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VCR이 끝나자 공연장엔 잠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팬 라이트가 흔들리며 함성이 쏟아지길 잠시. 신비로운 분위기의 MR이 재생되자 함성도 점차 줄어들었다.
영상의 끝 무렵부터 서서히 흘러나오던 연기는 어느새 본무대를 가득 뒤덮고 있었다.
밝아지는 조명에 무대가 드러나고, 그곳엔 VCR에서 멤버들이 열고 들어간 성문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울려 퍼지는 백야의 목소리.
- 깊은 밤 안갯속
빛을 쫓아 들어선 어두운 문
너만이 나에게 허락된 빛이니
부디 이 꿈이 영원하길
시원하게 올라가는 고음에 MR도 웅장해졌다.
공연장을 울리는 함성은 마지막 멤버의 실루엣이 드러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암전된 무대.
청록빛 물결 속에서 민성의 목소리가 퍼지며 무대가 시작됐다.
- Shuffle mix 카드를 섞어
우리의 놀이는 시작됐어
콘서트 오프닝 곡은 데이즈의 데뷔곡이었던 <놀이>였다.
* * *
- 백야 목소리 들리자마자 온몸에 소름
- 온라인 동시 중계라도 해줘서 다행이다 진짜ㅜㅜ
- 의상 미쳤네
-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ㅠㅠ 율무 셔츠에 가슴 하네스만 입히신 분 돈길만 걸으세요
- 나율무 대흉근 기가 막힌다 진짜... 셔츠 터질 거 같은데 운동했나?
- 콘서트에서 복근 까는 거 국룰 아님? 얘들아 할미 기대한다
첫 번째 섹션의 의상은 슈트에 테크 웨어를 적절히 믹스한 디자인이었다.
<놀이>는 원래도 웅장한 곡이었지만 편곡을 하면서 그 기세가 더 대단했는데, 현장에 있던 팬들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압도당하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 시작부터 연출 개멋있어ㅋㅋㅋ
- 걍 성을 통째로 옮겨놨는데? 돈 냄새 오지게 난다
- 나도 눈으로 보고싶다ㅠㅠ 영상으로도 돌았는데 실제로 보면 더 쩔겠지ㅜㅜㅜ
같은 시각, 본무대 앞 2구역의 룸메. 나잉봉을 쥔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입장이 마감될 시간인데도 자꾸 사람을 집어넣길래 조금 언짢았지만, 생각보단 여유 있는 공간에 뒤로 빠져 있던 참이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앞으로 달려가길래 뭣도 모르고 따라갔으나 그곳은 전쟁터였다.
조금이라도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소리 없는 개싸움의 현장.
당연히 1분 컷 당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정신을 차려 보니 인파를 파고들며 앞으로 전진, 또 전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미친. 저게 사람이라고?’
데이즈의 실물을 처음 본 룸메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스탠딩이라길래 당연히 가까울 거라곤 생각했지만 육안으로도 이목구비가 보일 줄은 몰랐다.
“와아아악!”
곳곳에서 익룡이 출몰하며 스탠딩 중간 구역이 요동쳤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며 밀어 대는 관객들 때문이었다.
바로 룸메 같은.
- 스탠딩 헬이네... 잘 살아남으세요
- 데이드림 폰카 잡나요? 내일 스탠딩인데 걱정됨ㅠㅠㅠ
- 복숭아 춤 많이 늘었네ㅠㅠ 데뷔 초엔 동선 찾아가기 바빠 보였는데 지금은 너무 잘해
- 방금 지한이 살짝 웃는 거 본 사람?? 제가 헛것을 본 건 아닌지...
틈 사이로 파고들던 룸메는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기종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촬영 금지라더니 멤버들을 찍는 카메라가 한둘이 아니었다.
‘걸리면 퇴장 아니야?’
경호원이 핸드폰을 가리키며 내리라고 손짓했지만, 사실상 스탠딩은 통제가 불가능한 구역이었다.
그사이 지한의 랩 파트를 지난 곡은 2절 하이라이트 구간을 맞이했다. 무대 중앙에서부터 파도타기를 하듯 올라온 불기둥은 무대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유연의 파트를 마지막으로 다시 암전된 무대.
곧바로 1집 수록곡인 의 반주가 흘러나오며 무대가 이어졌다.
- 애들 긴장 많이 했나 봐ㅋㅋㅋ 하나같이 표정이 너무 살벌해
- 얘들아 좀 웃어 봐ㅋㅋㅋㅋㅋ
- 근데 ‘심장을 도려내’ 이런 가산데 웃는 건 좀 싸패같지 않음? 난 지금이 멋있고 좋아ㅜㅜ
- 콘서트 영상이랑 조명 연출 장난 아니다... 무대 이제 두 개째인데 스케일이 너무 쩔어...
- 미친 리믹스야? 댄브??
원곡과는 다른 전개에 댓글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2절 브리지 파트가 끝나자 율무를 제외한 멤버들이 옆으로 빠지며 붉은 조명이 무대를 비췄다.
동시에 하이라이트 구간의 비트가 반복되며 율무의 솔로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 율무 솔로 미쳤다ㅠㅠㅠㅠ 나율무 최고야 짜릿해ㅠㅠ
- 표정 쥑인다
- 강약 조절 미쳤고 골반 개 잘 쓰네... 춤이 박력 있다 못해 박력분이 돼버렸는데 왜 야하냐고....
짧은 댄스 브레이크 구간이 지나고, 설치물 위에 있던 율무가 멋지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동시에 다시 곡이 재개되며 화려한 불기둥과 불꽃 효과가 피어올랐다.
- 초반부터 이렇게 불꽃을 쏴 대면 나중에 어떡ㅎ아ㅏ앆 ㅅㅂ 방금 백야 한쪽 눈 찡그리면서 정색하는 거 본 사람ㅠㅠㅠㅠ
- 도민성 가성이 날 미치게 해
- 와 씨 이번엔 뭔데 뭐야
- 다크 룸이네ㅜㅜ 이거 내 최애 수록곡임
전진하며 나잉봉에 다섯 대쯤 얻어맞은 룸메는 결국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비교적 몸싸움이 덜한 곳으로 후퇴했다.
이곳은 돌출로 향하는 길목이라 인기가 없는지 2열 같은 3열에 서게 됐다.
“아아악! 백야약! 율묵, 케엑, 켁. 나율무우!”
율무의 솔로 댄스 브레이크에서 이성을 잃은 룸메는 벌써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어느덧 다섯 번째 곡이 시작되며 멤버들이 조금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돌출 무대로 이동하려는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이겠지만,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담기 위해 룸메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웬걸.
돌출 무대로 이동하는 줄만 알았던 멤버들이 통로에 멈춰서 안무를 하기 시작했다.
세 명씩 나뉘어 스탠딩 A, B 구역을 바라보고 선 탓에 룸메는 코앞에서 청의 용안을 감상하게 됐다.
“와 씨…. 와…. 와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충격적인 비주얼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길 잠시.
2절이 시작되자 멤버들이 자리를 바꾸며 복숭아 한 알이 떼구루루 굴러왔다.
“백야야악!! 아악! 아악!”
멋있는 척 진지하게 안무를 소화하던 백야가 흠칫거리며 무대 아래를 바라봤다.
***
여섯 번째 무대가 끝나고서야 공연장이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Wow~”
민성의 인사에 청이 호응을 유도하듯 환호하는 시늉을 했다.
드디어 다가온 첫 번째 멘트 구간에 팬들도 열띤 환호를 보냈다.
“저희 조금만 앞으로 갈까요?”
민성이 멤버들을 돌아보며 앞으로 이동했다. 본무대로 돌아온 멤버들이 예상보다 조금 뒷자리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 그만.”
“그만? 저 3층까지 가려고 했는데.”
민성이 거침없이 전진하는 율무를 멈춰 세웠다.
“그만 가.”
지한도 손을 뻗어 율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오케이~ 그럼 3층은 이따 가는 걸로~”
“네. 3층은 이따 가시고. 어… 멤버들 괜찮아요?”
격한 안무에 여섯 곡이나 연달아 부른 멤버들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특히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백야는 잠깐 휘청거려 팬들의 안타까운 탄성을 자아냈다.
놀란 지한이 허리를 받쳐 주고, 민성이 팔뚝을 잡아 주자 이번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눈에 땀이 들어가서 그랬어요.”
백야가 덤덤하게 답하자 두 사람도 금방 관심을 거두었다.
좌우를 한 번씩 둘러본 민성은 헤드 마이크를 고쳐 쓰며 진행을 이어 갔다.
“그럼 일단 인사 먼저 드릴까요?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데이즈의 우렁찬 목소리에 공연장은 한 번 더 함성으로 가득 찼다.
민성이 오른쪽을 바라보자 율무가 팔을 번쩍 들며 한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데이즈 율무입니다~ 잘 지냈어요? 제가 보고 싶진 않으셨고요?”
시작부터 능청스러운 멘트에 분위기는 자연스레 살아났다.
“데이즈 첫 번째 단독 콘서트! 데이드림에 오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제가 콘서트는 처음이라 신이 난 나머지 시작부터 텐션을 너무 높게 달렸나 봐요. 조금 숨이 차긴 하는데….”
다른 멤버들은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온 데 반해 율무는 아직까지 숨이 거칠었다.
그때 율무를 바라보고 있던 백야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몸을 기울였다.
‘물?’
멘트가 끊어지지 않게 입 모양을 벙긋거리자, 율무가 멘트를 멈추며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함성이 크게 쏟아졌다.
마침 전광판에 데이즈의 뒷모습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야의 정면이 그대로 중계되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율무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귀엽게….”
“엥?”
“왜 갑자기 저한테 입술을 내미시는 거예요? 뽀뽀해달라고?”
“내가 언제!”
“지한아, 너도 봤지? 당백이가 나한테 입술을 이렇게,”
“안녕하세요. 데이즈 지한입니다.”
어그로를 차단한 지한은 오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준비한 인사를 시작했다.
“오시는데 너무 멀진 않으셨나요? 오늘 비 소식이 있었는데 날씨가 맑아져서 다행입니다.”
지한은 오늘 콘서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실 때, 행복한 기분만 안고 돌아가 주신다면 바랄 게 없다며 감동 멘트를 날렸다.
“안녕하세요. 데이즈 백야입니다.”
백야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의상 소품인 힙 색의 체인이 흘러내렸다.
“앗.”
리허설 때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당황한 백야가 주섬거리자 멤버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백도 씨, 옷이 멋있네요.”
“고마워요.”
“근데 가방 안에는 뭐가 들었어요?”
“햄스터 먹이.”
유연의 질문에 청이 대신 대답하자 함성이 쏟아졌다.
“내가 힘들 때 먹으라고 간식 넣어 줬는데.”
백야는 딱히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으며 가방을 툭툭, 두드리기만 했다.
그러자 유연이 진심으로 되물었다.
“진짜?”
청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 생각했는지 순진한 반응이 돌아왔다.
민성과 지한, 율무도 믿는 눈치인 데다 팬들마저 고개를 주억이자 백야의 입꼬리가 꼬물꼬물 올라갔다.
이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진짠데. 청이가 줬어.”
“진짜라고? 어디 봐봐.”
백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연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다가갔다.
전광판엔 백야를 둘러싼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