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232화 (232/340)

제232화

‘인기척을 들은 것 같은데.’

빼꼼.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백야가 긴장한 상태로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고요하기만 한 숙소.

‘기분 탓인가.’

동태를 살피던 백야는 도어 록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았다.

달칵-

가출 햄스터가 제 발로 돌아왔다.

‘쉿. 쉿!’

도어 록이 잠금 상태로 바뀌며 소리를 내자, 하얀 손이 기계를 가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이래서 죄짓고는 못 산다는 건가.’

멤버들 몰래 새벽 마실을 다녀왔을 뿐인데 이렇게 양심이 찔려서야.

백야는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현재 시각 4시.

남경이 6시에 데리러 오기로 했으니까 슬슬 멤버들이 일어날 시간이었다.

벗어 놓은 옷을 몰래 구석에 쑤셔 넣은 백야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러다 문 앞에 서 있는 저승사자와 마주쳤다.

“으갸읍!”

멤버들이 깰까 봐 황급히 입을 틀어막은 백야는 거친 숨을 쉬며 검은 정체를 확인했다.

“한백야.”

기다리다 지쳐 결국 밖으로 나온 지한이었다.

개복치가 놀란 눈을 뜬 채 가만히 굳어 있자, 그가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한백야.”

“…….”

“한,”

“조용! 조용히 해.”

다행히 저승사자가 이름을 세 번 부르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왜, 왜 벌써 일어났어?”

“그러는 넌. 어디 다녀와?”

“이, 이, 이 시간에 다녀오긴 어디일….”

백야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슬그머니 피했다.

“아~ 목마르다.”

지한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부엌으로 도망가는데, 저승사자가 뒤를 따라왔다.

“…왜 자꾸 따라와?”

“대답 안 했잖아.”

난감해진 백야는 눈알을 굴리며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대충 아무 말이나 둘러대려는데, 지한이 모르는 척 헛다리를 짚는 게 더 빨랐다. 그 덕에 개복치는 마시던 물을 그대로 뿜어 버렸다.

“여자친구 생겼어?”

“푸흡!”

얼굴 위로 내려앉는 천연 미스트에 지한의 얼굴이 굳었다.

“미안! 미안해…!”

키친타월을 뭉텅이로 뽑아 얼굴을 벅벅 문지르자, 지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백야의 손을 떼어 냈다.

“나는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됐어. 그냥 못 들은 거로 해.”

“…화났어?”

“내가 왜?”

화는 아니고 삐진 것뿐이었다.

* * *

누구보다 풍요로운 연말을 보내고 있는 나잉이들.

대상 수상에 이어 커뮤니티를 뒤집어 놓은 레전드 무대는 물론. 이제는 잘 익은 복숭아 하나가 나잉학살을 시도했다.

[쇼 플레이리스트 MC Special(백야, 단아) - All I Want For Christmas Is U]

우유즈의 인기를 아는지 쇼플리에서는 본방송이 끝나자마자 해당 영상을 업로드해 주었다.

- 선곡 돌았네

- 얘네가 이걸 부른다고??

해당 곡은 크리스마스 연금이라고 불리는 캐럴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 송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2절 하이라이트에선 돌고래와 대적해도 될 만큼의 엄청난 고음에 웬만큼 노래를 한다는 가수들도 섣불리 부르지 않는 곡이었다.

한 손씩 모아 하트를 만들고 있는 우유즈의 섬네일.

영상을 누르자 익숙한 오르골 반주가 재생되며 방긋 웃고 있는 백야가 나타났다.

얼음 성 콘셉트의 무대 위.

흰색 의상에 빨간색 제복 재킷을 걸친 흑발의 백야가 수줍게 서 있었다. 핸드 마이크를 쥔 그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

짧은 오르골 반주가 멎자, 유니크한 음색이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 I~ 하자마자 고막 살살 녹음

- 절경이네요 장관이고요 정말 신이 주신 목소리네요

- 백야 목소리 구슬 굴러간다

- is you~ 이 부분 카메라 가리키면서 끼 부릴 땐 언제고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ㅠㅠㅠ

무반주에 가까운 도입부가 끝나자 징글벨 소리가 울리며 경쾌한 반주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미니 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단아가 귀여운 산타 망토를 두른 채 등장했다.

- 키 단아한테 맞춘 거 같은데 2절 어쩌려고 이래?

중앙으로 걸어간 단아가 백야의 옆에 멈춰 서자, 전구에 불빛이 들어오며 무대가 더욱 화려해졌다.

- 백야 발음 개발린다;; 애기 앞으로 영어만 하자ㅠㅠ

- 복숭아 왜 영어 잘해?

- 미국 브이로그에선 백야 발음 되게 정직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원어민..?

└ 청이가 영어 공부 시킨다던데 그거 때문인가?

└ 청이 교육열 장난 아니라던데ㅋㅋㅋㅋ 자기 전에 영어 동화책도 읽어 준다고ㅋㅋㅋㅋㅋㅋ

└ 생활영어 하는 거랑 노래랑은 달라서 그런 듯

- 우유즈 완전 공주님 왕자님

여름 스페셜 무대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율동에 가까운 안무들이 주를 이뤘다.

간단한 스텝을 밟으며 골반을 살랑이는 귀여운 동작이 이어지길 잠시. 편곡된 캐럴은 곧장 2절 브리지로 넘어갔다.

높은 음인데도 불구하고 단아는 맡은 파트를 곧잘 소화해 냈다.

- 단아 노래 잘하는 거 좀 의외다

- 노래 잘하는 거도 유전인가 보네ㅋㅋㅋ 얘 토끼 사촌이라며

└ 단아가 민성이 사촌이라고요? 어디서 들으셨어요?

└ 단아 엄마랑 민성이 엄마, 민성이 셋이 같이 있는 사진 찍히고 둘이 상견례를 했니, 곧 결혼이니 말 많았는데 민성이가 고모라고 부르면서 열애설 일축시킴

└ ㅇㅇ 둘이 사촌 맞음

└ 그럼 사촌이랑 열애설 났던 거? 진짜 끔찍하다ㅋㅋㅋㅋㅋ

- 민성이랑 열애설 오만 개 올라오는데 ID 관심 1도 없는 거 보면 모르겠냐

- 사촌이라는 거 듣고 보니까 그냥 머리 긴 민성인데요??? 이걸 지금까지 왜 몰랐지ㅋㅋㅋㅋ

단아의 브리지 파트가 지나자 백야가 곧장 다음 파트를 이어받았다.

한 소절 한 소절 바뀔 때마다 단계를 쌓아 가듯 점점 높아지는 음.

곡을 통틀어 최고 높은음을 앞두고 있는 만큼 상당한 고음 구간이었으나, 미소를 머금은 입꼬리와 해맑은 얼굴엔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곡의 클라이맥스를 가성으로 처리하는데, 그 순간 무대 위로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며 영상 최고의 하이라이트 구간이 탄생했다.

- 어떻게 사람 음색이 백두산 청정 원시림의 맑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화산 암반 용천수

- 진성 가성 고음 자유자재로 내는 거 봐... 야리아나 그란데에 이은 머라이어 백야

- 음기 복숭아 보는 무대마다 레전드ㅠㅠㅠㅠ

- 음색 원래도 미쳤는데 가성으로 부르면 치트키 쓰는 기분

- 왕자의 재롱에 그저 눈물만 흐름ㅜㅜ 한백야 아이돌 평생 해...

- ID 양심 있으면 백야 캐럴 하나 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남은 반주 구간에서 팔짱을 끼고 율동을 선보이던 우유즈는 손 하트를 마지막으로 무대를 끝냈다.

- 크리스마스 무대 중 최고였음

- 솔직히 이건 쇼플리에서 음원으로 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01:54 웃는 거 존잘이네...

- 우유즈 그냥 데뷔해... 데뷔해 줄 거 아니면 매주 스페셜 스테이지 해주든가ㅜㅜ

우유즈의 캐럴 영상은 빠른 조회 수를 얻으며 단번에 인기 동영상으로 급상승했다.

* * *

[개발자님 : 지금 어떤 퀘스트 하고 계세요?]

원래도 비밀이 많은 개복치는 요즘 들어 숨기는 게 더 많아졌다. 필승과의 연락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나 : 저 지금 <천재 아이돌(4)> 하고 있어요!]

[개발자님 : 확인해 볼게요.]

필승은 퇴사를 번복했다.

백야의 눈물 때문은 아니었고, 미래의 자신이 성공해냈다는 믿음 하나로 다시 복귀를 결심했다고 한다.

겸사겸사 백야를 더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게 된 그는 소스를 통해 게임이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파악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개발자님 : 꽤 진행하셨네요. 곧 연기 퀘스트가 뜰 거예요.]

병약 미소년의 눈물에 홀린 사람답게, 필승은 약속대로 적극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백야에게 필요한 건 이런 퀘스트 진행 순서 따위가 아니었다.

[나 : 그건 이미 떴는데...]

[나 : 혹시 퀘스트 순서 말고 돌발 이벤트가 언제 뜨는지는 알 수 없을까요?ㅠㅠ]

물론 퀘스트도 중요하긴 했지만, 이보다 성가신 건 언제 뜰지 모르는 돌발 이벤트였다.

항상 사고 직전에 떠서 달리 대처할 방법도 없이 당하기만 했는데, 이번 기회에 타이밍이라도 알 수 있게 된다면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개발자님 : 가능해요. 잠시만요.]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기대에 부푼 개복치가 설레는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그를 본 남경이 수상하게 여겼다.

평소 핸드폰을 잘 하지도 않던 애가 요즘은 손에서 떼어 놓질 않으니 의심을 사는 것도 당연했다.

“수상하단 말이야….”

“모야.”

마침 다가온 청이 남경의 시선을 따라가자 백야가 보였다.

“왜 햄스터 훔쳐보나.”

“청아, 백야 요즘 숙소에서 어떠냐.”

“모가.”

“숙소에서도 계속 핸드폰 하지? 막 저렇게 웃고?”

“Yes.”

“일 났네, 일 났어.”

남경은 백야의 연애를 확신했다.

단아인가?

쟤 주변에 여자 사람이라곤 단아밖에 없었다.

남경은 제 눈에 흙이 들어와도 단아는 절대 안 된다고 피를 토하던 민성이 생각났다.

“쟤 감시 잘해라.”

“남경 스토커야? 백야 트라우마 있어.”

청의 경계 어린 눈빛이 남경을 아프게 찔렀다.

“아니, 스토킹을 하라는 게 아니라 어디서 이상한 짓 하고 다니진 않는지 잘 지켜보라고.”

“햄스터 착해!”

“그래, 쟤 착한 거 나도 아는데,”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수상한 짓을 하진 않는지 지켜보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눈앞의 햄스터 광인은 백야를 욕하는 거냐며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근데 너 백야만 싸고도는 거, 그것도 병이야.”

“No! 나 건강해!”

“아니. 그 병이 아니라,”

참자. 참아.

청과 대화를 하려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했다.

“그게 아니라, 혹시라도 백야가 밤에 몰래 나가진 않는지 잘 지켜보라고. 방송국에서도 옆에 딱 붙어 다니고.”

청은 남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야의 옆으로 가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뭐야?”

“남경이 붙으래.”

역시나. 누가 다가오자 핸드폰 화면을 잠금한 백야가 어색하게 남경을 바라봤다.

“왜요?”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말아 문 남경이 말없이 백야의 어깨를 꾹 쥐었다 놓기만 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핸드폰을 압수하면서까지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그는 동생의 연애를 응원해 주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다 좋은데 들키지만 말아라. 알지?”

“네?”

뭘 들키지 말라는 건지.

눈새는 감도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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