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오케이. 그럼 팀별로 어떤 무대 할지는 나랑 따로 이야기하자.”
“응.”
최대 난제였던 유닛마저 정리되자 남경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그럼 애들은 이제 가 봐도 되는 거죠? 녹음 일정이 있어서.”
“네. 데이즈는 가 보셔도 돼요.”
“고생하셨습니다~”
남은 회의는 무대 연출에 관한 부분이라 호랭이만 있어도 되는 건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멤버들이 허리를 꾸벅이며 회의실을 나섰다. 그러나 백야는 곧장 남경의 손에 붙잡혔다.
“백야는 잠깐 나 좀 볼까?”
“한백야만?”
“왜 햄스터만?”
하지만 잦은 사고 이후, 백야에 관한 일이라면 예민하게 구는 멤버들이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저까지 경계할 줄은 몰랐던 남경은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내가 얘 잡아먹냐? 나까지 못 믿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적은 가까이에 있어!”
“오~ 이제 한국인 다됐는데?”
“당근 하지!”
청과 유연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키득거렸다.
몰래 백야의 드라마 오디션 소식을 알리려 했던 남경은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백야에게만 이런 제안이 들어오는 게 다른 멤버들 입장에선 부러울 수도 있는 일이기에 조심스러운 것뿐이었다.
‘혹시 오디션 관련인가.’
백야도 퀘스트 완료 창을 통해 남경이 저에게 하려는 말을 대충 짐작했다.
아마 율무 때문에 저에게만 따로 말하려던 모양인데, 멤버들이 물고 늘어지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율무차가 연기 많이 하고 싶어 했으니까.’
백야도 자꾸 저에게만 개인 스케줄이 들어오는 게 조금 미안하던 참이었다.
‘아이돌 그룹은 완전체일 때 가장 빛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 팀의 균형이 무너져 불화설이 생기는 사례를 여럿 봤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백야는 팀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물론 멤버들이 하나같이 착해서 시기나 질투를 할 것 같진 않았지만, 속이 상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그래서 백야도 남경을 돕기로 했다.
“청아, 잠깐만.”
백야가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있는 청의 팔을 풀어내려 했다.
“왜. 당백이 개인 스케줄 들어왔어? 형, 우리 눈치 봐?”
눈치 빠른 율무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 눈치를 왜 봐?”
민성도 사실이냐며 되물었다.
“그게, 아직 확실한 스케줄도 아니고 백야 의사만 잠깐 물어보려고 했던 거라….”
남경이 횡설수설하자 멤버들이 더 거세게 반발했다.
“우리 그렇게 속 좁은 애들 아니거든? 백도한테 미안하면 미안했지.”
“우리 중에서 한백야 스케줄이 제일 많잖아. 얘 스케줄 조정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
“햄스터 또 아프면 고소할 거야!”
역시 소송의 나라. 미국인다운 협박이었다.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이번 거는 진짜 좋은 기회라서 너무 아까워서 그래.”
“얼마나 좋길래. 뭔데? 들어나 보자.”
민성의 말에 멤버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는 수 없이 비어 있는 회의실로 들어선 남경은 백야의 오디션 제의를 모두의 앞에서 발표했다.
“두 개 다 조연이긴 한데, 백야 앞으로 영화랑 드라마 제의가 들어왔어.”
기껏 해 봐야 하나일 줄 알았는데 두 개씩이나 들어오다니.
백야는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멤버들이 호들갑을 떨며 더 좋아했다.
“진짜!? 그럼 백도 배우 데뷔하는 거야?”
“햄스터야! 나는 무조건 머리에 갓 쓰는 거!”
“우리 애기! 아니, 당 배우 좋겠네~”
멤버들은 진심으로 축하하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자 덩달아 신이 난 남경이 오디션에 관해 떠들기 시작했다.
“하나는 시트콤 거장 김 감독님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덕후들 사이에서 영상미 맛집으로 유명한 최 감독님 작품이야.”
백야에게 들어온 역할은 귀엽고 잘생겼지만 다소 맹한 구석이 있는 고등학생과 총명함과 미모를 갖췄지만 병약한 왕세자가 있었다.
전자는 주연에 가까운 나름 비중 있는 역할이었고, 후자는 비중은 작지만 임팩트 있는 역할이었다.
개중 남경이 적극 추천하는 건 후자였다.
“저번에 너 한복 입은 거 보니까 기가 막히더라. 감독님께서도 음악방송 보고 오디션 제안하신 거래.”
“쇼플리요?”
단아랑 콩트하고, 검 들고 무사 흉내 낸 기억밖에 없는데 병약 왕세자 역할이 들어온다고?
백야는 자신의 검 솜씨가 그렇게 형편없어 보였던 걸까,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나도! 그럼 이제 햄스터 나라 생기는 거야? 나잉이도 아직 백야한테 Nation 없다고 울었어!”
청도 남경과 같은 의견인 듯 사극을 적극 추천했다. 그러나 유연과 율무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 했다.
“무슨 소리야, 무조건 시트콤이지. 귀엽고 깜찍한 외모에 백치미 있는 고등학생? 교복만 입혀 놓으면 백도 그 자체인데.”
“인정. 당백이 그냥 생활 연기하다 와도 될 거 같은데?”
두 사람은 시트콤을 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둘 중 아무의 편도 들지 않는 민성과 지한이 있었으니.
“한백야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부터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콘서트에 컴백 준비까지 해야 하는데 지금 체력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음악방송 스케줄도 있는데 드라마는 또 언제 찍어. 애 죽일 일 있니?”
지한과 민성은 기쁨보단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의젓한 말에 시트콤이냐 사극이냐를 떠들던 네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백야야. 하고 싶어?”
민성이 백야를 돌아보자 남경과 멤버들의 얼굴도 동시에 한곳을 바라봤다.
그에 잠시 고민하던 백야는 말간 얼굴을 작게 끄덕였다.
“응. 해 보고 싶어.”
사실 1달 이내에 무조건 캐스팅되어야만 하는 개복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필승과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진 어떻게든 퀘스트로 버텨야만 했다.
“그런데 꼭 하나만 골라야 해요?”
“두 개 다 하게?”
유연이 놀란 눈을 떴다.
“아니, 두 개 다 출연하겠다는 게 아니라 오디션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다른 제의가 또 들어올 것 같진 않으니 둘 중 하나는 무조건 붙어야 살 수 있었다.
“당연하지! 내가, 내가 지금 당장 전화해서 오디션 스케줄 잡을게. 우리 애기는 컨디션만 신경 써!”
“애기….”
“아이고~ 예쁜 것.”
흥분한 남경이 백야의 볼을 꼬집어 흔들곤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 * *
그날 저녁.
백야는 피곤하다며 일찍 잠에 들었다. 새벽에 필승과 만나려면 미리 잠을 자 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각, 숙소에서는 은밀한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유연. 결전의 날이 밝았다.”
“결전이라는 말도 아냐?”
옷으로 둘러싸인 작은 드레스 룸. 선글라스를 낀 청이 지렁이 젤리를 뜯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막내즈의 사이에는 LED 햄스터 수면 등이 분홍색 빛을 내며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뭐가 보이긴 하냐? 설마 그러고 나갈 건 아니지?”
“Agent의 기본인데 그것도 모르나? 쯧쯧. 잠수하려면 필수다.”
청이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무시하자 유연이 울컥했다.
“요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잠수 아니고 잠복이거든?”
“알아들었으면 됐지. 맨날 뭐라 하고. 피곤하다, 피곤해.”
청이 고개를 젓자 유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퍽-
“이 햄스터 새끼는 또 뭐야. 어디서 지 같은 걸 가져와 가지곤.”
“아악! My 햄스터!”
유연이 조명을 때리자 청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아. 너 지금 나 쳤냐?”
“모! 네가 먼저 백야 때렸잖아! 나쁜 놈!”
그게 왜 백야냐며 반박하려던 유연은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대신 청의 선글라스를 우악스레 벗겨 냈다.
“됐고. 백도한테 걸려서 미움받고 싶은 거 아니면 이건 쓸 생각도 하지 마라.”
“치.”
청은 007 첩보 영화 놀이를 하러 가는 줄 아는 게 틀림없었다.
“Hey. 그런데 소금 집이 어딘지 모르잖아.”
청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유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막내즈에게 주어진 단서는 ‘소금방’과 ‘새벽’. 이 두 단어가 같이 쓰일 만한 장소는 이곳이 유일했다.
“찜질방이야.”
“모라는 거야.”
“연습생 때 내가 데려가 준 적 있잖아. 너 머리에 수건 쓰고 돌아다니던 곳. 엄청 뜨겁고.”
청은 기억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거기 안 데려가 주면 미국 돌아갈 거라고 협박했잖아. 기억 안 나냐?”
“아!”
“아무튼. 거기 가면 소금 방이라는 데가 있거든? 대부분 새벽 늦게까지 하니까 여기가 틀림없어.”
숙소 반경 500m 이내의 찜질방을 검색해 본 결과, 그들의 레이더망에 걸린 곳은 두 곳이었다.
“근데 햄스터가 이 중에 어디로 갈지 어떻게 아나?”
“그게 문제인데….”
유연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을 느리게 두드렸다.
한편 율무의 방에서도 비슷한 듯 다른 주제로 심각했다.
“얘가 언제 나갈 줄 알고.”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설까?”
시간과 날짜를 아는 막내즈와 달리 두 사람은 장소만 알고 있었다.
“그날 당백이가 몇 시에 나갔는지 알아?”
“2시쯤. 4시 조금 넘어서 돌아온 것 같은데.”
“그래? 2시면 해 볼 만한데?”
해 볼 만하기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 때문에 숙소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곯아떨어지는 게 율무였다.
지한이 아무 말 않고 율무를 바라보자 그가 건치를 드러내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우리 지한이~ 이제 눈으로 막 욕도 하고. 자꾸 그러면 율무는 똑땅,”
“입.”
“넵.”
조또의 한마디에 율무의 장난기도 쏙 들어갔다.
‘방울이라도 달아 놔야 하나.’
생각이 많아진 지한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제 콘서트 준비로 또 바빠질 텐데 매일 밤을 새운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탁, 탁.
지한의 손가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됐다.
표정이 한없이 심각한 게, 속으로 무서운 상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분명 평범한 방법을 고민 중이진 않을 거라는 생각에 율무는 마음이 급해졌다.
“저기~ 지한아? 우리 같이 대화를 통해 방법을 찾아볼까? 이번 일은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해결해야 안 들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율무가 자연스럽게 회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대답은 다른 목소리로 돌아왔다.
“힘을 합쳐? 뭘 해결하는데.”
벌컥-
숙소 최고 권력자가 막내들의 귀를 한쪽씩 잡은 채 율무의 방을 급습했다.
“아파, 아프다고. 아, 형!”
“민성, 귀! 내 귀…!”
“이것들은 작당 모의하다 걸렸고. 그래서 너희는 무슨 사고를 쳤니?”
토끼의 눈이 살짝 돌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