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뚱 뚜두 뚱뚜-
거문고 반주가 시작되자 유연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턴을 돌았다.
휘날리고 휘감기는 도포 자락이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고.
뚱두두둥-
사뿐한 걸음을 따라 팔랑이던 꽃은 입술 사이에 머금어졌다.
장단에 맞춰 우아한 솔로 퍼포먼스가 이어지더니.
뚱 땅-
굵게 튕기며 멈춘 현에 걸음도 멈추었다.
이내 북, 꽹과리 등 전통 악기와 현대 음이 합쳐지며 <야화(野花)>의 MR이 흘러나왔다.
“꺄아아아악!”
조명이 밝아지며 남은 멤버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유연과 같은 두루마기를 걸친 멤버들은 각기 다른 스타일링으로 한 번 더 시선을 끌었다.
머리카락에 작은 노리개 장식을 단 유연과 민성, 자개 귀걸이를 한 백야.
그러나 이 중에서도 파격적인 스타일링으로 공연장을 발칵 뒤집어 놓은 멤버가 있었으니.
“지한이 장바알! 아악!”
“X발! 미쳤어!”
허리까지 오는 생머리로 리즈를 갱신한 검은 고양이가 있었다.
쏟아지는 환호와 함성이 저를 향한 걸 알기라도 하는지, 지한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
바람에 꽃잎이 흐드러지게 날리는 듯한 황홀한 사운드.
2절의 변주 부분만 공개하기로 한 멤버들은 MR에 맞춰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꽃봉오리가 움트듯 한데 엉킨 멤버들. 점점 격해지는 반주에 안무 또한 화려해졌다.
백야를 제외한 멤버들이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는 순간, 잠시 멎었던 반주가 차분하게 바뀌며 그 위로 백야의 보컬이 얹어졌다.
- 나 그대만을 위해 피어난
그대 손에 아스러지고픈
사뿐한 걸음으로 동선의 끝으로 이동하던 백야가 제자리에 멈춰서 우아한 턴을 돌았다.
- 화 花
꽃망울을 피우듯 허공을 톡 건드리자, 절제된 반주에 멤버들의 코러스가 더해지며 단체 군무가 이어졌다.
비록 가사가 생략되어 아쉬웠지만, MR만으로도 ID에서 다음 컴백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내 두루마기를 벗은 데이즈가 허공으로 의상을 날리며 짧은 무대는 끝이 났다.
공연장은 다시 어두워졌고, 돌출 무대 위로 하얀 보름달이 내려왔다.
* * *
- 다음 컴백 동양풍? 맨발? 응 죽을게ㅠㅠㅠㅠ
- 화음 미쳤다는 말밖에.....
- 넘 짧아 더 보여줘... 아니 하지 마... 보여줘! 아니 하지 마ㅜㅜ
- 지금 올공에 달 뜸 (데이즈 콘서트 무대 캡처.jpg)
- 개쩌는 무대에 이마를 퍽퍽 쳤더니 거북목이 치료되었습니다
- 그래서 제목이 뭔데ㅜㅜ 화아아~ 하던데 화야? 저 부분 화음이 진짜 극락
└ 그대만을 위해 피어났다는 거 보면 꽃 화(花)인 듯ㅠㅠㅠㅠ
- 선공개 미쳤는데? 갓이즈 그저 갓....
- 지한이가 찢었다.....
- 근데 노래가 좀 급하게 끊어지지 않았어? 뚝 끊어진 느낌이랄까
└ 일부 선공개라 그런가? 이게 하이라이트겠지ㅠㅠ 존X 좋아
- 오늘 자리 상관없이 첫콘 간 사람이 위너였다
선공개 직후, 바로 무대가 이어졌다.
팬들은 <야화(野花)>의 강렬한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더욱 열광했다.
유연의 마지막 소절을 끝으로 잠시 어두워졌다 밝아진 공연장.
다시 찾아온 멘트 시간이었다.
[율무 : 나잉이 안녀엉~]
과하게 애교 섞인 목소리에 지한이 실소했다.
[유연 : 그런데 저희 지금 멤버가 바뀐 것 같은데요? 웬 걸그룹 한 분이 지금~]
[율무 : 게스트 아니었나요?]
[민성 : 이 깐족이들…. 일단 앞으로 나가서 이야기 해 볼까요?]
이번엔 돌출 무대까지 걸어 나간 멤버들은 땀을 닦고 물을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민성 : 네~ 다행히 나잉이들이 공연을 잘 즐겨 주고 계신 것 같은데요. 여러분, 재미있어요?]
[팬 : 네에~]
[청 : 우리 한복 잘 어울려요?]
[팬 : 네에!]
[청 : 그럼 소리 질러!]
[팬 : 꺄아아악!]
시도 때도 없이 ‘소리 질러’를 외치는 청을 향해 유연의 타박이 들려왔다.
[유연 : 얘 지금 맛 들였어. 여러분, 이런 거 자꾸 해 주시면 청이 버릇 나빠져요.]
[청 : 소리 질러!]
[팬 : 꺄아아악!]
[청 : 소리!]
[팬 : 꺄아아아악!]
청개구리 모드가 켜진 청이 계속해서 마이크를 넘기자, 보다 못한 백야가 나섰다.
[백야 : 그만해. 팬분들 목 아프시겠다.]
[청 : 응.]
[민성 : 청이가 저희 말은 안 듣는데 백야 말은 참 잘 들어요. 귀여워 죽겠어요.]
[청 : Thank you.]
[지한 : 칭찬 아니지 않아요?]
[청 : 형은 예뻐.]
[지한 : …….]
갑자기 화살이 저에게 돌아오자 지한이 말을 아꼈다.
그러나 한 번 집중된 관심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율무 : 오늘 컴백 무대도 일부긴 하지만 최초 공개, 지한이 머리도 최초 공개~]
[유연 : 근데 진짜 잘 어울려. 나 어제 리허설할 때 로즈데이 선배님이 구경 오신 줄 알았잖아.]
[지한 : 과장이 심하네요.]
[백야 : 아니야. 진짜 예뻐.]
[율무 : 맞아요. 제 이상형.]
[지한 : 저에게서 관심을 거둬 주세요. 무대 이야기해요.]
[유연 : 왜. 부끄러워?]
[지한 : 응.]
지한이 순순히 인정하자 장내엔 그를 귀여워하는 함성이 울렸다.
[민성 : 지한 씨, 어쩌다 장발을 하게 됐는지 비하인드라도 조금 들려주세요.]
[지한 : 그냥… 팬분들께서 제 어릴 때 사진을 많이 좋아하시길래. 마침 콘셉트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해 보겠다고 했어요.]
[율무 : 나잉이를 위해서 컨펌에 컨펌에 컨펌을 거쳐 완성된 헤어스타일~ 정말 감동입니다.]
[율무 : 저희가 머리 한번 바꾸려면 대표님 승인이 있어야 하거든요.]
[유연 : 너무 TMI예요.]
[민성 : 그만큼 저희를 신경 써 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뜻이었습니다.]
[민성 :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최초! 저희 컴백 무대 선공개에 이은 깜짝 발표가 남아 있죠?]
[백야 : 네에~]
[민성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저희 데이즈가 곧 컴백합니다. 박수~]
멤버들이 환호하며 박수 쳤다.
[율무 : 자세한 공지사항은 콘서트가 끝나면 ID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야 : 그런데 제목 정도는 알려 드려도 괜찮지 않아요?]
멤버들을 돌아보며 무언의 허락을 구한 백야는 볼을 방싯거리며 말했다.
[백야 : 야화!]
[율무 : 뭐라고요? 야한?]
[청 : What? 백야 야하다고?]
[유연 : 이 사람들 듣기 실력 무슨 일이야.]
[백야 : 또 시작이네요.]
멤버의 입에서 나온 자극적인 단어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백야 : 너희 일부러 그러지.]
[청 : Nonono. 진짜 그렇게 들렸어!]
[유연 : 넌 약간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향이 있어. 받아쓰기도 네 마음대로 적잖아.]
[청 : No! 나 받아쓰기 100점이야!]
청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자 멤버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팬들은 그의 귀여운 허세에 열광했다.
[지한 : 그 말 나잉이한테 증명할 수 있어요?]
[백야 : 넌 주거따. 그럼 나잉이가 보는 데서 받아쓰기해!]
[청 : 당근 하지!]
[민성 : 오~ 자신감이 넘치는데? 오케이. 그럼 콘서트 끝나고 유앱으로 받아쓰기 시험 한번 쳐.]
갑작스러운 유앱 약속에 팬들은 환호했다.
이후 무대에 관한 대화가 잠시 이어지다 <판매왕> 비하인드 스토리가 언급됐다.
[율무 : 그런데 팬분들께서 데이즈 이제 5인조 되는 거 아니냐고~ 나율무 어떻게 살아 있냐고 묻는 글들이 많더라고요.]
[백야 : 왜?]
[율무 : <판매왕> 방송이 나가고 나서 제가 멤버들 손에 죽을 줄 아셨대요. 쪽쪽이~ 쪽.]
율무가 입술을 내밀며 뽀뽀하는 시늉을 하자, 지한이 순발력을 발휘해 백야의 뒤로 숨었다.
대신 백야가 그의 방패가 되어 앞으로 내밀어졌다.
[백야 : 으악!]
두 번째 섹션의 오프닝에서 청의 기습 뽀뽀가 생각난 개복치는 얼굴을 찌푸리며 진심으로 싫어했다.
반대로 팬들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환호했다.
[민성 : 파핰! 그러고 보니까 아까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백야 : 맞아! 나 그거 할 말 있어!]
지한이 여전히 백야를 방패로 삼고 있는 탓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바동거리던 백야가 고개만 돌려 노려보자 청이 눈을 피했다.
[청 : 다음 무대 시작 안 해요? 빨리 무대 해야지.]
[백야 : 야, 이거 놔 봐.]
[청 : No! 지한 안 돼!]
씩씩거리던 백야가 지한의 품에서 탈출하자, 이번에는 청이 유연을 방패 삼으며 뒤로 숨었다.
무대를 하느라 잠깐 잊고 있던 율무도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율무 : 아!!!]
[민성 : 깜짝이야.]
[율무 : 맞다. 아까 왜 소리 질렀어요?]
[율무 :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는 진짜 공연장 뚜껑이 날아가는 줄 알았어요.]
꺄아아아악!
터져 나오는 함성에 개복치의 앞니가 드러났다. 위험을 인지한 청은 한 팔을 뻗으며 백야를 진정시키려 했다.
[청 : Hey! Hey, Calm down.]
[율무 : 왜? 아까 뭐 했는데?]
율무의 물음에 팬들이 ‘뽀뽀’를 연호했다.
[율무 : 또? 오또?]
그러나 소리가 울려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스탠딩 쪽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여도 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율무 : 모르겠어요.]
자리로 돌아와 물을 마시던 율무는 때마침 이어진 범인의 자백에 그대로 물을 뿜어 버렸다.
[청 : 그래! 내가 뽀뽀했다!]
[율무 : 푸웁!]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율무는 턱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청 : 근데 이거 처음 아닌데?]
자백 이후 폭주하기 시작하는 청에 이제는 백야가 사색이 되었다.
[백야: 그만! 그만 말해!]
[청 : 프랑스에서는 인산데 왜? Mom이랑도 하고 Dad는… 안 한다. Anyway. 햄스터랑은 해.]
[백야 : 누가 쟤 입 좀, 아니, 이것 좀 놔 봐…! 왜 또 잡는데?]
[지한 : 안 돼. 가서 물 거잖아.]
[백야 : 안 물어! 내가 개야?]
[지한 : 햄스터도 물어.]
지한에게 잡힌 백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저놈의 입을 막으라 소리쳤다.
[민성 :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 텐데 청이 주사가 뽀뽀하는 거예요. 괜히 오해하실까 봐….]
[청 : Oh yeah? 내가 뽀뽀하면 오예야?]
[유연 : 얘 절대 술 먹이면 안 돼. 근데 형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율무 : 뽀뽀라니…. 뽀뽀….]
[백야 : 살려 줘!]
[지한 : 나는 널 해치지 않아.]
- 이게 무슨 난리야ㅋㅋㅋㅋㅋ
- 오늘도 역시나 데망진창ㅋㅋㅋ
- 복친놈 선수 뺏겨서 충격먹었나봐ㅠㅠㅠㅠ 어떡해ㅠㅠㅠ
- 아까부터 계속 백야 안고 있는 지한이가 진정한 승리자 아닐까
└ 이 난리 통 속에서 조용히 사심 채우는 또양이ㅋㅋㅋ
[민성 : 원래는 청이가 백야 볼을 찌르는 거였는데 갑자기 뽀뽀를 하는 바람에 저희도 당황스러웠어요.]
[청 : 볼이 통통해서 귀여웠어. 인생은 타이밍이지.]
[유연 : 술 마시고 올라온 거 아니죠?]
[청 : No! 나를 모로 보고.]
그때 백야를 끌어안고 있던 지한이 통통한 볼을 슬쩍 눌러 보았다.
꾹-
꺄아아악!
꾸욱-
꺄아아아악!
[백야 : 하아….]
조용한 또라이에 햄친놈까지.
이내 포기한 듯 백야가 몸을 축 늘어뜨리자, 율무가 지한을 부러워하며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율무 : 나도 뽀뽀!]
[백야 : 싫어!]
[율무 : 왜 나만? 왜 나만 차별하는데? 당백이 너무해….]
[청 : 햄스터는 내 거니까.]
[민성 : 그만, 그만.]
이대로면 멘트가 한없이 길어질 것 같았는지 민성이 적당히 끊어 냈다.
[민성 : 여러분이 이해해 주세요. 저희 애들이 단체로 백야에 미쳐서….]
[백야 : 너희랑 말 안 해.]
[유연 : 아, 어쩔 거예요. 여러분 때문에 백도 삐졌잖아요.]
[민성 : 그래도 무대 시작하면 열심히 하겠지. 다음 곡 들려드릴게요.]
멘트를 마무리하자 공연장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밝아졌을 땐 돌출 무대 위에 지한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