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지한의 뒤에는 커다란 상자가 천으로 덮여 있었다.
제비 꼬리가 달린 검은색 연미복을 입은 그는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Ladies and gentlemen.”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리고.
데이즈의 두 번째 유닛 무대임을 알아차린 팬들은 그의 파트너가 공개되길 숨죽여 기다렸다.
“Rabbit.”
붉은 천 자락을 힘껏 당기자 함성이 쏟아졌다.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는 토끼 귀 볼캡을 쓴 민성이 앉아 있었다.
동시에 경쾌한 비트가 흘러나오며 무대가 시작됐다.
지한은 리듬을 타며 유리 상자 주위를 맴돌았고, 민성은 시큰둥한 얼굴로 한 손에 턱을 괬다.
- Mirror mirror, Who is the cutest in the world?
Maybe it’s me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귀엽니? 아마 나일걸.
내가 귀여운 건 나도 안다는 듯 당돌한 표정.
그러나 관심 없는 척 토끼 귀를 만지작거리던 민성은 ‘우물 안 개구리의 혼잣말이 아니야’라는 가사를 부르며 상자를 열고 나왔다.
Rabbit은 밝고 경쾌한 비트감, 신나는 멜로디가 인상적인 팝송이었다.
나를 마음껏 귀여워해도 좋다는 토끼의 마음을 대변한 곡으로, 민성의 목소리와도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다만 의아한 부분이 있다면 원곡은 랩 파트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는데.
- Ooh, baby
역시나 계속되는 보컬 파트에 지한은 추임새만 넣으며 리듬을 탈 뿐이었다.
그러다 프리 코러스에서 중저음의 매력적인 음색이 치고 들어왔다.
민성과 비교해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 실력에 다들 놀란 눈치였다.
* * *
“아악! 지한아악!”
장발에 연미복 같은 걸 입혀 놓으니 황태자 같다나 뭐라나.
복쑹을 비롯한 모든 나잉이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노래까지 잘하고 난리….’
지한에게 완패한 동생은 몰래 눈물을 훔쳤다. 사랑의 라이벌이 잘나도 너무 잘났다.
치이는 영어 발음.
능글맞은 무대 매너.
아름다운 목소리 합.
의외의 케미에 공연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잠시 후, 두 번째 유닛 무대가 끝나자 똑딱거리는 메트로놈 소리가 이어졌다.
“여러분 뛸 준비되셨나요?”
본격적인 EDM 섹션이 진행될 시간이었다.
LED에 숫자가 뜨며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Five.”
점점 빨라지는 비트와 고조되는 분위기 속.
“Four!”
지한과 민성이 돌출 무대를 지나 2층 객석을 향해 달렸다.
“Three!”
다른 멤버들도 무대 위로 올라오며 함께 카운트에 합류했다.
“Two!”
잔뜩 들뜬 율무가 머리카락을 팔랑이며 2층을 향해 달려가고.
“One! Everybody Scream!”
소리 질러를 영어로 외친 청이 돌출 무대 중앙에 멈춰 섰다.
클럽 섹션을 위해 준비한 신곡 MR이 흘러나오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 멤버들이 제자리뛰기를 시작했다.
“Jump! Jump! Jump! Jump!”
방방 거리며 제자리뛰기를 한 멤버들이 호응을 유도했다.
“자, 2층 3층도 다 같이 일어나서 뛰어 볼까요?”
여기서요?
멀쩡한 의자를 두고 일어나라는 말에 동생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나잉봉을 움켜쥔 채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귤 사장님을 발견했다.
‘아무리 봐도 멤버랑 닮았는데….’
심각한 얼굴로 귤 사장님을 훔쳐보는데, 그런 사장님의 옆으로 또 다른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뭐지? 어디서 많이 본….’
지방 사람이 이런 곳에서 친구를 만날 리는 없고. 상대는 저희 부모님보다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였다.
어두운 시야에 눈을 게슴츠레 뜬 동생이 거북이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그때 동생이 주시하던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가 가깝진 않았지만 남자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아이고. 아이고, 잘한다.”
손주의 재롱 잔치에서나 들을 법한 리액션에 동생은 당황했다.
‘백야가 제일 인기가 많다더니 팬 연령대가 스펙터클하네….’
그리고 그런 남자의 옆으로 수려한 외모의 젊은 남성을 발견했다.
“처나암! 애기야악!”
소리 지르는 모습이 복쑹과 재질이 비슷하여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남성 또한 묘하게 낯이 익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두 거물을 알아본 동생. 두 남자의 정체를 눈치챈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우스?!”
중년 남성은 경제면에 자주 나오는 그 회장이 틀림없었고, 옆의 젊은 남자는 볼캡을 쓰고 있지만 제우스 3세가 틀림없었다.
근방의 나잉이들도 두 사람의 정체를 눈치챈 듯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여러분, 같이 뛰어요~”
때마침 들린 백야의 목소리.
동시에 일어선 세 남자는 나잉봉을 치켜들며 애기를 부르짖었다.
* * *
- 첫콘 나잉인데 지금 내 앞에서 제우스 회장님이 나잉봉 대가리 날아갈 정도로 열심히 흔들고 있음...
└ 애들 내일 경제면 기사 나는 거 아니야?
└ 이제우가 할 짓이 없어서 데이즈 콘서트를 감? 누가 보면 멤이 재벌 3세라도 되는 줄ㅠ 역시 멍청한 나잉이들 대가리는 장식인가
└ 나잉이들 유난 하나는 알아줘야 함
- [제우스 이제우 회장, 가족과 함께 ‘데이드림’ 콘서트 관람] (링크)
└ 사돈 재롱 잔치 보러 가셨답니다~
- 미친 얘들아 데이즈 콘서트에 제우스 떴대;;
- 백야 가족들 온 것 같던데 아버님 미모가 백야 인생 미리 보기 수준이라고... 큰 복숭아 그 잡채라는 후기 보고 혼자 아버님 얼굴 망상 중ㅜㅜ
- 백야 누나분 개애애존예. 배우 포스 오짐. 우리 구역에 있던 사람들 다 처음엔 연예인인 줄 알았다
- 제우스가 흔들던 나잉봉 대가리 날아갔다는 후기 다시 보고 싶은데 못 찾겠다ㅋㅋㅋㅋ 개웃겨ㅠㅠㅠ
└ 재벌도 사람이구나ㅋㅋㅋ
- 민성이 친구도 온 거 같던데?
- 오늘 백야네 사돈 모임 하는 날이야? 온 집안이 애기로 대동단결ㅋㅋㅋㅋ
└ 아니 무슨ㅋㅋㅋ 백야 주변엔 극성 맘밖에 없냐고
- 큰 제우스 작은 제우스는 햄찌파일까 복숭파일까
- 클럽 타임 개신난다!!!!
- 미친. 2층 객석 사이에 계단 뭔가 했는데 저거도 돌출이었네... 돌았다ㅜㅜ 3층까지 올라가는데?
└ 이래서 아까 율무가 3층 이따 간다 그랬구나 ;ㅅ;
- 미미미친. 나 막콘 40구역 1열인데 청이랑 지한이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ㅠㅠ
- 다 클럽 타임인데 율무 혼자 PT 중ㅋㅋㅋㅋ 계속 뛰라 그러고 안 뛰는 나잉이 있으면 손으로 집어낸다 함
└ 율무 있는 3구역 실시간으로 체력 빠지는 게 눈에 보여ㅋㅋㅋ
└ 지옥의 PTㅋㅋㅋㅋ
- 회원님 쉬면 안 돼요 (율무가 손으로 가리키는 사진.jpg)
“여러분~ 더 뛸 수 있어요?”
율무의 목소리에 나잉이들이 대답했다.
“멤버들은요?”
“당근 하지!”
스탠딩을 돌아다니던 멤버들이 하나둘씩 본무대로 모이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그때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공연장이 붉은색 조명으로 물들었다.
세 명씩 마주 보고 선 멤버들.
유연과 율무의 유닛 무대인 댄스 배틀 퍼포먼스가 이어질 타이밍이었다.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유연은 건들거리며 율무를 견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훠우!”
막내 팀 대 형 팀.
유연의 뒤에 선 청과 백야가 추임새를 넣으며 상대 팀을 도발했다.
바닥을 쓸며 앞으로 슬라이딩한 유연은 바닥을 짚고 반 바퀴 돌더니, 허리 힘만으로 일어서며 가볍게 기선을 제압했다.
물 흐르듯 유연한 동작에 몇몇 나잉이들의 내적 댄스가 폭발했다.
- 한유연 허리 힘으로 버텼다 일어나는 거 미쳤다
- 유연이 이름처럼 유연한데 코어 힘이 더 대박이야ㅠㅠ 천재 만재
이번에는 유연의 도전장을 받아들인 율무가 앞으로 다가왔다.
율무의 뒤에 서 있던 민성과 지한도 제스처를 취하며 막내즈를 도발했다.
“쓰리, 투, 원. 컴온!”
여유로운 척 반주에 맞춰 카운트를 센 율무가 파워풀한 동작을 선보이며 유연의 공격을 받아쳤다.
무대를 향해 총을 쏘는 듯한 시늉을 하던 그는, 무릎을 굽혀 단숨에 바닥에 누웠다.
그 상태에서 몇 개의 동작이 더 이어지더니, 마지막엔 오로지 발목의 힘만으로 일어섰다.
- 파워, 스킬, 센스, 무대 장악력 모든 게 king
└ 역시 킹무
- 찢었다...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
상대를 가늠하듯 마주 본 채 자리를 돌던 두 사람은 페어 댄스를 이어 갔다.
- 박력 페어 무대 박살 내는 중
- 오늘 춤 무슨 일이야; 박력에 놀라서 무대 부서지겠음
짧지만 강렬했던 페어 안무에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러나 아직 승부를 가르진 못한 듯, 두 사람은 고개를 건들거리며 곤란한 척했다.
그때 민성의 어깨를 움켜쥔 율무가 그를 앞으로 내밀며 배틀 스테이지에 세웠다.
“Go 민성! Go 민성!”
“가랏! 햄스터!”
라운드 2.
번외 무대가 성사됐다.
이번에는 뚝딱이들의 대결인지 팀 내 최약체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 [속보] 큰 제우스는 햄찌파, 작은 제우스는 복숭파로 밝혀져 충격
- 부자가 취향이 정반대네ㅋㅋㅋㅋ 신기하다
- 청이가 햄스터라고 하자마자 큰 제우스 무릎을 탁 치면서 “그렇지!” 이랬음
└ 청이 제우스 입사하면 초고속 승진 확정이네
요란하기만 한 민성의 깡충 스텝과 공격력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백야의 솜 주먹 섀도복싱이 몇 번 오갔다.
가쁘게 달려오던 분위기는 두 사람의 살신성인으로 유쾌하게 바뀌었다.
“여러분. 얼마 안 남았어요. 아직 더 즐길 수 있죠?”
“네에~”
지한의 시니컬한 목소리에 율무가 깜찍함을 담아 대답했다.
“Whoo-o Whoo~”
MR과 함께 민성의 허밍이 울려 퍼졌다.
EDM 섹션에 맞게 원곡보다 경쾌하게 편곡된 . 분위기를 타고 이어지는 까지.
“이제 진짜 마지막이에요~”
“여러분 다 같이 미칠 준비됐죠? 그럼 우리 나잉이, 뛰어 볼까요?”
- 우리 나잉이요??? 한유연 유죄
- 백야 폴짝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거 진심 잠자리채로 잡고 싶다
전광판 가득 청의 원샷이 잡히고.
“One! Two! One, two, three. Let’s go!”
파앙!
의 하이라이트 구간과 함께 공연장 내의 모든 특수 효과, 꽃가루가 화려하게 터지며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