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교복은 일부러 입고 온 거예요? 무대 의상?”
“아니요. 진짜 학교 교복입니다. 서울 금용 고등학교요. 고등학생 역할이라고 들었습니다.”
백야가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주자, 작가가 더 준비해 온 게 있으면 편하게 보여 달라며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사실 그때 쓰던 안경도 들고 오긴 했거든요….”
멤버들도, 매니저도, 회사 식구들 모두가 그 안경만큼은 쓰지 말자며 신신당부했지만, 백야는 안경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고사리 같은 손이 재킷에서 두꺼운 뿔테 안경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놀라움 섞인 감탄이 터져 나왔다.
“어머.”
“다른 사람이 됐네?”
팬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금지 사진이 된 졸업 사진 백야가 오디션장에 나타났다.
“그 안경은 오래 쓰셨어요?”
“네. 학교 다니는 동안 쭉이요.”
감독은 백야의 학창 시절이 왜 평범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지가 확 바뀌네. 안경 벗으면 미소년 설정으로 가도 되겠는데요?”
감독과 작가의 긍정적인 대화에 백야의 귀가 쫑긋거렸다.
감독은 이어서 백야가 맡을 고등학생 ‘도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도하는 누나만 두 명인 집의 막내아들이에요. 학교에서는 인기도 많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법 멋있는 놈으로 통하지만, 집에서는 완전히 아기 취급을 받는.”
여기에 은근한 백치미와 허당기까지 더해져 사랑스러운 캐릭터였다.
“아이돌 연습생 지망생이라 춤이나 노래를 즐겨 하는데, 이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고.”
백야가 활짝 웃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럼 앞에 대본 있죠? 시간 드릴 테니까 한번 읽어 볼래요?”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수많은 배우가 이 자리를 다녀갔지만 아직까지도 도하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느낌이 좋았다.
외모도 신선하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인지도까지 있는, 주목받는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
시트콤 거장이라고 하지만 무려 6년 만의 복귀작인 데다, 장르가 예전만큼 주류는 아니었기 때문에 감독도 부담이 상당한 상태였다.
이미 출연진의 반 이상이 신인 배우이기도 했고, 여기에 흥행 보증 수표는 아니더라도 히든카드 한 장 정도는 끼워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물론 연기가 봐줄 만하다는 가정하에.
“저 다 읽었어요.”
백야가 손을 들자 그의 연기가 시작됐다.
* * *
[데이즈 백야, ‘가족 같은 사이’ 캐스팅... 풋풋한 고등학생으로 변신]
[정아영X신한별X백야, 시트콤 ‘가족 같은 사이’ 삼 남매로 첫 호흡 예고]
[‘가족 같은 사이’ 시트콤 부활 성공시킬까]
- 백야 캐스팅? 장담하는데 K-시트콤 부활한다
- 초호화 캐스팅... 정아영 신한별 백야가 남매로 나온다? 이 조합 무조건 된다
- 햄친놈 소리 지르면서 재탕 삼탕 하는 소리 벌써 여기까지 들린다ㅋㅋㅋㅋ (청 백야 백허그 사진.jpg)
- 제발 철딱서니 없는 막내아들 역할 주세요 (기도 짤.jpg)
- 당연히 로맨스 따위 없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개싸가지 철벽 왕 고등학생이겠죠? 요즘은 이런 애들이 인기 많잖아ㅎㅎ
- 난 이 친구 어쩌다 난데없이 시트콤에 캐스팅됐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아.... (인용) 샌프란시스코 관광객 사진에 찍힌 아이돌 (돌고래 탄 백야 사진.jpg)
└ 이게 뭐야???
└ 돌고래 나올 줄 알았다ㅋㅋㅋ
└ 아니 이거 진짜야? 진짜로 진짜? 너무 놀라서 진짜밖에 말이 안 나오는데 진짜야?
└ 이거 그거 아니냐... “웃수저”
- 돌고래 합성 아니고 찐임ㅋㅋㅋㅋㅋ 저 사진 뜬 날 난리도 아니었는데ㅋㅋㅋㅋㅋ
- 백야도 백얀데 저걸 찾아낸 팬이 더 대단함ㅋㅋㅋ
- 얘들아 나 아직 돌고래 직캠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거 보면 유앱 켜
- 브이로그에서는 바닷가 놀러 간 거 안 나왔는데ㅠㅠ 이날 영상 찍은 사람 있으면 제발 아무나 풀어주세요 @남매 @덕매
└ 계정 알면 태그 걸고 싶다 진짜
[대환 : (사진)]
[대환 : 너 진짜 골 때린다]
[대환 : 더 없어?]
해당 사진은 한 관광객의 SNS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최애의 얼굴을 알아본 한 나잉이가 사진을 파란짹으로 가져왔고, ‘어머나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광경에 백야는 돌고래도 모자라 RT까지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진은 나잉이들 사이에서만 화제가 됐을 뿐, 팬덤에 의해 과열된 연말 시상식 투표로 인해 금세 묻혀 버렸다.
그러다 백야의 시트콤 캐스팅 소식과 함께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푸흡!”
그 시각 오랜만에 율무를 따라 운동을 하러 온 백야는 물을 마시다 말고 그대로 뿜어 버렸다.
[대환 : 복숭아로 돌고래도 잡을 수 있는 줄은 몰랐는데]
[대환 : 역시 능력 좋아]
[대환 : 너 이거 콘서트 때 패러디 해라. 인어공주 추천]
이게 뭐야?
어디서 났지?
분명 이날 찍은 브이로그는 통편집됐고, 패들 보드에 붙어 있던 액션캠도 저희끼리만 공유했는데….
‘유출됐나? 혹시 저놈이?’
사납게 뜨인 눈꼬리가 율무를 향했다.
“당백이 왜?”
눈이 마주치자 율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이거 네가 올렸어?”
“이게 뭔데?”
핸드폰 속 사진을 확인한 율무가 박장대소하며 눈물을 훔쳤다.
“푸하하! 아~ 진짜 웃겨. 표정 제대로다. 근데 이거 어디서 났어? 나도 보내 주라.”
“네가 올린 거 아니야?”
“나 아니야~ 나였으면 벌써 배경 화면 바꿨지.”
율무는 아직도 니트 백야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사용 중이었다.
“날짜 보니까 올라온 지 꽤 됐는데. 나 왜 몰랐지?”
율무는 SNS 헤비 유저로 팬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게 취미였다.
“내가 놓친 게 있었다니…. 자존심 상하는데?”
“이런 거로 자존심 상하지 말라고!”
알고 보니 돌고래 사진이 처음 올라왔을 땐 팀의 분위기가 좋지 못할 때였다.
광고 촬영장에서 있었던 사다리 사고와 연달아 발생한 사생 사건. 거기에 연말 시상식 준비와 새 앨범 녹음까지.
늘 바빴지만 작년 그맘때쯤에는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생각도 안 날 만큼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아깝당. 이건 우리만 보려고 했는데, 그치이~”
백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율무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왜. 이미지 걱정돼?”
“…조금.”
“괜찮아, 괜찮아.”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하던 율무가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너 원래 그런 이미지야.”
“뭐 인마?”
개복치가 발끈하자 율무가 즐거워하며 백야의 볼을 꼬집었다.
“아유~ 요 귀여운 새끼. 가자. 얼른 씻고 회의하러 가야지.”
잊고 있었는데 오늘은 단독 콘서트 세 번째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 * *
테이블에 둘러앉은 데이즈는 자리에 하나씩 놓인 콘서트 기획서를 발견하곤 들뜬 모습이었다.
“Oh my god! 우리 진짜 콘서트 하는 것 같아!”
“진짜 하잖아.”
백야가 엉겨 붙는 청을 밀어내며 서류를 소심하게 들춰 보았다.
자료는 제법 두꺼웠는데, 앞장에는 세트 리스트가 4개의 섹션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뒷장부터는 섹션별 콘셉트와 무대 장치, 동선과 관련된 사항들이 자세히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청이 백야와 제 이름이 적힌 유닛 무대 순서를 찾아보는 사이, 연출가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들어서며 회의가 시작됐다.
“시작부터 VCR이네요?”
“네. 아무래도 첫 콘서트다 보니 백일몽이라는 서사를 쌓으려면 영상이 좋을 것 같아서요.”
영상은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성을 찾게 되고, 그곳의 문을 열면서 꿈의 세상으로 연결된다는 내용으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했다.
“영상에 나온 성문을 무대 장치로 설치할 예정이고, 멤버들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데뷔곡인 <놀이>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VCR은 NAN 뮤직비디오를 촬영해 주신 권 감독님께서 맡아 주시기로 했고요. 뒤에서 말씀드릴 테지만 섹션 2에서는 연기가 가미된 퍼포먼스 위주로 구성했어요.”
“연기요? 무대에서요?”
민성이 토끼 눈을 뜨며 되물었다.
연습생 때부터 선배 그룹의 콘서트를 관람하며 VCR에서 그들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봐 온 민성이었다.
저희 회사의 기획팀이 얼마나 악랄한지 소문으로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무대에서까지 연기를 시킬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섹션 1이 웅장하고 위험한 분위기라면 섹션 2에서는 멤버들의 유닛 무대를 동화로 엮어서 뮤지컬스럽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VCR을 제작할 예정인데, 아주 재미있는 소재의 영상이 될 것 같다며 관계자들이 즐거워했다.
“그냥 편하게 가창하시면서 가사나 설정에 맞는 제스처를 취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섹션 2는 인형 콘셉트였던 와 <키링> 등. 사랑스럽고 밝은 곡 위주로 선곡이 되어 있었다.
“섹션 2에서도 문 구조물을 설치할 예정이고요. 민성 씨가 제일 먼저 등장할 거예요.”
“약간 기억을 잃으신 것처럼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에?’라는 느낌의 연기를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유연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지한을 바라봤다.
“그런 건 지한이 형이 잘하는데.”
며칠 전, 새벽에 있었던 작은 소동을 언급하자 멤버들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야만이 맞장구를 치며 진심으로 칭찬했다.
“맞아. 지한이가 우리 중에서 연기 제일 잘하잖아.”
지한은 눈새의 해맑은 칭찬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멤버들만 노려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야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푸하하! 눈 봐 봐.”
“한유연.”
“왜에~? 형, 의문의 1패네.”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엇나가는 대화에 백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멤버분들 너무 부담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어색할수록 팬분들은 더 좋아해 주시니까요.”
“이때 LED는 슬라이딩으로 움직일 예정이고요, 섹션 2 마지막 곡에서는 각각 멤버들의 영상으로 대체하기 위해 총 6개로 제작될 예정입니다.”
“대체?”
어려운 단어에 청이 혼잣말을 되뇌자 백야가 조용히 한글을 적어 주었다.
[대신한다고]
[왜?]
다시 시작된 물음표 살인마의 공격에 백야가 입술을 할짝댔다.
“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잠시를 못 참고 청의 팔이 번쩍 올라갔다. 청은 성격이 급한 편이었다.
“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