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 * *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콘서트를 앞두고 기자 회견을 가진 데이즈는 한 명씩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너무 설레고 감사하다는 마음뿐이었는데요. 오늘 공연장을 찾아 주신 모든 분께 꿈같은 하루를 만들어 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민성이 밤새 준비한 멘트가 끝이 나자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대기실로 향하는 길목에는 데이즈의 첫 번째 콘서트를 축하하는 화환이 놓여 있었다.
기자 회견장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다섯 개 정도가 전부였는데, 잠깐 사이 개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늘어난 모습에 멤버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제우스 호텔에서 보낸 초호화 화환이었다.
[백야는 복숭아 반박 안 받음]
“푸하하!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다니까~”
율무는 제우스가 괜히 세계적인 호텔이 아니라며 햄스터 파들 앞에서 으스댔다.
“염병…. 내가 파 가르지 말라고 했지. 넌 긴장도 안 되니?”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나 지금 너무 신나.”
기자들 앞에서는 침착하게 대답하더니, 자리를 벗어나기 무섭게 초조한 티를 내는 민성이었다.
“그런데 한백야는?”
이쯤 되면 찡찡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와야 하는데 너무 조용했다. 가까이 있어야 할 분홍색 머리가 보이지 않자 지한이 두리번거렸다.
지한은 요즘 들어 무서울 정도로 백야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게. 백도 어디 갔어?”
“백야 님이요? 잠시 전화 받으러 가셨어요. 아까부터 계속 오는 게 급한 전화 같아서요.”
덕진이 백야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전화? 누구요?”
“개발자님이라고 되어 있던데요? 친구분 같았어요.”
개발자님이라면 백야가 사촌 형이라고 우기는 사람이었다.
덕진의 대답을 듣자마자 민성과 지한은 동시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외쳤다.
“화장실은 저쪽이 더 가까운데.”
“그러는 네가 저쪽으로 가지 그러니?”
두 사람은 가까운 곳을 놔두고 백야가 사라졌다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래도 목적이 일치하는 듯싶었다.
“형. 한백야 찾으러 가는 거지.”
“…너도?”
“응.”
빠르게 동맹을 맺은 둘은 복도 끝에 다다랐다. 비상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직 통화 중인 것 같았다.
민성과 지한은 벽에 바짝 붙어 백야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저희의 귀가 밝은 건지 통화음이 큰 건지, 상대의 목소리가 제법 선명하게 들렸다.
“업데이트를 하라고요?”
[업데이트 중에는 시스템이 개입하지 못하니까 퀘스트가 뜰 일도 돌발 이벤트가 진행될 일도 없어요. 죽기 싫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이해하기 힘든 대화에 지한과 민성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업데이트? 뭔 말이야?’
민성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무언의 대화를 시도했으나, 지한은 생각에 잠긴 듯 낯빛이 어두웠다. 리허설 내내 천장을 올려다보며 신경 쓰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한편 백야는 앓는 소리를 내며 애꿎은 허벅지만 꾹꾹 찌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알아내겠다던 필승은 약속을 지켰지만, 당사자가 내키지 않아 하고 있었다.
“업데이트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업데이트를 시도해서 결과가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국제 미아가 될 뻔했고, 두 번째엔 폐쇄 병동에 갇혔었단 말이에요.”
백야는 그 끔찍한 일을 두 번 당할 바엔 그냥 깔끔하게 콱 죽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벌컥-
그러자 그때, 비상문이 열리며 살벌한 표정의 저승사자가 나타났다.
“한백야.”
“아아악!”
[경고!]
[<병약미> 패시브와 반응해 시너^??지 □과를 일?Eu킵니다.]
[Error 409]
* * *
- 올공 구급차 뭐야?
- 올공에 구급차 왜 들어왔나요? 공연 이제 시작 아님??
- 7시 넘었는데 왜 시작을 안 하냐~ (공연장 사진.jpg)
- 스탠딩에 사람을 얼마나 욱여넣었으면 시작도 전에 구급차가 뜸?
- 티켓 모양 트럼프 카드인 거 오타쿠 취향 저격 (티켓 사진.jpg)
2층 11구역 1열.
덕질 인생 통틀어 최고로 좋은 자리에 앉게 된 복쑹은 황홀한 시야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대박. 시야 오졌다.”
“야, 사람 진짜 많다.”
“그거 아니? 여기 못 들어오고 밖에서 눈물 흘리는 나잉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지금도 많은데?”
콘서트 자체가 처음인 머글은 당연한 질문으로 그녀의 입을 아프게 만들었다.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민성이가 얘 같은 거랑 친구를 해 주지?’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 덕에 성덕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닥치고 있을 뿐이었다.
공연장 곳곳에 설치된 LED에서는 이번 공연의 타이틀인 로고가 떠 있었다.
“언제 시작해? 7신데.”
공연장에는 55분쯤부터 2집 수록곡인 <새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팬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잠시 후 나올 데이즈를 기다렸다.
복쑹의 서브 나잉봉을 쥔 동생도 마찬가지였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어?”
“왜, 왜. 연예인이야?”
멤버 가족석이 분포되어 있는 구역답게 복쑹은 이곳에서 다수의 연예인을 목격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카페 사장님 같은데.”
“아… 씨. 장난해?”
“아니, 왜 우리 제주도 갔을 때 귤 카페 사장님. 기억 안 나?”
“그 사람 얼굴을 내가 어떻게 알아. 할 일 없냐? 귤 사장 얼굴이나 기억하고 있게?”
동생의 말을 무시한 복쑹은 정면을 바라봤다. 노래가 슬슬 끝나가는 게 곧 어두워질 타이밍 같았다.
역시나 잠시 후, 볼륨이 서서히 작아지더니 조명이 꺼지며 암전됐다.
최소한의 조명만 남겨진 공간.
데이즈의 등장을 예감한 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시작이야? 시작?”
“어. 미친. 이제 시작할 건가 봐.”
가장 긴장되는 순간.
나잉봉을 세게 쥔 복쑹이 정면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그 순간, 정면 LED에 빛이 들어오며 오프닝 VCR이 재생됐다.
* * *
어두운 방 안.
탑이 무너진 것처럼 바닥 위로 흐트러진 트럼프 카드.
영상은 민성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됐다.
[오늘은 제가 겪었던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사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화면이 바뀌며 파란 하늘 위 태양이 비쳤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교복을 풀어헤친 율무가 등장했다.
“꺄아아악!”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멤버에 팬들의 함성이 크게 쏟아졌다.
친구들과 농구를 하던 율무는 운동장의 음수대로 달려가 수도꼭지를 돌렸다.
끼익-
허리를 굽힌 그는 고개를 비틀며 눈을 느릿하게 내리깔았다.
천천히 벌어진 입술은 물을 머금으며 잠시 동안 카메라를 응시했다.
동시에 아이 콘택트를 당한 팬들은 전보다 더 큰 함성을 터뜨렸다.
“꺄아아악!”
목을 축인 율무가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뒤돌아서는데, 그의 발치로 트럼프 카드 한 장이 떨어졌다.
툭-
카드를 주워 든 율무는 잠시 고민하더니 셔츠 주머니에 넣으며 스탠드로 걸음을 옮겼다.
가방을 집어 든 그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교문을 벗어났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 뒤로 분식집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만나 분식]
율무가 탄 버스가 지나가자 카메라 앵글은 자연스레 바뀌었다.
가게 앞에서 돈가스를 먹고 있는 앙증맞은 뒤통수.
두 번째 주인공은 백야였다.
동물 모양 돈가스의 귀를 사납게 물어뜯으며 전투 중인 백야에게 웬 낯선 남자가 다가갔다.
그런 그에게도 전해진 한 장의 트럼프 카드.
맹한 얼굴이 뺨을 긁적거리며 카드를 요리조리 돌려 댔다.
[어?!]
그러다 대뜸 허공을 가리키더니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전설의 캐스팅 일화를 영상으로 보게 되자 공연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어서 등장하는 세 번째 멤버.
도망가는 백야의 옆으로 버스킹을 준비 중인 유연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있던 그는 카메라를 켜 자신이 있는 곳이 잘 보이게끔 셀카를 찍었다.
위치 태그와 함께 SNS에 올린 그는 공연을 시작하기 위해 음악을 재생하려 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잉-
[Unknown 님이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는 트럼프 카드 사진이었다.
사진을 확대해 보던 유연은 시큰둥한 얼굴로 메시지 화면을 벗어났다.
[좋아요 30,112개]
메인 화면으로 나오자 좋아요 수가 3만 개가 넘는 추천 팔로워의 사진이 보였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지한의 모습이었다.
[♥ 30,113개]
유연이 좋아요를 누르자 사진이 확대되며 공간이 바뀌었다.
학교 미술관.
멈춰 있던 사진 속 지한이 움직이며 손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각도 때문에 지한이 그리는 그림은 가려져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캔버스 속 그림이 공개됐다.
역시나 트럼프 카드였다.
그 순간 멈춰 버린 영상은 다시 줌 아웃되며 유연이 좋아요를 누르던 시점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소식을 듣고 몰려든 관객들에 공연이 시작됐다.
이때 카메라는 관중 무리에 섞여 있던 청의 모습을 비추었다.
♬♪♩♬♪♪♩
퍼포먼스에 매료된 듯 넋을 놓고 보던 청은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내밀어진 한 장의 트럼프 카드.
저도 모르게 받아 버린 청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지만, 카드를 건네준 사람은 사라진 뒤였다.
두리번거리는 청의 시야에 이번에도 익숙한 옆모습이 나타났다. 관중들 주변을 기웃거리던 민성이었다.
그러나 많은 인파에 빠르게 포기한 그는 청을 지나쳐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드림 스터디 카페]
민성은 햇살이 좋은 곳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카드가 민성의 신발 위로 떨어졌다.
카드를 주워 든 그는 주인을 찾는 듯 카페를 둘러보지만,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머쓱해진 민성은 책상 한쪽에 살포시 놓아두며 책을 펼쳤다.
집중한 입술을 내민 채 책을 읽던 그는 얼마 안 가 잠에 빠져들었다.
안개가 낀 숲속.
카메라가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멤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트럼프 카드.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멤버들이 성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얀빛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