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진짠데….”
물론 백야가 굉장히 작고 약한 건 맞지만, 너희 생각만큼 나약한 놈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간 유연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 것 같았기 때문에 지한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신 이 사태의 원흉인 개복치를 노려봤다. 대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백야는 청의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
“청아, 미안해. 아팠어? 응? 나 좀 봐….”
“No.”
백야가 보자는데 No라니.
생긴 것만 무섭지 마음은 한없이 여린 놈이라 제대로 상처받은 듯했다.
“청아, 그거 너한테 한 말 아니고 대환이 형이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그런 건데….”
말하다 보니 대환을 탓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사실이니까.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청 때문에 백야의 속만 타들어 갔다.
“청아. 청아? 청아아….”
급기야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자 백야는 사색이 됐다.
‘내가 울린 건가.’
멤버에게 상처를 준 것도 모자라 울리기까지 하다니.
자신은 쓰레기라며 백야도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일이 갑자기 왜 이 지경이 된 건진 모르겠지만, 얼굴만 봐도 백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민성은 일단 둘을 떨어뜨려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아. 잠깐 나갔다 오자.”
결국 리더가 중재에 나섰다.
막내의 어깨를 감싼 민성이 연습실을 나서며 백야에겐 괜찮다며 눈짓했다.
물론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이해되진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멤버들도 비슷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배웅했다.
“청이 뭐 좀 마실래?”
민성이 동생의 어깨를 토닥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깨가 아래로 기울더니 청이 능숙하게 민성의 품을 벗어났다.
“Nice.”
고개 든 청은 꽤 신이 나 보였다.
“……?”
민성이 황당한 얼굴로 청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주먹을 움켜쥐며 승리를 예감하는 듯한 포즈. 눈이 마주치자 청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민성은 왜 속나? 바보네, 바보.”
“…뭐 인마?”
“나 햄스터랑 유닛 각이다.”
여리긴 개뿔.
혹여나 백야가 유닛을 하기로 마음먹은 멤버가 자신이 아닐까 봐 마지막까지 꾀를 부린 것이었다.
“이거 진짜 큰일 날 노, 우웁!”
“Shh.”
큰소리를 듣고 백야가 나오기라도 하면 어쩌냐며 청이 민성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우웁! 으읍!”
“Shh. 민성은 조용히 죽어 줘야겠어.”
늑대에게 물린 토끼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구석으로 쑤셔졌다.
* * *
그날 저녁.
데이즈 숙소에서는 오랜만에 가족회의가 열렸다.
“청아,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알지?”
“…….”
청은 시무룩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바로 맞은편에서 민성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백야가 안타깝다기보단 아직도 상처받은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청의 모습이 가증스러워서였다.
“형 왜?”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에 팔짱을 낀 자세가 백야를 사로잡았다. 개복치가 관심을 보이자 청의 눈빛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파닥파닥-
백야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 청이 경고 사인을 보냈다.
“어휴. 내 팔자야. 됐다. 됐어.”
한숨을 크게 쉰 민성이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돌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며 비밀 엄수를 강요당한 민성은 허접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는데. 비밀 발설 시 공식 계정에 무시무시한 사진을 올릴 거라며 협박하는 바람에 일러바칠 수도 없었다.
“자, 집중! 다 모였, 염병. 하나는 또 어디 갔니?”
“화장실.”
지한이 왼편을 가리키자, 한 놈이 오면 한 놈이 사라진다며 민성이 열받아 했다.
“율무 왔어용~”
일부러 손에 물기를 묻히고 온 장난꾸러기가 민성의 등에 손을 닦았다.
“뒈지고 싶니?”
“아잉. 형이 좋아서 그러지~”
“그래. 빨리 좀 앉아 줄래?”
민성이 이를 악문 채 바닥을 두드리자 율무가 잽싸게 무릎을 꿇었다.
“회의 한 번 하기 정말 힘들다.”
“시작, 시작~”
오늘의 회의는 유닛 멤버 구성과 ‘백야의 룸메이트!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가 주요 안건이었다.
“먼저 유닛부터 정하고 하자.”
“좋아용~”
율무가 박수를 치며 호응해 주었다.
“각자 생각해 둔 사람이 있겠지만, 그전에 어떤 무대를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눠 보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누구와 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보나 마나 한 사람의 이름만 나올 것 같으니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결과였다.
“나는 내가 좀 더 잘하는 걸 보여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듀엣 무대를 생각 중인데. 혹시 생각 있는 사람 있어?”
민성이 백야를 보며 말했다.
팀의 메인 보컬인 만큼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손은 엉뚱한 곳에서 올라왔다. 율무였다.
“오~ 나랑 좀 겹치는데? 나도 피아노 치면서 노래하는 거 꼭 해 보고 싶었거든. 꼭. 꼭.”
피아노를 치면서 발라드를 부르는 건 모든 가수의 로망이 아닐까.
나름 비장의 카드를 준비해 온 율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백야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개복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이에 희망이 생긴 유연이 냉큼 끼어들었다.
“콘서트니까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 이때 아니면 언제 해 볼까 싶은 것들 있잖아.”
예를 들어 댄스라든가 댄스 같은.
연말 시상식에서 국화와 콜라보 한 무대를 좋아하던 백야였다.
언젠가 자신도 저런 무대를 해 보고 싶다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는 유연은 기대에 찬 눈으로 백야를 바라봤다.
“그래도 콘서트인데 예상 가능한 뻔한 무대보다는 파격적인 게 좋잖아. 안 그래?”
‘뻔하다’는 말로 민성과 율무를 저격한 유연이 보조개를 지으며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슬며시 끼어든 지한이 숟가락을 얹었다.
“랩 하면 파격적이겠네.”
절대 음감에 딕션도 좋고, 박자감까지 타고났으니 조금만 연습하면 싱잉 랩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며 지한이 영업을 시도했다.
“잠깐만. 형, 이건 경우가 아니지.”
“내가 뭘.”
“지금 내가 꼬시고 있잖아. 아무리 급해도 순서라는 게 있는 건데 사람 말을 이렇게 가로챈다고?”
“혼잣말이었어.”
민원이 들어오자 그가 성의 없는 변명을 둘러대며 물러났다.
그리고 이 순간까지 명연기를 펼치고 있는 한 사람. 고개를 숙인 채 우울한 얼굴로 옷자락만 만지작거리는 청이 있었다.
“나는 막내즈 유닛 하고 싶었는데….”
시무룩한 목소리.
외로이 울려 퍼지는 외국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중얼거린 탓에 그의 낮은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선명히 박혔다.
최근 영어에 귀가 트인 백야도 청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율무가 한 짓이 괘씸하긴 하지만, 처음 선택 그대로 율무와 유닛 무대를 할 생각이었던 백야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청의 마지막 한 마디가 여린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I’m Okay. 신경 쓰지 마….”
세상에서 제일 신경 쓰이는 한 마디였다.
* * *
[누구보다 백야 모에화에 진심인 멤버들]
데이즈의 활동이 끝나고 너튜브에 둥지를 튼 뱁쌔는 마음에 드는 제목의 영상을 발견했다.
백야의 옆에서 율무와 청이 볼을 찌르고 있는 모습의 썸네일이었는데. 그동안의 라이브 방송과 리얼리티에서 나왔던 모습을 편집한 영상 같았다.
‘이건 봐야 해!’
영상을 누르자 검은 바탕에 분홍색 자막이 떠올랐다.
[복숭아 버전]
데뷔 초에는 복숭아, 햄스터, 다람쥐, 오목눈이 등. 작고 귀여운 소동물 위주의 여러 파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복숭아와 햄스터, 단 두 개의 파만 메이저로 살아남아 멤버들 사이에서도 파가 나뉘었다.
먼저 복숭아 파.
첫 번째 영상은 하이틴 활동 당시 올라온 대기실 비하인드 영상의 일부분이었다.
[유연 : 백도. 밖에 네 친구 왔는데?]
[백야 : 내 친구? 누구?]
[유연 : 키 좀 작고 분홍색이던데.]
[백야 : 금일이? 아닌데, 금일이는 큰데.]
[유연 : 몇 번 봤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들어오라고 했는데 밖에서 기다리겠대. 네가 나가 봐.]
유연이 턱짓하자 백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래 영상을 촬영 중이던 유연이 카메라를 돌리자 뽈뽈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벌컥-
그러나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야 : 없는데? 갔나?]
[유연 : 거기 있잖아. 밑에.]
[백야 : 어디?]
백야의 고개가 아래로 기울자,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복숭아 한 알이 보였다.
[백야 : 아, 뭐야아!]
[유연 : 푸하하하! 친구 맞잖아~]
그때 소파에서 일어난 율무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백야의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율무 : 아이고~ 당백이 친구면 그냥 들어오셔도 되는데. 왜 차가운데 앉아 계세요? 얼른 들어오세요.]
율무가 복숭아를 향해 공손히 대기실 안쪽을 가리키는 장면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영상.
[율무 : 여러분~ 제가 인터넷에서 엄청난 걸 발견했어요.]
이번에는 K사의 연말 시상식 비하인드 브이로그의 일부분이었다.
회사에서 특별히 컬러로 인쇄해 왔다는 율무는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카메라에 비춰 주었다.
[복숭아 만지면 간지러워요]
[복숭아 사나워요]
[복숭아 까칠해요]
[복숭아 만지면 물어요]
하얀 바탕에 큼지막하게 쓰인 알록달록한 볼드체는 율무가 직접 만든 거라고 했다.
[율무 : 마트 가면 복숭아 진열대 앞에 붙여 놓잖아요. 저희 팀에도 꼭 필요한 거 같아서 제가 직접 준비해 봤죠.]
뿌듯해하는 화면 속 율무는 테이프를 들고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민성 : 뭐 하니?]
[율무 : 형, 테이프 좀 뜯어 줘.]
[민성 : 복숭아 만지면 물어요? 백야 거야?]
[율무 : 사람들이 우리 당백이 진짜 복숭아인 줄 알고 찔러 보다가 멍들면 어떡해~]
[민성 : 걱정도 팔자다. 야, 그리고 물면 햄스터지, 그게 어떻게 복숭아야.]
민성은 틱틱거리면서도 다정하게 테이프를 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