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정신 멀쩡한데….’
신랄한 욕에 조금 상처받았다.
의기소침해진 얼굴이 소금방을 나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좇는데, 필승이 어깨를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악력에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더! 더 자세하게 말해 봐요.”
예상했던 것과 다른 태도에 백야는 조금 당황했다.
미친놈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개발자가 다그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번쩍이는 눈빛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이 정도로 강렬하진 않지만 종종 느낀 적 있는 기시감.
‘…한지한?’
어디서 많이 본 눈이다 싶었는데 이건 광기가 분명했다. 백야의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말씀드린 게 전부이긴 한데…. 아, 그때 이 게임을 광고하던 아이돌이 제가 활동하고 있는 그룹이에요.”
“그럼 그쪽 말고 또 같이 온 사람이 있어요?”
“아니요. 저만 온 것 같은데…. 저……. 그런데 진짜 믿어 주시는 거예요?”
사실 백야는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또요. 그냥 계속 말해 봐요.”
“어…. 아! 올여름쯤에 업데이트가 잘못돼서 이상한 일을 겪은 적 있는데, 그때 도쿄에서 개발자님을 찾아갔었거든요? 혹시 그때 일 기억하세요?”
“저를 만나러 왔었다고요?”
“네. 상태창도 안 보이고 멤버들은 사라지고, 너무 막막해서 회사로 찾아갔었는데 그때 개발자님께서 쿠폰을 주셨어요.”
“무슨 쿠폰인데요? 지금 있어요?”
“네. 여기요.”
백야가 주머니에서 아니아니 치킨 이벤트 쿠폰을 꺼냈다.
“뵙고 나서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니까 다시 상태창이 보였어요. 쿠폰 번호를 입력했더니 진짜 보상도 들어왔고요.”
“저는 처음 보는 거네요. 하긴, 아직 게임 출시도 전이니까 이런 이벤트를 진행했을 리 없지.”
쿠폰에 있는 QR코드를 찍어 보자 알 수 없는 페이지라며 홈 화면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저 진짜 그날 뵀었거든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어떻게 개발자님을 바로 알아봤겠어요.”
백야가 간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필승은 확신했다.
“대충 알 것 같네요.”
“정말요?”
이렇게 만나자마자 원인을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백야의 기대 어린 시선이 필승을 향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선 전혀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도플갱어.”
“…네?”
“아니면 외계인? 제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한 외계 생명체와 만나신 게 틀림없어요!”
백야가 멍청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남의 일이라고 너무 아무거나 갖다 붙이는 거 아닌가.’
백야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네에…. 그래요. 제가 미친놈 같아 보이시겠죠…. 하지만 저는 지금 진짜 사실만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네. 믿어요. 3년 전으로 돌아오셨다면서요. 아무래도 타임 슬립 하신 것 같은데.”
“타임 슬립이요? 뭐, 맞긴 한데….”
하지만 평범한 타임 슬립이라기엔 매번 나타나는 상태창과 잦은 오류, 말 같지도 않은 퀘스트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전 단순히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라 게임 속….”
“잠시 이걸 봐 주시겠어요?”
그때 필승이 백야의 말을 끊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영어로 된 한 논문이 띄워져 있었다.
“우주에는 수많은 시간선이 존재해요. 시간선이 겹치지 않아서 만나지 못하는 것뿐이지, 다른 차원에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이름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내용이에요.”
스크롤을 내리자 흑백의 외계인 사진이 보였다. 낯선 남자에게서 오컬트 마니아의 냄새가 났다.
“오….”
“개발 초기 단계에 제가 개인적으로 빠져 있던 분야이기도 해요.”
그러다 그는 우연히 패럴렐 유니버스, 평행 우주와 타임 슬립에 관한 논문을 읽게 됐다고 한다.
“너무 흥미롭지 않아요?”
“우와…….”
관심 없는 분야였다.
그러나 성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리액션에 만족한 건지, 개발자는 해당 이론에 대해 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잠시만요. 그래서 그 패러글라이딩이랑 제가 게임 속에 들어온 거랑 무슨 상관….”
“패럴렐 유니버스요. 아주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요. 다른 차원에서 오신 분이잖아요.”
“누가요?”
“그쪽이요.”
“…제가요?”
청이랑 대화할 때보다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게 백야는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번에 퇴사한 것도 이쪽으로 더 깊게 파 보고 싶어서였고요. 그런데 그쪽이 정말 미래에서 왔고, 그 매개체가 이 게임이라면 결국 제가 해냈다는 뜻 아니겠어요?”
“…….”
“제가 차원과 차원을 잇는 문을 열었다는 거죠!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에요!”
그러니까 필승의 말을 정리해 보면, 본인은 원래도 유명한 오컬트 마니아였는데, 우연히 평행 세계와 타임 슬립에 꽂혔고, 당시 개발 중이던 게임 코드로 대충 건드려 봤는데 성공한 것 같다. 뭐 이건가.
‘그렇다면…. 이 사람이 나의 원수?’
필승을 바라보는 개복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제가 난시가 있어서.”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꼬리를 내렸다.
아닌 척 시선을 피하며 눈을 비비는 연기까지 완벽했다.
‘미치겠네.’
백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물론 필승의 추리는 그럴듯했다. 제게 벌어진 일은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든 현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사람이 세기의 천재라서 타임 슬립을 가능하게 하는 코드를 개발했다고 치자.
‘그러면 상태창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기대했던 만남이지만 필승도 제게 힘이 되어 줄 만한 사람은 아닌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죠. 흥분해서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그렇지 않아도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질문을 마지막으로 이 잘못된 만남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기대는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럼 게임을 종료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게 있을까요?”
“게임 종료요?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여쭤보시는 거죠?”
“네.”
“그거는….”
뭔가를 아는 듯한 눈치에 백야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 뭐, ‘돌아가기’ 이런 거 외치면 되지 않을까요?”
“염병….”
“네?”
“헉. 제가 뭐라 그랬죠?”
이래서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건가.
저희가 사고를 칠 때마다 민성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을 저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었다.
당황한 백야가 입술을 때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아니, 그, 제가 그건 이미 해 봤는데 잘 안 돼서….”
“아, 예….”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도 말하고 나서 좀 아니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미 시도해 보신 방법이라고 하니까 궁금증은 풀렸네요.”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백야가 입술을 물어뜯으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필승이 두 번째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방법을 제시했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모든 코드에는 시작 값이 있으면 끝값이 있거든요? 코드도 거의 유사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그러니까 과거로 되돌아오셨을 때 방법을 역으로 해 보면요? 앱을 삭제한다던가.”
“그 핸드폰이 저한테 없어요. 지금 제 폰에는 깔리지도 않고요.”
필승도 더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다 위로랍시고 한마디를 건넸다.
“그럼 그냥 아이돌 체험하신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때가 되면 돌아가지지 않을까요? 3년 번 셈 치고 다른 차원에서 놀다 가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그 순간 간신히 붙들고 있던 백야의 이성이 끊어졌다.
3년 번 셈 치라고?
어차피 때가 되면 돌아가?
개복치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앞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기요.”
“네.”
“지금 그런 무책임한 말씀이 어디 있어요? 제가 지금 이 거지 같은 시스템 때문에 하루에도 생사를 몇 번이나 오가는데!”
“잠시만요. 뭐, 거지 같은 시스템? 지금 제 코드가 거지 같다는 말씀이신가요?”
“툭하면 에러 나고, 업그레이드 하나도 제대로 못 하면 거지 같은 거 맞죠!”
“하. 와~ 나 잠깐만. 나 태어나서 이런 말 처음 들어 봐.”
필승은 열이 오르는 듯 앞섶을 펄럭이며 손부채질을 했다. 백야도 화가 단단히 난 듯 콧바람을 내뿜었다.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하고, 계단 내려가다 죽을 뻔하고! 며칠 전에는 손가락 베여서 죽을 뻔했어요. 이게 어딜 봐서 아이돌로 살아남기예요!”
그러자 발끈해서 반박하려던 개발자가 멈칫했다.
“맞아요. 그거 원래 아이돌 게임 아니었어요.”
“…뭐라고요?”
“원래 육성 게임이 아니었다고요. 지옥에서 살아남긴가? 중간에 기획이 엎어지는 바람에 아이돌 육성 게임 된 건데.”
그러나 주인공이 아이돌로 바뀌고 배경이 바뀌었을 뿐. 전체적인 뼈대는 그대로라 퀘스트가 크게 바뀌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내가 퇴사할 때도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게임 망할 거라고 했는데. 사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거든요.”
필승은 역시 퇴사하길 잘했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면 백야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턱에 호두가 한 알 생기더니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도 이 사람만 다시 만나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못내 충격적인 듯했다.
‘그럼…. 진짜 죽거나 헤어지는 것밖에 없다는 거네.’
순간 멤버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어. 왜, 왜 울고 그래요?”
“흐끅. 안 울어요….”
쇄골 위로 얹어진 수건 끝자락을 쥔 백야가 눈두덩이 위로 덮으며 얼굴을 가렸다.
“씨이…. 이따 스케줄 가야 되는데….”
평소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필승은 허공에 손을 머뭇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눈물을 보는 순간 인간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우, 울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끄흐…. 네?”
“어떻게 도와드릴지는 저도 알아봐야 하는데, 어쨌든 도와드릴 테니까 제발 그만 울어요.”
과연 S급 패시브.
병약미는 대단했다.
* * *
‘무슨 일 생겼나?’
한편 미행에 실패한 지한은 불이 꺼진 거실에 앉아 초조해하고 있었다.
현재 시각 4시.
1시에 나간 백야는 4시가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설마 납치당한 건 아니겠지.’
개발자를 사칭한 보이스 피싱 아냐?
설마… 인신매매단에 잘못 걸려서 어디 중국행 배에 실려 가는 중인가?
그럼 걔를 어떻게 빼내 와야 하지?
‘당장 112에 신고를…!’
지한의 상상력이 무럭무럭 자라나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을 때쯤, 도어 록 소리가 울렸다.
삑삑삑-
적막을 깨는 소음에 지한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듯 제자리를 왔다 갔다 허둥거리던 그는 곧장 방문을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