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그 시각, 멀리서 스태프들과 섞여 회식을 즐기고 있던 남경은 맥주를 원샷 하는 백야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쟤 지금 술 마시는 거야?”
“에이~ 놔둬요. 오늘 같은 날은 술도 좀 마셔야 친해지지.”
“맞아요. 아이돌은 사람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라….”
매니저들은 이런 날까지 야박하게 구냐며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이들은 백야가 얼마나 알코올 쓰레기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때는 작년 이맘때쯤. 막내들의 스무 살을 축하하며 숙소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렸었다.
초대받지 못한 파티라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민성에게 전해 듣기론 막내들의 주사가 대단했다고….
한 놈은 정신이 나간 놈처럼 웃고, 다른 한 놈은 집에 가야 한다며 울고, 또 다른 한 놈은 그렇게 뽀뽀를 해 댄다던데.
셋 다 주량은 쓰레긴데 주사는 다채롭다며 민성이 열받아 하던 기억이 났다.
‘근데 쟤 주사가 어떤 거더라.’
남경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왜요. 백야 씨 주량이 약해요?”
“네.”
“아직은 멀쩡해 보이는데?”
“맞아요.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취하겠어요. 일단은 매니저님도 편하게 드세요.”
“아니, 그래도 조금 불안한데….”
“저희는 술도 못 마시는데 사이다로 짠이라도 할까요?”
“좋아요. 건배~!”
분위기에 휩쓸려 건배를 하면서도 남경의 눈은 백야를 좇았다. 사람들 말처럼 제가 보기에도 백야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괜한 걱정인가.’
그는 입 안으로 고기를 욱여넣으면서도 백야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먼 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보였다.
‘취했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남경은 제발 뽀뽀만 아니길 빌며 걸음을 서둘렀다.
“죄송해요. 상태만 보고 올게요.”
그 시각 백야의 테이블은 한 사람의 재롱에 웃음 참기 챌린지가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집에 가야 한다며 재욱에게 목도리를 둘러 주는 백야 때문이었다.
“왜 이래?”
“아니이~ 이제 지베 가야 하눈데 밖에는 추우니까.”
“간다고? 벌써?”
“쓰읍. 가야지! 나 내일 스케줄 있어. 그거도 두우 개.”
백야가 손가락을 두 개만 펴며 비장하게 말했다.
“얘 취한 것 같은데요.”
“뭐 얼마나 마셨다고?”
“맥주 한 잔 반…?”
코끝이 빨개진 백야가 딸꾹질을 하며 목도리를 매듭지었다.
“야, 너 취했어.”
“아니야, 안 취해써.”
손을 밀어내며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는 백야의 행동에 재욱은 조금 난감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가 배꼽 인사를 하다 비틀거렸다.
“안녕히 계세여~ 저눈 이제, 오어어.”
“어어…!”
“야, 야!”
감탄과 동시에 양옆에서 손이 뻗어져 나왔다.
“얘 일단 앉히고 매니저님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재욱이 백야를 잡고 놔주질 않자 동그란 눈이 그를 올려다봤다.
“집에 토끼 같은 멤버들이 저를 기다리고 이써요….”
그러다 갑자기 눈망울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끄흐….”
“운다고? 야, 아니, 왜 울고 그러는….”
훌쩍.
통통한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떨어지자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옆 테이블에서도 힐끔거리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머. 지금 우는 거예요? 왜?”
“취한 것 같아요. 맥주 한 잔 마셨는데 자꾸 집에 가야 한다고….”
그때 백야가 재욱의 목에 둘려 있던 목도리를 죽 잡아당겼다.
“이거 내 꼬야.”
“네가 둘러 줬잖아. 다시 가져가.”
“나잉이가 준 건데…. 끄흐…. 집에 갈 거야, 낸나.”
고기 두 점.
맥주 한 잔 반.
백야가 회식 장소에 와서 먹은 음식의 전부였다.
“이 정도면 술이 약한 게 아니라 못 마시는 수준인데.”
재욱이 떨떠름한 얼굴로 목도리를 돌려주었다. 눈이 반쯤 풀린 게 확실히 맛이 간 것처럼 보였다.
목도리를 줬다 뺏은 백야는 목이 아닌 머리와 얼굴에 감으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재욱이 입술을 할짝대며 곤란해하던 찰나, 마침 남경이 도착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야, 야, 백야야.”
“혀엉….”
백야가 울먹이며 남경을 올려다봤다.
“집에 가야 되는데 자꾸, 자꾸 이 사람이 못 가게 해.”
아는 얼굴의 등장에 서러움이 폭발한 백야는 목청껏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뿌에, 엡!
그러나 남경이 황급히 틀어막았다.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진상 짓에 제가 다 쪽팔린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곤 같은 테이블의 연기자들에게 대신 사과를 전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쓰레기라. 아니, 알코올 쓰레기.”
“아니에요. 백야가 많이 피곤한가 봐요. 자꾸 집에 가야 된다 그러던데. 내일 스케줄도 두 개나 있다고….”
“어휴. 술만 마시면 숙소에 있어도 집에 가야 된다고 우는 놈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은 먼저 데리고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보다 자리를 빨리 뜨게 됐지만, 이곳에 계속 내버려 두는 것도 민폐였다.
입을 틀어막힌 채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려 대는 백야에 남경이 한숨을 쉬었다.
“소리 내지 마. 그럼 너 버리고 나 혼자 집에 갈 거야.”
끄덕끄덕.
버리고 갈 거라는 말에 입을 꾹 다문 백야가 남경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하…….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올 테니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끄덕끄덕.
남경의 손에 이끌려 주차장으로 나온 백야는 가게 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맛있는 거 사 가야 하눈데….”
그래도 찬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조금, 아주 조금 돌아오는지 제법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맛있는 거….”
유연의 말이 생각난 백야는 남경을 기다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붕어빵 리어카를 발견했다.
“…오어?”
홀린 듯 일어난 개복치는 그렇게 장소를 이탈했다.
“얼마치 드릴까?”
“오마넌이여!”
50마리를 주문하는 통 큰 스케일에 사장님이 난색을 표했다.
“에이, 그렇게는 안 되지. 다른 사람도 사야 하는데. 뒤에 여학생은 몇 마리 줘요?”
“배, 배, 백…!”
“100마리? 아니, 붕어빵 못 먹어서 죽은 귀신들이 붙었나…. 안 돼.”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머리에 분홍색 목도리를 두른 백야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사이 고민을 마친 만취 개복치는 재주문에 도전했다.
“그럼… 마넌은여?”
“만 원은 되지.”
사장님이 봉투에 10마리를 담는 동안 백야는 핸드폰 케이스를 벗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씨잉….”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상금을 꺼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한편 백야를 알아본 나잉은 입을 틀어막은 채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왜 안 되는… 돼따!”
달가닥-
케이스를 벗기기 무섭게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핸드폰을 떨어뜨린 줄도 모르는 백야는 붕어빵과 현금을 교환하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저, 저기요. 핸드폰 떨어뜨리셨는데….”
“넹?”
풀린 눈.
빨개진 코끝.
발그레한 두 볼.
히잡처럼 두른 분홍색 목도리.
복숭아 코스프레를 한 건가 싶을 정도로 귀여운 작태에 붕어빵 나잉은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오어? 나랑 똑같은 핸드폰.”
“방금 떨어뜨리셨어요.”
“우와아~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다만 최애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핸드폰을 돌려주던 나잉이 인증 샷을 요청해도 되는지 고민하는데,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백야쯤은 거뜬히 들 수 있는 커다란 키와 남다른 풍채는 남경 매니저가 틀림없었다.
“야, 한백…! 햄스터!”
붕어빵 나잉이 백야를 알아본 걸 눈치챈 남경은 이름을 부르는 대신 청의 애칭을 사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백야의 고개가 단번에 돌아갔다.
“넌 가만히 있으라니까 왜 여기에 있어?”
“왜냐면~ 유연이가 맛있는 거 사 오라 그랬으니까!”
까르르거리며 웃던 백야는 그대로 남경에게 짐짝처럼 들려 사라졌다.
“학생은 몇 개 줄까?”
“아저씨… 필요 없어요. 제 인생에 붕어빵은 이거 하나면 충분해요.”
* * *
- 방금 최애한테 붕어빵 받은 썰 푼다 (붕어빵 사진.jpg)
└ 학원 째고 집 가는 길에 붕어빵 보여서 갔다가 목도리 히잡처럼 두른 복숭아 영접
└ 처음엔 50개 달랬는데 아저씨가 안 된다 하니까 오리 입 내밀면서 그럼 만 원은 되냐고 핸드폰 케이스에서 비상금 꺼냄ㅠㅠㅠㅠ
└ 그러면서 유연이가 슈크림을 좋아한다, 유연이가 맛있는 거 사 오라 그랬다, 집에 자기를 기다리는 토끼가 있다고 tmi 방출
└ 사실 좀 취한 것 같아서 의아했는데 오늘 근처에서 시트콤 회식 있었다 함ㅠㅠ 원래도 귀여운데 진짜 술 취한 백야는 미침
- 애들 토끼도 키워? 동물농장이야 뭐야ㅋㅋㅋㅋㅋ
- 미친 울 배우님 술 취한 거 개 귀엽네... 한백야 내 입속으로ㅜㅜ
- 붕어빵 목격담 뜸???
- 백야 주사 뭐 먹는 거 사는 건가?ㅋㅋㅋ
- 저러고 남매한테 잡혀갔다며ㅋㅋㅋㅋㅋ 진심 인생이 시트콤
- 오늘 대본 리딩 했었나 본데? 가족 같은 사이 공홈에 오늘 리딩 현장 동영상 올라옴! (동영상)
붕어빵 봉지를 품에 안은 백야는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오. 이걸 진짜 어디 묶어 둘 수도 없고.”
남경은 오늘 하루 동안 백야 때문에 몇 번이나 심장이 철렁했는지 몰랐다.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잠든 모습이 안쓰러워 허공에 주먹을 쥐락펴락만 할 뿐이었다.
“야, 일어나. 집에 다 왔다.”
백야가 ‘집’이라는 단어에 귀신같이 반응했다. 눈을 번쩍 뜨며 두리번거리다 익숙한 주차장임을 확인한 개복치는 의심 없이 내렸다.
“술은 좀 깼냐?”
“안 취해써.”
“안 깼네.”
취한 놈치고 취했다고 인정하는 꼴을 본 적 없는 남경은 대답 대신 혀를 찼다.
평소 같았으면 내려 주고 곧장 퇴근했을 텐데, 지금 상태로는 이놈이 숙소까지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너는 진짜 나한테 잘해라.”
“…붕어빵 머글래?”
“너나 실컷 먹어.”
백야의 뒷덜미를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층수 버튼을 누르며 백야에게 당부했다.
“너 웬만하면 밖에선 술 마시지 마라.”
“나 안 취했는뎅…. 근데요 형, 저 집에 가야 해요.”
“지금 가고 있잖아.”
집에 꿀이라도 발라 놨냐며 남경이 질색했다.
“자, 들어가. 비밀번호는 기억나냐?”
“네! 1231, 웁!”
백야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남경이 입을 또 한 번 틀어막았다.
“제발…! 제발 조용히 들어가서 자라고 제발.”
끄덕끄덕.
그러나 입을 풀기 무섭게 뒷자리를 이어서 읊는 백야에 남경은 결국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남경은 백야의 입을 틀어막느라 비밀번호를 누를 손이 없었고, 백야는 붕어빵을 안고 있느라 손이 없었다.
[누구냐!]
“야, 빨리 문 열어.”
그런데 돌아오는 소리는 도어 록 해제 음이 아닌 청의 비명이었다.
[아악! 도둑이야!]
인터폰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강도와 인질 같아 보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