데요? 방금 떠났어요.”

간발의 차로 놓친 지한이 입술을 짓씹었다.

* * *

그 시각 개복치.

완전 범죄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백야는 막 목적지에 도착한 참이었다.

[24시 불가마 사우나]

1일권을 끊고 들어온 백야는 주황색 찜질복으로 갈아입은 채 거울 앞에 섰다.

‘이건 좀 그런가…?’

황토 잠옷에 마스크를 한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그래도 이곳에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맨얼굴로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경이라도 가져올걸.’

뒤늦은 후회를 하는데, 마침 사우나 문이 열리며 한 남성이 걸어 나왔다.

“시원~ 하다!”

깜짝 놀란 백야가 뒤를 돌아보자, 나신의 남성이 수건을 집어 드는 모습이 보였다.

‘저거다!’

사우나 입구 옆에 산처럼 쌓여 있는 황토색 수건!

얼른 달려가 수건을 집어 온 백야는 곧장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턱 아래에 매듭을 짓자 나름 만족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좋아. 아까보단 낫군.’

졸지에 성냥팔이 소년이 된 백야는 30분 만에 불가마로 향하는 계단을 밟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입구에서 스펀지 베개를 주워 든 백야는 얼굴을 2중으로 가리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개발자님]

전화를 걸자 통화음이 몇 번 울리다 연결됐다.

[도착하셨어요?]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소금방으로 오실래요?]

“넵.”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햄스터 한 마리가 찜질방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접선 장소.

짧게 심호흡을 한 백야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김필승 개발자님?”

“…데이즈 백야?”

백야의 사진을 검색해 보고 있던 필승이 핸드폰과 실물을 번갈아 봤다.

대체 머리에 수건은 왜 뒤집어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500m 밖에서 봐도 동일 인물이 맞는 것 같았다.

한편 백야도 나름대로 필승을 스캔 중이었다.

‘저 성의 없는 태도와 싸가지 없는 말투, 다크서클.’

도쿄에서 만났던 그 개발자가 틀림없었다. 백야는 반가운 마음에 필승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백야의 양팔을 잡아채며 다그치듯 물었다.

“정말이에요?”

“…네?”

“진짜 타임 워프한 거 맞냐고요. 당신 3년 뒤 미래에서 왔다며.”

“마, 맞아요. 분명 지하철이었는데 게임 다운로드를 누르고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일어났을 땐 3년 전 학교였고, 퀘스트를 하라고 막 상태창이 뜨는데….”

그때 소금방 구석에서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계시던 할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에잇! 쯧쯧.”

할머니는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더니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젊은것들이 벌써 정신이 나가서 어쩌나. 떼잉….”

백야의 입이 합 다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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