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234화 (234/340)

제234화

드르륵-

백야가 갑자기 의자를 밀며 일어나자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멎었다.

“저…. 잠시 전화 좀 받고 와도 될까요? 엄청 기다리던 연락이라.”

“어? 어어. 다녀와.”

불편해서 도망가는 건가.

후배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수련과 영삼은 머쓱해졌다.

한편 대기실을 나온 개복치는 비상계단 문을 열고 나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백야예요.”

[아, 죄송해요.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확인이 늦었어요. 연락 남겨 놓으셨던데.]

아니라며 빈말을 한 백야는 통화음을 낮추며 은밀히 속삭였다.

“혹시 제가 부탁드린 건….”

[그거 알아봤는데 관객 15,000명 이상, 무대 위가 조건이에요.]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요? 못 피하면 그냥 죽는 거예요?”

[원래 살아남기 게임이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필승은 공연 중 조명이 떨어지는 이벤트 같은데, 전에도 말했다시피 정확한 타이밍은 알 수 없다고 했다.

까딱하다간 머리가 깨질지도 모를 상황에 백야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피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고요? 저 이번엔 정말 자신 없어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필승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네요. 조심하시는 수밖에….]

백야는 힘이 빠지는 듯 계단에 웅크려 앉았다.

아무 말 없이 흉터가 남은 엄지손가락을 쓸어내리는데 필승이 먼저 정적을 깼다.

[그냥 당분간 사람 많은 곳은 피해 다녀요.]

“아이돌이 가는 곳에 사람 없으면 그게 천재 아이돌이에요? 망돌이지….”

백야가 볼멘소리로 속상한 티를 냈다.

[지금 어디예요.]

“방송국이요….”

[거긴 또 왜 갔어요?]

“왜 오긴요? 스케줄 하러 왔죠. 안 죽으려고….”

[하아. 거기 오늘 15,000명 넘게 모일 것 같아요?]

“아니요. 오늘은 아니에요.”

[그럼 시상식 끝나고 한 번 더 뵙죠.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저 멤버들 몰래 나가려면 새벽밖엔 안 되는데….”

[백야 씨 편한 시간으로요. 장소는 지난번 거기. 날짜랑 시간은 알려 줘요.]

“감사합니다.”

통화를 종료한 백야가 무릎에 고개를 파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툭-

그러다 위층에서 들린 작은 인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가 있나?’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가 황급히 계단을 올라가 보지만 계단은 텅 비어 있었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살핀 백야는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이제는 다시 대기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힘없이 처진 어깨가 비상문 너머로 사라졌다.

끼익, 달칵-

그런데 문이 완전히 닫히자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우웁, 파하! You! 나를 죽이려고!”

아래층 계단. 반대편 벽에 바짝 붙어 숨죽이고 있던 청과 유연이었다.

가위바위보에 진 벌칙으로 매점에서 간식을 사 오던 막내즈는 만원 엘리베이터를 피해 계단을 택했는데. 마침 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반려동물의 목소리를 알아챈 청은 곧장 백야를 부르려 했지만, 유연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샌드위치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숨는데?’

‘아, 잠깐만 있어 봐.’

그렇게 백야의 통화를 엿듣게 된 두 사람.

중간에 들킬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상대가 허술한 개복치였기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야, 너도 들었지.”

“모가.”

유연이 바닥에 떨어진 샌드위치를 주우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통화 내용 같이 들었잖아.”

“Yes. 햄스터 Threat 받고 있는 거 틀림없다.”

“협박?”

청도 다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너도 들었지? 분명 죽는다 그랬어.”

막내즈가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혹시 강남 마법사…?”

“야, 자꾸 그 사기꾼 얘기 꺼낼래? 거기서 들은 이야기는 다 잊으라 그랬지.”

“치. 근데 햄스터 몰래 나간다 그랬는데 어떡하나.”

“따라가야지 바보야.”

“시간도 모르면서!”

“다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유연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 * *

일산 희망센터 앞.

검은색 롱패딩으로 무장한 뉴나잉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죄유연 : 민성노예님 저 도착했어요! 흰색 롱패딩에 사슴 에코백 메고 있습니당]

웬만한 콘서트보다 가기 어렵다는 연말 시상식 방청에 당첨된 뉴나잉.

유연을 최애로 두고 있는 그녀는 RT 이벤트로 돌린 초면의 나잉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혹시 유죄유연 님?”

“앗. 민성노예 님?”

“네! 맞아요. 처음 뵙겠습니다.”

두 나잉이의 어색한 통성명이 이어졌다.

원주에서 왔다는 민성노예는 유명 빵집에서 공수해 온 선물을 건네며 마음을 전했다.

“이거 복숭아 빵이에요. 제가 빈손으로 오긴 좀 그래서.”

“세상에. 이런 거 안 주셔도 괜찮은데….”

원래도 유명한 빵이지만, 복숭아로 모에화되는 백야 덕분에 나잉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아이템이었다.

“잘 먹을게요. 노예 님.”

“넵. 저는 유죄 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네, 네. 편하게 불러 주세요.”

호칭 정리까지 완벽하게 끝낸 두 사람은 방청권 교환을 위해 티켓 배부처로 향했다.

인증 절차를 마친 후, 입장권으로 교환한 두 사람은 곧장 공개홀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작은데요?”

“와…. 저기 가운데 스탠딩은 진짜 바로 앞이네요. 애들 모공까지 다 보이겠어요.”

이미 입장을 마친 스탠딩 존은 얼핏 봐도 홈마가 90% 이상이었다.

두 사람의 자리는 2구역 10열.

스탠딩의 바로 뒤 구역이긴 했으나, 사이드의 제일 마지막 줄인 데다 출입 통로와 훨씬 더 가까웠다.

“스탠딩이면 좋았을 텐데….”

유죄 나잉이 아쉬움에 혼잣말을 되뇌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생각보다 더 구석진 느낌에 속이 상하려던 찰나, 노예 나잉이 말을 걸어왔다.

“유죄 님, 이것 좀 보세요.”

SNS에서 빠르게 공유되고 있는 M사 가요대전의 큐시트였다.

- 오프닝에 전 출연진 본무대+돌출 (큐시트 사진.jpg)

└ M사 희망센터 돌출은 좌석 한가운데 있잖아ㅋㅋㅋㅋ 돌출에 누가 나오는지가 중요

“돌출이 저기 말하는 걸까요?”

유죄 나잉이 중앙의 흰색 바닥을 가리켰다.

4구역의 바로 앞에 꽤 넓은 공간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저곳이 돌출 무대인 게 틀림없었다.

‘4구역도 좋겠다….’

4구역 좌석의 중앙에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다른 구역보다 자리가 훨씬 적었지만, 돌출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라 그런지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저희는 뒤돌아보면 보이잖아요.”

“그건 그래요.”

긍정 노예 덕에 유죄 나잉의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사이좋게 복숭아 빵을 하나씩 나눠 먹으며 티켓 인증 사진을 찍는 사이, 홀 입장이 마감되며 문이 닫혔다.

“헉. 이제 시작하나 봐요!”

노예 나잉이 호들갑을 떨며 나잉봉의 전원을 켰다.

각양각색의 팬 라이트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며 공연장이 화려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생방송 5초 전을 알리는 스태프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무대 위 조명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꺄아아악!”

메인 카메라에 빨간색 불이 들어오며, 전 출연진이 함께 부르는 오프닝 곡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본무대에 설치된 전면 스크린이 좌우로 열리며 흰색 슈트를 입은 BB9이 첫 번째로 등장했다.

선두에 선 금일이 한껏 멋있는 표정을 지으며 도입부를 부르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어느새 우리 함께한 시간이

이렇게 쌓였는지

다른 멤버들은 리듬을 타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짧은 소절이 끝나자 다음 파트를 맡은 그룹이 등장했다. 본무대의 왼쪽에서 리프트를 타고 등장한 두 번째 팀은 어거스트.

연차가 낮아도 인지도가 있는 팀 위주로 등장하는 모양이었다.

“저희 애들도 곧 나올 것 같아요.”

유죄 나잉이 나잉봉을 흔들며 데이즈를 기다리는데, 이어서 등장한 그룹은 식스에이엠이었다.

“아….”

그러다 네 번째 팀이 반대편 출입 통로로 등장하는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미친. 글래시!”

“글래시라고요?!”

걸그룹임에도 여성 팬 비율이 높아 팬덤 규모가 상당히 큰 그룹이었다.

데이즈의 직속 선배이기도 한 그룹의 등장에 노예와 유죄 나잉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돌출 무대로 걸어 나온 글래시는 중앙에 자리 잡으며 맡은 파트를 소화했다.

그 덕에 뒷좌석에 앉은 이들 대부분이 몸을 돌려 앉아 눈앞의 요정들을 구경했다.

“미친…. X나 예뻐.”

유죄 나잉도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저희 쪽에서도 누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제발 데이즈. 제발.’

그러나 다음 팀도, 그다음 팀도 연이어 본무대에서만 등장했다. 이쯤 되니 데이즈도 본무대에서 등장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글래시나 구경하자.’

혼자 기대하다가 혼자 실망한 유죄 나잉이 몸을 완전히 돌려 앉을 때였다. 두 사람과 가까운 출입 통로의 천막이 걷히며 교복을 입은 무리가 등장했다.

- 내가 갈게 너에게로

반짝 빛을 내 길을 밝혀줘

첫 음절을 듣자마자 심장이 반응하는 목소리.

핸드 마이크를 쥔 민성이 선두에서 노래하며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Almost Paradise~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멤버들을 줄줄이 달고 나타난 토끼는 정확히 노예 나잉의 앞에 멈춰 섰다.

귓가에선 모 드라마의 메인 테마곡이 자동으로 울려 퍼졌다.

- 나를 보면 환하게 웃어 줄래

노래하는 토끼 옆에서 보조개를 지으며 방긋방긋 웃고 있던 유연과 유죄 나잉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헉.”

코앞에서 쏟아지는 후광에 유죄 나잉이 숨을 멈추자, 유연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