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 * *
시간은 잠시 3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삐리릭-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방문이 동시에 열렸다.
“넌 죽었어.”
“잠까안!”
“형이 시켰어.”
지한이 살벌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유연과 율무가 서로를 가리키며 떠넘겼다.
“무슨 소리야, 얘가 밀었어. 진짜. 내가 봤어. 율무가 봤어용~”
“미친 거 아니야? 형이 먼저 문 열었잖아!”
그러나 어떻게 응징할 것인지 이미 계산을 끝낸 조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뚝, 뚝.
지한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섬뜩한 소리를 내자 청과 민성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린 가만히 있었어.”
“당근 하지.”
불똥이 튈까 봐 선을 긋는 모습에 유연과 율무는 배신감을 느꼈다.
“아니, 나 좋자고 그랬어? 형들도 백도한테 들키기 싫어해 놓고!”
“그치, 그치.”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털릴 것 같았던 유연은 뒷걸음질을 치며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그러자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지는 청이 그를 뒤에서 결박했다.
“야, 미쳤어? 이거 안 놔?”
“Hey. 죽는 거도 빨리 죽는 게 낫다. 그냥 죽어라.”
청이 조언이랍시고 은밀히 속삭이자 귓가에 숨결이 닿았다. 순간 소름이 돋은 유연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으아악! 야이 씨!”
“우리 막내들이 사이가 참 좋아~ 그치? 하하하!”
대충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속셈인지 율무가 건치를 드러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하트 이모지의 오남용으로 괘씸죄가 추가된 율무는 금방 목덜미를 잡혔다.
“하하하!”
“이빨 보이지 마.”
“넵. 산녀 주세여.”
표정이 살벌한 게 지한은 진심으로 열이 받은 것 같았다.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한 율무는 입술로 치아를 감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용서를 구했다.
“때리 꺼야?”
구부정하게 굽어진 허리.
주눅 든 미소.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지한이 손아귀에 힘을 살짝 풀었다. 그에 이때다 싶은 율무가 냉큼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짜나~ 우리 빤니 담배기 잡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치아를 가리느라 발음이 뭉개졌지만, 다들 제대로 알아들은 듯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지한은 분노에 눈이 멀어, 네 사람은 몸을 사리느라 본의 아니게 늑장을 부리게 된 후발대.
“Oh my god! 내 햄스터!”
청의 호들갑에 그의 손이 풀리며 유연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렇게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 도착한 곳은 성수동의 24시 불가마. 마스크와 모자로 중무장했지만 아우라는 가릴 수 없었다.
“다섯 명이요. 혹시 카드도 되나요?”
“일행 있으시죠?”
“네?”
카드를 내밀던 민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 요만하고 하얀데 머리에 수건 뒤집어쓰고 다니는 청년. 여기서 뭐 촬영해요?”
백야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장소를 제대로 찾았다는 안도감에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잠시. 주인아주머니의 연예인이냐는 말에 민성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맞죠?”
“아, 아니요? 저희는 그냥 일반인….”
“괜찮아, 괜찮아. 우리 찜질방 그 누구냐, 유명한 아이돌도 자주 오고 그랬어요. 요즘은 군대 가서 안 오는데 저기 사인도 있고.”
주인이 뒤를 가리키자 벽에 붙어있는 시윤과 구양의 친필 사인이 보였다.
“어? 시윤이 혀, 아아아!”
율무가 아는 척을 하자 지한이 냅다 팔을 꼬집으며 입을 다물게 했다.
그사이 어색하게 둘러댄 민성은 카드를 돌려받으며 황급히 뒤돌았다.
“빨리 가. 빨리.”
혹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네 개나 붙어 있는 상황.
민성에겐 사람들이 알아보기 전에 얼른 햄스터만 잡아 숙소로 복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염병. 이래서 나 혼자 오겠다 한 건데.”
“No! 우리는 한 개야!”
“하나겠지, 멍청아.”
유연이 빈정거리자 청의 눈꼬리가 사나워졌다.
“우, 우리 키티~ 햄스터 잡으러 가야지? 유연이는 이리 와. 여기서 싸우면 형아가 어흥~ 한다?”
“왜 이래, 진짜.”
“율무 바보야?”
막내들의 차가운 반응에 율무는 조금 상처받았다. 팔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그리고 잠시 후.
황토색 찜질복으로 갈아입은 멤버들은 손과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메인 스테이지로 입장했다.
새벽이라 대부분의 손님이 잠들어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소금방 찾아, 소금방.”
리더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흩어진 멤버들이 햄스터 찾기에 돌입했다.
휘이이-
얼마 안 가 지한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황토벽 뒤에 몸을 숨긴 조또는 한곳을 열렬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소금방]
목적지를 발견한 멤버들도 하나둘씩 지한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작은 창문 너머로 필승과 대화하고 있는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셋 하면 들어가서 들고 튄다.”
리더의 지시에 멤버들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셋!”
그러나 잠시도 기다릴 수 없었던 청은 다짜고짜 셋을 외치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백야가 코피를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봐요. 어디 아파요? 갑자기 왜 피가….”
“괜찮아요. 금방 멎어요.”
필승이 수건으로 코 아래를 받치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인영이 비명을 지르며 필승을 밀쳐 냈다.
“아아악! 햄스터!”
백야를 감싸 안은 청이 매서운 눈으로 필승을 노려봤다.
“Are you crazy?!”
한발 늦게 다가온 멤버들도 필승을 경계하며 백야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백야 괜찮아?”
“저 사람이 쳤어? 맞지? 그때 전화로 너 협박하던 사람.”
“협박을 당했다고?”
쳤다니?
게다가 협박은 또 뭐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들과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얼굴들에 백야는 굳어 버렸다.
“…으어?”
청의 손길에 두 볼이 찌부된 햄스터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이 협박꾼! 이거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얼굴을 조져 놓다니!”
청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났다.
“자, 잠깐만! 너희가 왜 여기에 있어? 어떻게 알고 왔어?”
“Don’t worry! 햄스터는 여기 있어!”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얼굴에 백야가 황급히 손목을 붙잡았다. 다른 멤버들도 필승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 상황이 백야보다 더 황당할 한 사람. 한순간에 악당이 된 필승은 어이없음을 감추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아~ 간만에 웃네.”
“You! 우서?!”
“몰래 뒤따라온 거예요? 미행?”
상황과 맞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에 청은 더욱 날이 선 반응을 보였다.
다른 멤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희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 유연의 주먹이 세게 쥐어졌다.
“얘들아, 잠깐만. 진정해. 여기 이분은, 이분은….”
백야가 필승을 소개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유연이 얼굴을 찌푸리며 직접 물었다.
그는 백야가 필승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당신 뭐야.”
그러니 말투가 곱게 나올 리 없었다.
“글쎄. 없으면 안 되는 사이? 죽고 못 사는 사이?”
필승은 이 상황이 재밌는지 즐기고 있었다.
‘저 사람이 미쳤나….’
똘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멤버들을 상대로 저런 도발을 할 줄은 몰랐던 백야는 충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What? 죽고 못 산다고?”
한편 필승의 말을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산다’로 이해한 청은 사색이 돼 소리쳤다.
“경찰 불러! Call the police!”
“미친. 조용히 해…!”
청이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란 백야가 입을 틀어막으며 필승을 노려봤다.
‘미치셨어요?’
‘안 미쳤는데요.’
개복치가 눈을 부라리자 필승이 어깨를 으쓱이며 약 올렸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꼬이자 백야의 스트레스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0으로 낮춰 놓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또 코피가 터질 것 같았다.
“잠깐만 진정해 봐. 너희가 왜 여기 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다 설명할게.”
몰래 숙소를 빠져나온 거로도 모자라 필승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멤버들이 대화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지만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때, 율무가 허리를 숙이며 시선을 맞춰 왔다.
“근데 너 땀을 왜 이렇게 흘려?”
뽀송뽀송한 멤버들과 달리 혼자만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에 멤버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니야. 그냥 좀 더워서 그래….”
한편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필승은 백야와 멤버들의 관계를 대충 파악한 모양이었다.
“서로를 굉장히 끔찍하게 생각하네. 이래서 안 된다 그런 건가?”
알 수 없는 말로 백야를 긁는 필승의 모습에 민성도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것 같았다.
“저기요. 누구신지 아직 말씀 안 해 주셨는데요.”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 같은데.”
“지금 제가 장난치는 걸로 보이세요? 이 시간에 왜 여기서 은밀히 만나야 하는지, 얘 상태는 또 왜 이런지 설명이 필요한데요.”
화가 난 목소리에 필승의 시선이 백야를 향했다.
동공이 마구 흔들리는 걸 보니 밝히고 싶지 않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필승은 백야의 답답한 태도에 작게 혀를 찼다.
‘패시브가 개복치라 했던가.’
세상 간절해 보이는 얼굴에 필승은 적당히 알아서 둘러대기로 했다.
“그냥 사촌 형입니다.”
물론 성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개인적인 부탁 좀 하려고 만나자 그랬어요. 전해 줄 것도 있고.”
아니꼬운 말투 또한 숨길 수 없었다. 외계인일지도 모르는 백야와 달리 이들은 아무것도 아닐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콘서트 한다면서요? 나 좀 초대해 달라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요.”
“안 믿어도 어쩔 수 없고.”
시큰둥하게 반응한 필승은 핸드폰 케이스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백야가 내 이야기 한 적 없어요? 아, 하긴. 우리 집안이 워낙 콩가루라.”
백야는 졸지에 콩가루 집안의 금쪽이가 돼 버렸다.
“받아요.”
제 앞으로 내밀어진 명함을 내려다보던 민성은 ‘겜박스’ 로고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겜박스?”
“여러분이 광고하는 게임 내가 개발했거든요. 백야 친구면 나한테도 동생이죠. 필요한 거 있으면 편하게 연락해요.”
필승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민성은 순순히 명함을 받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