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괜히 입방정을 떨어서 제한 시간 페널티를 받게 된 백야는 꼼짝없이 연기 활동까지 병행하게 생겼다.
‘콘서트랑 컴백도 해야 하는데.’
이 연약한 몸뚱어리로 연기까지 도전했다가 과로로 죽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내일 출근하면 알려 주려나….’
거울에 비친 남경을 힐끔거리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스케줄 수첩을 뒤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고개를 든 남경과 눈이 마주치며 어색한 웃음이 오갔다. 남경이 스케줄을 조율 중인 사람은 아무래도 제가 맞는 것 같았다.
* * *
스튜디오로 이동한 백야는 촬영 콘셉트와 콘티 설명을 듣고 조금 난감해졌다.
멤버들도 당황했는지 입술을 말아 문 채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햄스터야. 드래곤이 왜 나오나…?”
“나도 몰라….”
광고에도 유행이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게 B급 감성의 병맛 광고였는데, 그런 걸 저희가 찍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여장할 분이 한 분 필요한데.”
콘티를 설명해 주던 조감독이 데이즈를 바라봤다. 그 순간, 백야를 제외한 다섯 명이 동시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 그럼 백야 씨가 하는 거로.”
“네?”
갑자기 지목당한 백야가 옆을 돌아봤다. 언제 뒤로 빠진 건지 멤버들이 각기 다른 곳을 보며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이런 의리 없는…!
“자, 잠시만요! 잠깐만.”
“그럼 시간 없으니까 서둘러 주세요.”
대충 콘티를 봐서 알겠지만, 촬영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총 일곱 명.
‘여고생’이라고 적혀 있길래 당연히 다른 출연진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저희 중 한 명이 여장을 해야 하는 거였다니.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아니, 이러기야? 너희 짰어?”
“그럴 리가~ 감독님께서 인재를 알아보신 거지. 네가 우리 팀의 마스코트잖아.”
율무가 건치를 보이며 엄지를 척 들었다.
그러나 멀쩡한 센터를 놔두고 자신이 왜 팀의 상징이 된단 말인가.
납득할 수 없었던 백야는 다시 뽑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멤버들은 물론, 감독과 스태프, 매니저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그래도 이 중에서는 네가 그나마 제일 낫지 않을까…?”
남경이 소신 발언을 하자 몇몇이 동의하며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
“율무는 저 덩치에 여장해 봐라. 어우…. 난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키 186cm의 다부진 체격.
가발을 씌우고 영혼을 갈아 넣어 꾸민다 한들 우스꽝스러워 보일 게 분명했다.
그야말로 탈덕 출구 대오픈!
본인도 박한 평가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주억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당백이가 원한다면 난 치마도 입어 줄 수 있지~ 그치만 징그러운 걸 꼭 눈으로 봐야 알겠어?”
치마를 입은 율무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래. 율무차는 패스. 내 눈은 소중하니까.’
백야의 시선이 옆으로 향하자 이번에는 지한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는 어렸을 때 여장하고 다녔다 하지 않았나?’
지한도 개복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듯 느릿하게 혀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모습이었다.
“넌 경력자잖아.”
“사실 나에겐 트라우마가 있어.”
“What?!”
마찬가지로 둘러댈 핑계를 생각하던 청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지한을 돌아봤다.
내가 하려고 했던 건데…!
선수를 빼앗긴 청이 아쉬워했다.
“난 그때 이후로 긴 머리를 못 해.”
어릴 적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놀림을 심하게 당했다는 그는 ‘장발 트라우마’가 있다며 PTSD를 호소했다.
‘언제는 머리카락 기부라는 뜻깊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더니?’
백야가 못 믿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지한은 이마를 짚으며 율무의 어깨에 기댔다.
“어어, 지한이 괜찮아?”
“조금 어지럽네….”
율무와 지한은 제법 쿵짝이 잘 맞았다. 어깨를 감싸며 적당히 걱정하는 척 거들어 주자, 개복치는 금세 속아 넘어갔다.
‘어떡해, 진짠가 봐….’
지한이 아픈 걸로 거짓말할 애는 아니었기 때문에 백야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다음은 유연.
“솔직히 네가 센터잖아. 실장님이 네가 우리 팀 얼굴이라 그랬는데.”
제법 청순하게 생겼으니, 넌 여장을 해도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떠넘기려 했다.
그러나 잠깐 사이 백야의 B컷 폴라로이드로 거래를 마친 덕진이 지원 사격에 나섰다.
“저…. 센터라서 오히려 피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팀의 얼굴인 만큼 이미지 소비를 최대한 아끼는 게 좋지 않겠냐 하자, 몇몇 스태프들이 동조했다.
“씨이….”
그러는 저는 이미지 소비를 해도 된다는 말인가.
폴라로이드에 눈이 멀어 유연의 편을 든 덕진은 최애에게 단단히 찍혀 버렸다.
아무튼 그리하여 유연도 패스. 이제 남은 사람은 민성과 청뿐이었다.
“그럼 청이는!”
“No!”
백야는 둘 중 좀 더 만만한 청을 잡고 늘어지기로 했다.
“네가 막내잖아! 원래 이런 건 막내가 하는 거야!”
백야가 꼰대력을 발산하며 빼액 소리 질렀다.
그러나 청은 최근에 있었던 M사 가요대전의 걸그룹 스테이지를 앞세워 위기를 모면했다.
“나 한 번 했어! 걸그룹 스테이지 하면 안 시킨다고 약속했어!”
그러고 보니 청은 이미 한차례 형들에게 등 떠밀려 제 한 몸을 희생한 전적이 있었다.
“나한테 걸그룹 또 시키면 시키는 사람이 막내 하기로 약속했어! Do you remember?”
기억나고말고.
어떻게 지켜낸 형아 자리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양보할 수는 없었다.
“고, 공평하게 해야지. 너는 한 번 했으니까….”
흐린 눈으로 청을 지나친 백야는 이제 민성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 이런 건 원래 제일 작은 사람이 하는 거야.”
“형은 나랑 같이 쪼꼬미 라인이잖아!”
그대로 돌려받은 꼰대짓에 백야가 발끈하며 받아쳤다. 그러나 민성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떼잉….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거대 토끼는 자신은 180cm를 넘어 그 라인을 탈퇴한 지 오래라며 선을 그었다.
“아니거든? 팬분들이 아직 형이랑 나 묶어서 그렇게 부르거든?”
백야도 이번에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한 번 쪼꼬미는 영원한 쪼꼬미!
한쪼영쪼를 외치며 민성을 끌어들이려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감독이 돌아오며 상황이 정리됐다.
“백야 씨.”
눈썹을 긁적이며 뜸을 들이는 게 달갑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 광고 측에서 백야 씨를 콕 집어서 말씀하시네요.”
“…뭘요?”
“가발 한 번만 씁시다.”
“아싸!”
“힝.”
희비가 엇갈렸다.
* * *
- 타 팬 친구가 올공 대관 내역 검색하다가 이런 거 발견함. 나 김칫국 좀 마셔도 돼??? (데이즈 올림픽 공원 대관 내역 캡처.jpg)
└ 미친 이거 어디서 볼 수 있어요?
└ 올공 홈페이지에 나와 있어요~
└ 데이즈 콘서트 해요???
- 애들 인생 첫 단콘이잖아 ㄹㅇ 무조건 가야 함
- 올공 체조 1월 ~ 5월까지 대관 예약 현황! 이 중에 애들 단콘 일정 있길 제발 (기도 이모티콘) 내 자리도 있기를...
- 콘서트하기엔 곡 수가 좀 적은 느낌인데 중간에 솔로 무대도 넣으려나?
- 나잉봉 뜬금없이 내준다 싶었는데 역시 ID
- 데이즈 콘서트 양도 미리 구해요ㅎㅎ 스탠딩 선호하지만 모든 좌석 다 받습니다...
└ 벌써 구한다고?ㅋㅋㅋㅋ
└ 티켓팅 어차피 성공 못할 테니까ㅜㅜ
발 빠른 팬들 사이에서는 데이즈의 콘서트 소식이 알음알음 돌기 시작했다. 덕분에 회사는 아침부터 팬들의 문의 전화로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홍보팀에서는 ‘전달받은 사항이 없다’는 말로 일관했으나, 팬들 사이에서 데이즈의 콘서트는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 콘서트 시작 전에 암전됐다가 갑자기 불 켜지면서 천장에 달 모형 뜨고, 첫 곡으로 NAN ‘언더 더 문 라잇’ 하면서 민성이 목소리 나오면 카타르시스 오질 것 같음
-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시작 전에 다 같이 떼창하다가 갑자기 암전되고, 오프닝 VCR 끝나자마자 웅장한 나팔소리 울리면서 애들 실루엣 + 청이가 저음으로 Are you ready? 하면서 반주 시작
- 백야 4단 고음 콘서트에서 라이브로 들을 생각하니까 갑자기 소름 돋음...
- ☆긴급 속보☆ 애들 요즘 녹음하나 봐! 오늘도 녹음실 왔다 갔대
- 백야 귀여워하는 선배분 인하트에 복숭아 녹음하는 사진 올라 왔어요ㅠㅠ (비니 백야.jpg)
└ 콘서트다... 이거 진짜 콘서트야
- 오늘부터 대출 이자 낮은 곳 천천히 알아봐야겠다 (거지 짤.jpg)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나잉이들은 데이즈가 컴백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대환이가 앨범 프로듀싱 맡기로 했다며?”
쇼플리 스케줄을 마치고 사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네. 어차피 할 거 남의 손 타는 거 싫다고 전곡 다 봐준대요.”
“와……. 걔가 절대 그럴 애가 아닌데.”
대환을 잘 아는 남경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아닌데? 대환이 형 엄청 착한데.”
“네 앞에서만 착한 척하는 거고.”
백야의 주변엔 여우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유닛은 누구랑 할지 정했고? 오늘 저녁에 너희 회의하기로 했다며.”
청의 사주를 받은 남경이 넌지시 백야를 떠보았다.
“네. 정했어요.”
“그래? 누구랑 하려고?”
순순히 대답하려던 백야는 남경이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 같자 입술을 다물며 배시시 웃었다. 며칠 전, 광고 촬영장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 주지 않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소심한 복수를 하기로 했다.
“궁금하세요?”
“어? 아니, 뭐 그냥….”
아닌 척하지만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에 백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맞은편 차량에서 대환이 내려주기까지 하니 핑계 또한 완벽했다.
“저는… 어? 대환이 형이다!”
햄스터가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