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 * *
찜질방 목격담이 퍼지며 멤버들은 남경에게 혼쭐이 났다.
‘나는 찾으려고 해도 안 나오던데.’
과연 베테랑은 서치 실력이 남달랐다.
백야는 자신의 어설픈 행동으로 멤버들까지 휘말리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하아….”
막내즈는 유닛 무대 곡 선정을 위해 빈 연습실을 찾은 참이었는데, 멤버로 간택당한 후에도 조공을 멈추지 않은 청은 딸기 우유를 쥐고 신나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청아, 미안.”
그러나 깜빡이도 없이 들어오는 사과에 그만 먹이를 놓치고 말았다.
툭-
유닛을 무르자는 뜻으로 오해한 집사는 나라를 잃은 얼굴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왜?”
“아침에,”
“No! 죽어도 안 돼!”
청은 말을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백야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민성이냐?! 민성이 다 말했지!”
“형? 갑자기 형은 왜?”
그러다 백야의 순진무구한 표정에 아차 싶었다.
“나, 나랑 유닛 안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랑 안 하면 난 누구랑 해?”
“…오호?”
백야만큼이나 찔리는 게 많았던 청은 긴장의 침을 삼켰다.
“그, 그럼 왜 미안하나.”
“아침에 나 때문에 남경이 형한테 혼났잖아.”
“Oh my god. Nonono. 햄스터 때문 아니야. 우리가 몰래 따라갔어. Sorry.”
늦은 감이 있지만 미행을 해서 미안하다며 청이 뒤늦게 사과했다.
사실 멤버들은 백야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이 넘어가서 마음이 불편하던 참이었다.
“아니야. 내가 개인행동 한 거잖아. 그런데 너희 나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찜질방에서는 경황이 없었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눈물 즙을 떨구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내심 궁금했는데 청이 다시금 상기시켜 주자 찜찜하던 기분이 개운해졌다.
“Umm…. I don’t know.”
그러나 청은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불리할 때만 영어를 쓰는 외국인은 모르는 척 잡아뗐다.
“아니, 어떻게 알았냐고.”
“햄스터야, 내가 하고 싶은 노래 많이 찾아왔다. 들어 볼래?”
“찜질방 어떻게 알았냐니까?”
“이거 노래가 계속 생각나.”
청은 노골적으로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말해 주지 않으면 유닛을 하지 않겠다고 협박할까도 싶었지만, 겨우 필승의 정체를 숨겼는데 청이 역으로 물어 온다면 곤란해지는 건 오히려 제 쪽이었다.
분하지만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씨이….”
“햄스터야, 집중해.”
안 들리는 척하고 있지만 청도 나름 양심의 가책은 느끼고 있었다.
하나뿐인 반려동물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겼다는 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핸드폰 몰래 훔쳐봤다고 절대 말 못 해. Never.’
청은 막무가내로 이어폰을 꽂아 주며 곡을 재생시켰다.
“이게… 뭐야?”
귀를 사로잡는 트로트 풍의 반주에 백야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익숙한 멜로디.
천년의 흥을 돋우는 4분의 4박자.
[☆최신 명품☆ 휴게소 신나는 트로트 뽕짝 메들리]
90년대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연꽃 섬네일 위로 35곡의 트랙리스트가 표기되어 있었다.
“이 노래 완전 미쳤어! 듣자마자 중독돼서 자꾸 이 노래만 생각나. 멈출 수가 없어!”
“뭐라는 거야…. 흥분하지 말고 한국어로 말해. 그리고 너 이런 건 어떻게 찾았어?”
외국인은 트로트에 단단히 꽂혀 버린 듯 광기 어린 눈으로 영업을 시도했다.
“This is Korea!”
“그래, 무슨 말인진 알겠어. 근데 우리 첫 콘서트고 동화라는 콘셉트도 있으니까….”
“No! 무조건 이거야!”
“아니, 너 춤 잘 추잖아. 나는 조금 새로운 모습 보여 드리고 싶었단 말이야.”
“No! 이거만큼 새로운 거 없다!”
“이이…! 똥고집!”
“What? 이 햄스터가 지금 나보고 똥이라 그랬나?”
막내즈의 유닛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 * *
- 애들 찜질방 목격담 이후로 다시 코빼기도 안 보이는 중... 콘서트 준비하느라 바쁜 거겠지?
- 목격담 없는 거 보니까 연습실에서 죽어라 연습만 하고 있는 거 아닐까
- 오늘의 행복 회로
1. (목격담에 따르면) 백야 염색
2. =콘서트 준비 중이다
└ 이거 찐이면 좋겠다ㅠㅠ 근데 콘서트 아니고 컴백 준비 중이라는 말도 있던데
- 제가 지금 한백야 자연 흑갈발 생머리를 보고 있는 게 꿈 아니고 현실 맞나요? (해바라기씨 봉지 들고 있는 백야 사진.jpg)
└ 오구오구 그게 점심이야?
└ 출처 어디에요?
└ 공계. 본체가 햄스터 인증함
└ 엥; 뭐래 햄야 거잖아;; 울 백야는 아기 복숭아 요거트인데요ㅠ 반박 거절
- 백야 개인 스케줄 잡힌 건가? 요즘 부쩍 혼자 다니던데ㅜㅜ 쇼플리는 아닌 거 같고
- 복숭아 카페 목격담 뜸!
(인용) 조그맣고 하얗고 인형 같고 귀엽고 예쁜데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차갑게 생기셔서 반전이었다. 연예인 아우라 장난 아님! 백야 님은 따뜻한 고구마 라떼 사 가셨어요♡ (백야 사인.jpg)
└ 겨울엔 고구마지~
└ 백야 실물 어떻길래 다들 저 말랑 물복을 날카롭다 그래?
└ 잠깐. 애기 얼죽아 아니야?
└ 변절했네 (얼죽아 협회 짤.jpg)
- 복숭아 저긴 왜 갔지?
- 오늘 우리 동네 근처에서 무슨 시트콤? 오디션 보더라
세트 리스트도 정해졌겠다, 유닛 무대도 콘셉트도 확정됐겠다. 팬들의 예상대로 데이즈는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연말 무대를 준비하며 녹음까지 할 때는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일찍 서두른 보람이 느껴졌다.
“이번 앨범도 느낌이 좋아요.”
“맞아요. 안무도 빨리 나와서 이제 저희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아요.”
덕진과 함께 드라마 제작사를 찾은 백야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떨리세요?”
“조금요.”
회사에서 제의를 수락하기 무섭게 오디션 일정은 빠르게 잡혔다.
시트콤 거장 김 감독의 복귀 소식에 방송국에서는 이미 하반기 편성을 마쳐 놓았고, 출연 배우 캐스팅은 막바지 단계를 달리는 중.
백야에게 들어온 역할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연이라 부담감이 더했다.
“그래도 졸업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캐릭터랑 성격도 비슷하셔서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어디 비슷한 정도인가.
작가가 백야를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백야를 쏙 빼닮은 캐릭터였다.
“그래도 얘는 너무 눈치가 없잖….”
“평소 하던 대로만 하시면….”
“……?”
“…….”
덕진과 백야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제가 눈치가 없어요?”
X 됐다.
덕진은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애에게 찍힌 몸. 더는 백야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식은땀을 훔치며 손을 떨었다.
“그, 그러니까…. 어, 얼굴! 감독님께서 원하시는 외모가 귀여운 쪽이신 것 같다는 뜻이었어요.”
“그쵸? 저는 얘보단 눈치 있죠?”
“물론이죠.”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부터 눈치 멸망 인증이었지만 덕진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요, 덕진이 형.”
“느,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덕진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해야겠다 다짐하는데, 그에게 구원의 빛이 내려왔다.
“한백야 님, 안으로 들어가실게요.”
“헉. 형, 저 다녀올게요.”
“넵. 파이팅!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고 오세요.”
숙소에서 청이랑 싸울 때처럼 유치하게만 굴면 캐스팅은 따 놓은 당상일 텐데.
두 손을 모아 쥔 덕진은 백야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평소처럼만 하세요. 제발.
* * *
빠르게 잡힌 일정 때문에 연기 수업은커녕 캐릭터 분석을 할 시간도, 제대로 된 연습을 할 시간도 없었다.
제작사 측에서도 따로 준비해 올 것은 없다며 오디션 대본조차 건네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백야가 아는 정보라곤 백치미 있는 고등학생 역할이 전부였다.
‘설마 자유연기를 시키진 않겠지.’
혹시 몰라 개인적으로 준비하긴 했지만 선보일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야는 오디션장으로 향하는 동안 장착 중인 스킬 리스트를 확인했다.
Lv.12 백야 (동기화 중)
연기 : <울리고 싶은 남자(B)>, <연기 웅덩이(C)>
끼 : <갓끼(S)>, <탑텐 귀(R)>
지난밤, 무려 100번의 뽑기를 돌려 얻어 낸 연기 스킬 <울리고 싶은 남자(B)>와 <연기 웅덩이(C)>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연기 구멍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뽑기를 플렉스 한 개복치는 소비한 포인트에 비해 건진 건 몇 없었다. 그러나 필승이 주고 간 쿠폰 덕분에 아깝진 않았다.
든든한 조력자 덕분에 앞으로도 포인트 걱정은 하지 않게 됐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
“안녕하세요. 데이즈 백야입니다.”
오디션은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백야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자, 이미 자리하고 있던 감독과 관계자들이 가볍게 받아 주었다.
“반갑습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생각했던 것만큼 경직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뚝딱거리며 맞은편에 앉은 백야는 작게 심호흡했다.
“바쁘실 텐데 흔쾌히 수락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희 지금 쉬고 있어요. 그리고 저야말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은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연말에 대상 받으셨죠? 축하해요. 노래 너무 좋던데.”
“감사합니다.”
“M사 연기 대상 축하 공연 오셨잖아요.”
“네, 맞아요.”
“나도 거기 있었거든. 사실 그날 무대 보고 백야 씨 처음 알았어요.”
감독은 신인 배우를 물색하던 중, 교복을 입은 백야가 고음을 시원하게 내지르는 모습을 인상 깊게 봤다고 했다.
“찾아보니까 연기도 조금 하셨더라고요.”
제가 한 게 연기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였던가….
감독은 웹 드라마와 연말 시상식 VCR을 본 것 같았다.
“본인 평소 성격은 어때요?”
“웃음이 많고 정도 많은 것 같아요. 낯을 조금 가리긴 하는데 친해지면 잘 놀아요.”
간단한 대답도 부끄러운지 백야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었다.
“학교 다닐 때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그냥 평범했어요. 연습생 생활을 늦게 시작했거든요.”
“그래요? 평범한 얼굴은 아닌데. 인기 엄청 많았을 것 같은데?”
감독이 자신을 띄워 주는 거라 생각한 백야는 손사래를 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휴, 아니에요. 정말 평범했어요. 친한 친구가 두 명 있는데, 그 친구들이랑만 놀았던 것 같아요. 아,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했어요.”
맥락을 잘못 짚은 눈새는 자신의 학창 시절이 깨끗하고 투명했음을 어필했다.
최근 학교 폭력으로 연예계가 떠들썩했기 때문에 제작진이 자신을 의심하는 거라 생각했다.
“저 진짜 공부만 하고 살았어요. 영어 빼고 다 잘해요.”
“영어는 왜요?”
“영어 울렁증이 있어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아방함에 감독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