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 * *
팔을 내어 주고 주도권을 되찾은 율무는 <판매왕>이라는 예능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오늘은 아이돌 특집인지 낯익은 얼굴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블라썸, 다온, BB9, 어거스트.
각자의 그룹을 대표해서 나온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나율무!”
블라썸의 지현과 장난을 치고 있던 금일이 율무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뭐야, 너도 나오냐?”
“네가 온다는데 당연히 와야지~”
“하여간에 입만 살아 가지곤. 아, 인사해. 여기는 나랑 불알친구 블라썸의 김지현.”
“야, 난 네 거 보지도 못했는데?”
“미쳤어? 와… 소름. 율무야 미안하다. 방금 소개는 못 들은 거로 해라. 야, 떨어져. 저리 가.”
전 소속사에서 연습생 생활을 꽤 오랜 기간 함께했다는 두 사람은 굉장히 친해 보였다.
그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율무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저는 데이즈 율무예요.”
“블라썸 지현이요. 아, 여기는 다온 수아 씨.”
“안녕하세요.”
수아가 수줍게 인사하자 율무도 가볍게 고개를 꾸벅였다.
“오늘은 이렇게가 끝인가?”
금일이 대기실을 돌아보며 혼잣말했다.
그러자 때마침 마지막 게스트가 도착했다. 헐레벌떡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는 건 하랑과 그의 매니저였다.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매니저가 허리를 굽히며 스태프에게 사과하는 사이 하랑도 모여 있는 출연진들을 발견했다.
“아 씨. 하필 저놈이냐….”
하랑을 좋아하지 않는 금일이 복화술로 낮게 읊조렸다. 율무에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소리였다.
율무는 저보다 하랑을 더 싫어하는 것 같은 반응에 옆을 힐끔 돌아봤다.
금일은 웃고 있었지만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은 험하기 짝이 없었다.
“저 새끼 존X 싫은데.”
“왜. 무슨 일 있었어?”
“어. 있었지.”
연습생 생활 오래 한 게 뭐 자랑이라고 갑질에 견제에 질투에.
특히 백야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며, 하랑이 선배이기까지 했으면 더 심했을 거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괴롭혔다고?”
“어. 백야가 말 안 하냐?”
“처음 듣는데.”
“그런 거 같더라.”
금일의 말을 듣던 율무가 저도 모르게 정색했다.
“데뷔 초부터 메보라고 쟤랑 좀 많이 엮였냐. 연말마다 스페셜 스테이지도 같이하고.”
“어.”
“근데 백야 연습생 기간이 짧았잖냐. 그거 들먹이면서 자기는 너희랑 5년 넘게 붙어 있어서 형제나 다름없다나 뭐라나.”
백야는 가만히 있는데 굳이 옆자리로 와서 어깨를 치고 가는가 하면, 백야가 안무를 실수하기라도 하면 대놓고 꼽을 주는 등, 기를 죽이려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거 가스라이팅 아니냐? 물론 걔가 눈치가 없어서 다 튕겨 내긴 했지만.”
“걔는 왜…!”
듣다 보니 화가 난 율무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일순간 저희에게 집중된 시선에 율무와 금일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미쳤어?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걔는 왜 그걸 말을 안 하는데? 너라도 말을 해주든가.”
“그래서 지금 하잖아.”
“더 빨리 말해 줬어야지.”
뒤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있었으면서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율무는 서운함을 느꼈다.
‘우리보다 저놈 말을 더 믿었다는 거잖아.’
그러다 하랑이 그런 놈인 줄 알면서도 안일한 마음으로 내버려 둔 건 정작 저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른 친해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치대기만 했지, 정작 힘이 되어 주진 못했던 거다.
뒤늦게 밀려오는 미안함에 율무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야, 왜 울려고 그래…. 그리고 그땐 나도 너희가 저 형이랑 더 친한 줄 알았지. 야, 저 새끼 온다.”
하랑이 다가오자 금일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율무의 팔을 툭, 건드렸다.
“두 사람 오랜만이다.”
“오랜만인가?”
한 달 전에도 봤던 것 같은데, 라며 금일이 구시렁거렸다.
“율무도 오랜만이야.”
“…….”
율무는 앞으로 내밀어진 하랑의 손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랑의 말이 곧 법이며, 그의 눈 밖에 나면 안 된다는 강박이 무의식중에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손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모습에 하랑이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율무야?”
그에 율무의 시선이 하랑을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었지만, 이곳은 보는 눈도 많은데다 연예계는 굉장히 좁았다. 괜한 구설수를 만들어 팀에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그러게. 오랜만이다.”
손을 잡은 율무는 하랑이 맞잡기도 전에 금방 풀어냈다.
“금일아 화장실 간다며.”
“…내가?”
“같이 가자. 나도 손 좀 씻게.”
* * *
<판매왕>은 게스트들이 판매한 물건의 수익을 기부하는 형태의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가장 많은 수익을 낸 사람의 이름으로 기부되며, 판매왕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취지가 좋아 인기 프로그램이 된 것은 아니었다.
게스트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만난 시민들에게 자신의 물건을 판매해야 하는데. 당연히 자신이 무엇을 파는지는 모르는 채 영업을 해야 했다.
미션을 통해 얻은 힌트로 자신의 물건을 유추해 볼 수는 있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오늘 판매왕이 정말 엄청난 분들을 모셨습니다.”
<판매왕>의 MC는 ‘홈쇼핑 전설의 고데기 사고’로 유명한 전직 쇼 호스트였다.
“항상 오프닝을 하던 장소인데 오늘따라 조명이라도 켠 것처럼 너무 환하네요.”
MC가 한 분씩 소개를 부탁드린다며 옆을 가리키자 율무가 제일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지친 삶에 비타민 같은 활력이 필요하신가요? For your day 데이즈 율무입니다. 안녕하세요~”
율무가 브이를 하며 눈 위로 올리자 쇼호스트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멘트 준비하신 거예요?”
“아까 기다리면서 준비했어요. 괜찮았나요?”
“저는 순간 비타민 광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다음 분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거든요?”
금일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율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슬슬 흐르.”
“푸핫!”
엄청난 복화술 능력에 율무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금일 씨, 그냥 편하게 소개해 주셔도 돼요.”
“아니요. 저도 하겠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빠르게 굴린 금일이 즉석에서 멘트를 지어냈다.
“지루한 일상, 심쿵! 하고 싶으신가요? 방심은 절대 금물. BB9 금일입니다~”
임팩트 있는 소개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금일도 자신의 차례가 지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 보였다.
이어서 하랑과 지현, 수아도 적당히 애교 섞인 멘트로 자기소개를 넘겼다.
“아이돌이라 그런지 멘트들이 하나같이 주옥같습니다. 오늘 역대급 매출이 예상되는데요?”
MC는 오늘도 엄청난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다며 가지런히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에는 1번부터 5번까지의 숫자가 붙어 있었다.
“한 분씩 앞으로 나오셔서 마음에 드는 상자 앞에 서 주시면 됩니다.”
누가 먼저 뽑을 것인가를 두고 게스트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는데, 하랑이 제일 먼저 화려한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망설임 없이 1번을 고르자, 율무와 금일이 잠깐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분 먼저 고르세요.”
“제가 남는 거 할게요.”
율무와 금일의 배려에 지현과 수아도 편하게 상자를 골랐다.
그리고 남은 두 개의 번호.
개중 가장 큰 상자 앞으로 달려간 율무는 금일을 향해 개구지게 웃었다.
“남는 거 하신다면서요.”
“아, 예~”
금일이 떨떠름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받아치자 촬영장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럼 고르신 상자에 들어 있는 물건을 공개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보실 수 없어요.”
셋을 세는 카운트와 함께 상자 속 물건이 공개됐다.
[율무 : 쪽쪽이
금일 : 개 사료
하랑 : 공주 화장대
지현 : 곱창 헤어밴드
수아 : 손뜨개 수세미]
게스트들이 뽑은 물건을 확인한 MC는 이어서 미션을 알려 주었다.
“어떤 물건을 뽑으셨는지 궁금하시죠?”
“네에~”
“저희가 나눠 드린 지도를 보시면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미션 장소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셔서 미션을 성공하시면 힌트를 얻으실 수 있어요.”
게스트들은 5시 전까지 상암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 주세요.”
시작 사이렌과 함께 게스트들이 방송국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율무의 미션 장소는 아파트 단지 근처의 키즈 카페.
다섯 명 중 가장 먼 곳에 있어서 하나라도 더 판매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감독님 저 뛰어도 돼요?”
“네.”
VJ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율무가 속력을 내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율무 씨 잠시만요…!”
눈 깜빡할 사이 벌어진 격차. VJ도 황급히 따라붙긴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겨우 따라잡은 VJ가 거칠게 호흡하며 팔을 붙잡았다. 붉은색 신호등이 아니었다면 시작부터 율무의 분량을 날릴 뻔했다.
“율무 씨 천천히…. 허억, 천천히 가세요….”
“저 빨리 가서 미션하고 오늘 판매왕 될 거예요.”
숨을 고르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VJ에 율무가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죄송해요. 제가 승부욕이 강해서…. 카메라 무거우시죠. 제가 들어 드릴까요? 저 셀카 잘 찍어요.”
율무의 맑은 눈과 마주친 VJ는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어 카메라를 숨겼다.
자신이 들고 뛰겠다며 카메라를 달라는 놈은 처음이라 조금 무서웠다.
“괜찮습니다. 거의 다 왔어요.”
“정말요? 어! 그러네~”
상가 입구에 걸린 키즈 카페 간판이 화려했다.
“피아노, 태권도, 필라테스, 영어 학원도 있네요. 키즈 카페는 7층!”
층수를 확인한 율무는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페는 섭외를 마친 상태니 촬영 팀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 터였다.
두리번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찾는데, 그 앞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율무의 골반 높이 정도 되는 키를 가진 귀여운 초등학생이었다.
“꼬마 친구~ 어디 가는 거예요?”
자신의 큰 키 때문에 무서워하진 않을까, 무릎을 굽혀 앉은 율무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경계하며 돌아보던 여학생은 이내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크게 떴다.
“박박! 나율무?!”
“…으응?”
“나나 커! 짜짜 잘생겼잖아?!”
율무차 인생 22년 만에 찾아온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