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율무는 손도 빌고 애원도 해봤으나 무대가 시작돼야 할 타이밍까지도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 매일 아침 눈 뜨길 기다려
너의 하루는 나로 시작해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백야는 그 얼굴 그대로 파트를 시작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무대 중앙으로 향하면서도 청을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청은 오히려 좋아했다. 이어지는 자신의 파트에서 보란 듯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 Morning 좋은 아침이야
투정 부리는 게 좋아
나를 보는 눈이 사랑스러워
절묘한 가사에 현기증을 호소하는 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SNS에서도 ‘드디어 햄친놈이 햄친 짓을 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뮤지컬 섹션답게 멤버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가사에 맞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다 첫 번째 하이라이트 구간에 맞춰 중앙으로 모인 이들은 ‘딱붙 춤’을 선보이며 본격적인 섹션의 시작을 알렸다.
* * *
좌석에서 나잉봉을 흔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복쑹은 멤버들이 돌출 무대로 걸어 나오자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백야야악! 백야악!”
이 구역의 미친년답게 그녀의 목청은 대단했다.
근처에 앉아 있던 귤 사장 내외가 흠칫하며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쪽팔리니까 작작 좀 질러.”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미친 게 태어난 걸까.
혈육이 부끄러워진 동생은 나잉봉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변 시선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본인의 얼굴을 더욱 잘 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바로 그에게도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복쑹의 혈육답게 잠시 후 내로남불을 시전했다.
“와 씨, 민성아! 야악! 도민성!”
사인 볼을 던지며 돌아다니던 민성이 가까이 다가오자 동생이 잔뜩 흥분해 소리쳤다.
“민성아악! 도민성!”
“어?”
스탠딩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던 민성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가 친구를 발견했다.
“와 씨! 개잘생겼어!”
“푸핫. 잘 찾아왔네?”
웃음이 터진 민성은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곤 금방 멀어졌다.
동생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를 알은체해 줬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너무 찰나의 순간이었다.
미련이 남는지 아련한 눈빛으로 민성의 뒷모습을 좇는데, 순간 주변에서 저를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쩐지 복쑹도 평소와는 다른 눈으로 저를 보는 것 같아 그가 말을 더듬었다.
“오, 왜.”
“아니…. 너 진짜 대단하다….”
복쑹은 혹시나 하고 산 도래빗의 굿즈를 내밀었다.
“…할래?”
“이게 뭔데.”
“민성이 슬로건.”
[나를 미치게 하는 민성]
앞면에는 토끼 귀 머리띠를 쓴 민성의 얼굴이, 뒷면에는 글자가 적힌 슬로건이었다.
“이걸 왜 이제 주는데.”
친구 뽕이 차오른 동생은 망설임 없이 슬로건을 목에 둘렀다.
그러는 사이 스탠딩과 사이드를 배회하던 유연이 중앙 돌출 구역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어엌!”
얼굴 천재의 등장에 복쑹은 단발의 비명을 질렀고, 동생은 흠칫했다.
유연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기 때문이다.
‘뭔데? 왜 심장이 뛰는 건데.’
그 순간 의 전주가 흘러나오며 다음 곡이 이어졌다.
팀에서 춤을 제일 잘 추는 멤버라더니 과연 시작부터 태가 달랐다.
‘내가 감히 이걸 앉아서 봐도 되는 건가.’
곡 분위기 자체는 밝고 사랑스러웠지만, 박자가 빠르고 움직임이 많은 안무라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너무나도 쉽게 추고 있었다. 모든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절도 있는 강약 조절은 물론이오, 춤선이 부드럽다 못해 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미친….”
아이돌 그룹을 통틀어 손에 꼽히는 최고 댄서의 춤사위를 본 소감은 두 글자가 전부였다.
그가 넋을 놓고 감탄하는 사이, 곡은 2절로 넘어가며 동선에 변화가 생겼다.
이번에는 옆 구역에서 집사를 대량 양성하던 지한이 다가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도도한 고양이.’
영상으로 보던 것보단 실물이 정말 조금, 아주 조금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메인 댄서의 춤을 보고 난 직후라 그런지 살짝 비교되긴 했지만 잘 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줄곧 안무만 소화하던 지한은 곡의 끝 무렵에 다다라서야 마이크를 들었다.
독보적인 허스키한 보이스가 귀를 사로잡았다.
혼자 어디 깊은 산속 동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사기다.’
짝사랑하는 여자애가 얘를 좋아하던데.
저 얼굴에 목소리도 좋고 랩까지 잘하는 건 너무 인생이 불공평한 것 아닌가?
‘이번 생은 틀렸다.’
높은 현실의 벽을 깨닫고 짝사랑을 정리하는 사이, 무대가 끝나며 곧바로 다음 곡이 이어졌다.
공연장을 돌아다니던 멤버들도 다시 본무대로 복귀했다.
그곳에서 슬라이딩 LED 뒤로 숨는 시늉을 한 청과 백야가 그대로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막내즈가 백스테이지로 내려오기 무섭게 여러 명의 스태프들이 달려들었다.
“백야 망토 주세요!”
“청이 귀 달아!”
헤어와 메이크업 수정을 위해 분주한 스태프들의 손길만큼이나 의상을 갈아입는 막내즈의 손도 바삐 움직였다.
리허설 때는 부끄럽다며 쭈뼛거리던 백야도 실제 상황이 되고 나니 옷을 벗는 동작에 거침이 없었다.
말랑한 아기 배가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분 남았습니다!”
1분 뒤에 무대 위로 다시 복귀해야 하는 막내즈는 더욱 서둘렀다.
멤버들 중 제일 먼저 유닛 무대를 선보이게 된 청과 백야.
바닥을 비추는 플래시를 따라 돌출 무대로 이동하던 백야가 가슴을 짚으며 인상을 구겼다.
순간 속이 울렁이며 토기가 올라올 뻔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싸한 기분이 들던 것도 잠시.
직전 무대가 끝나며 공연장이 어두워졌다.
“두 분 올라갈게요!”
청과 백야가 돌출 무대의 리프트에 올라타자 곧바로 무대 위로 올려졌다.
막내즈의 무대를 도와줄 댄서들은 무대 옆으로 설치된 계단을 통해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형체를 발견한 나잉이들이 웅성거리자, 공연장이 다시 밝아지며 경쾌한 반주가 흘러나왔다.
- 하나, 둘, 셋, 넷!
폭죽 효과와 함께 나타난 건, 회색 늑대 귀 머리띠를 쓴 청과 빨간색 망토를 두른 양 갈래 머리 백야였다.
“꺄아아악!”
빨간 망토와 늑대가 콘셉트인지 LED 화면 속에는 숲속의 예쁜 오두막집이 배경으로 나오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온라인 콘서트를 관람하던 나잉이들 또한 발칵 뒤집어졌다.
- 아아ㅏ아악!! ㅅㅂ 미쳤나 봐!!!
- 캔디 젤리 앙♡이라니.... 드르륵 탁... 캔디 젤리 앙♡이라니.... 드르륵 탁...
- 미친 돌았나ㅋㅋㅋ 선곡 누가 했냐ㅋㅋㅋㅋㅋㅋㅋㅋ
- 시X 나 변사체로 발견되면 막내즈 때문임
- 이 곡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돌판 레전드 선병맛 후중독의 시초가 된 노래로, 수능 금지곡이라는 단어를 제일 처음 만들어낸 노래임
- 안 그래도 4분의 4박자는 한국인에겐 치트키 같은 존잰데 저런 착장으로 나오면 좋아 죽으라는 거잖아ㅜㅜ
- 백야 꽁지머리 넘 앙증맞아서 죽고싶다ㅠㅠㅠ (백야 캡처.jpg)
네 마음을 나에게 주지 않는다면 앙! 물어 버릴 거라는 내용의 가사와 발랄한 안무가 더해져 당도라는 것이 폭발하고 있었다.
양손을 들어 청을 위협하듯 손끝을 세운 하찮은 햄스터를 보자니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 청이 직업만족도 최상ㅋㅋㅋㅋ
- 멤버가 콘서트에서 사심 채우고 있는데요??? (광대 올라간 청 캡처.jpg)
- 청이 잇몸 마르겠다... 누가 물 좀 줘라....
- 햄스터랑 무대 할 때 직업만족도 상승하는 편ㅋㅋㅋ 청이만큼 투명한 애 없다...
- 그럼 다른 애들도 유닛 무대 있다는 거지? 미친 존X 좋아
- 울 애기 이러다 진짜 청이한테 잡아먹히는 거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어ㅠㅠ (손으로 입 가린 짤.jpg)
└ 그렇다기엔 당신 프사가 청인데? 손 좀 치워보시죠
└ (웃고 있는 짤.jpg)
- 유닛 멤버 어떻게 정한 건지 유앱에서 썰 풀어주면 좋겠다ㅜㅜ
└ 안 봐도 진흙탕 싸움이었을 거 같은데ㅋㅋㅋㅋ 단체로 백친놈들이라 백야가 고생 좀 했을 듯
- 실시간 율무 (창문 아저씨 짤.jpg)
└ 도랏냐고ㅋㅋㅋㅋㅋㅋㅋ
└ 근데 진짜 무대 밑에서 저러고 있을 거 같아ㅠㅠ
백야가 폴짝거릴 때마다 팔꿈치 부근의 망토 자락이 팔랑거렸다.
리허설 때는 양 갈래를 한 제 모습에 현타를 느꼈지만, 함성 소리가 들리는 지금은 전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리는 팬 라이트를 보니 청의 말을 따른 게 잘한 선택이지 싶었다.
청도 잔뜩 신이 나선 광대가 내려올 줄을 모르는 게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슬쩍슬쩍 서로의 눈을 맞추며 무대를 즐기다 보니 유닛 무대는 어느새 엔딩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 날 사랑하는 만큼 (앙)
엔딩 포즈는 지금의 백야를 있게 한 깨물 하트로 마무리됐다.
과연 원조답게 황금 비율로 찌그러진 백야의 하트에 비해, 청의 하트는 조금 어설펐다.
그러나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깜찍한 투 샷임에는 변함없었다.
“꺄아아아악!”
함성이 들리며 공연장은 다시 어두워졌다.
계단을 통해 무대 아래로 내려간 백야와 청은 다음 무대 준비를 위해 또 한 번 달리기 시작했다.
세 번째 VCR의 길이는 2분 남짓.
멤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도착하자 스타일리스트가 두루마기를 펼쳐 입기 좋게 잡아 주었다.
“Thanks.”
한복에 팔을 끼우던 청이 매너 다리를 하며 키를 낮춰 주었다. 늑대 귀를 떼어 내기 위함이었다.
“유연 씨 올라갈게요!”
드디어 컴백 타이틀 선공개 무대였다.
“유연이 파이팅!”
율무가 주먹 쥔 팔을 들자, 유연이 피식 웃으며 보조개로 화답했다.
새하얀 야생 꽃이 가득 펼쳐진 들판.
산들거리는 바람에 너울거리는 데이지 꽃.
그 위로 내디뎌진 맨발.
검은 바짓단이 발등을 스치고, 바람에 날리던 도포 자락이 하늘거렸다.
꽃을 꺾는 손을 비추던 카메라는 천천히 올라가며 전신을 비추었다.
얼굴이 드러나려던 순간, 햇빛에 반사되어 역광으로 번졌지만 팬들은 알 수 있었다.
저 고운 선은 유연이 틀림없다는걸.
휘이이-
바람 소리에 꽃잎이 흩날리며 영상은 끝이 났다.
그 순간 본무대 위로 떨어진 은은한 핀 조명.
동시에 허공에서 내려온 데이지 꽃 한 송이.
범상치 않은 인트로에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란 걸 직감한 공연장엔 고요가 내려앉았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실루엣.
얼굴 가리개를 쓴 한 명은 거문고 연주자였고, 또 다른 실루엣은 보라색 두루마기를 걸친 유연이었다.
천천히 걸어와 꽃을 쥔 그가 향기를 맡는 순간, 꽃가루가 날리며 손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뚱 뚜-
거문고 현이 힘 있게 튕기며 데이즈의 컴백곡 <야화(野花)>가 베일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