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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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돌 외국인 멤버들만 모아서 받아쓰기 대회 한번 열자ㅋㅋㅋㅋ
- 어제자 데이즈 유앱 방송 사고 (동영상)
- 내 새끼 햄스터한테 멋지게 보여야 하는데ㅠㅠ (청 시무룩한 캡처.jpg)
- 9세에서 갑자기 19세 돼버린 받쓰 (받아쓰기 답안지 캡처.jpg)
- 율무가 허리를ㅋㅋㅋㅋㅋㅋ 근데 애들 반응이 더 웃김ㅋㅋㅋ
└ 지한 : 저거 찢어버려
민성 : (눈으로 심한 욕)
유연 : 잠깐. 타임. 이거 노린 거 아니야? (출제 의도 의심)
청 : 맞잖아! 고추! 율무가 고추 세웠다!
백야 : 아아악! 조용히 해!
율무 : ……. (아래 봄)
- 아니 시바ㅠㅠㅠ 나율무 밑에는 왜 보는데ㅠㅠㅠㅠ (율무 짤.jpg)
- 백야 얼굴 터지겠다ㅋㅋㅋㅋㅋㅋ (백야 소리 지르는 짤.gif)
- 오히려 좋아 (청이 입 막으려고 달려드는 백야 짤.gif)
- 애들 벌칙은 언제 한다고 말 안 했지? 오늘 멘트 때 하려나ㅋㅋㅋ
어젯밤, 청이의 활약으로 혼이 쏙 빠진 멤버들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필승에게 연락하려던 백야도, 백야와 대화를 나눠 보려던 지한과 민성도.
눈을 뜨자마자 필승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백야는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한백야.”
뜨끔-
저승사자 같은 부름에 개복치가 꿈틀거렸다.
백야가 그랬듯 지한도 눈을 뜨자마자 잊고 있던 어제의 통화를 떠올린 탓이었다.
‘어, 어떡하지.’
짧은 사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지한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알 것 같았던 백야는 핸드폰을 뒤집으며 다시 잠든 척했다.
<연기 웅덩이(C)> 스킬 덕분에 연기는 자연스러웠으나 눈치 백 단에겐 통하지 않았다.
“깬 거 다 알아. 이야기 좀 해.”
지한이 친히 침대 앞까지 행차해 이불을 걷어 냈다.
“어떻게 알았대….”
“입술에 힘이 너무 들어갔잖아.”
백야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대화하고 싶지 않음을 온몸으로 티 내던 개복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에 앉은 지한은 그의 턱을 움켜쥐며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왜 내 눈을 피해?”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럼 나 봐.”
백야는 슬쩍 시선을 들어 힐끔거리다가 금방 눈을 피했다.
“피하는 거 맞네.”
하랑의 말처럼 백야가 저희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핸드폰을 들어 민성에게 전화를 건 그는 ‘저희 방으로 넘어오라’는 용건만 전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민성이 형까지 부른다고?”
“같이 들었으니까.”
역시.
어제 비상계단에서 했던 필승과의 통화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뭐라 그랬더라…?’
첫 콘서트의 여운에 피로까지 겹쳐 어제 일인데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백야 일어났어?”
마침 문이 열리며 민성이 들어왔다.
이때, 지한의 관심이 쏠리는 틈을 타 백야가 도망을 시도했다.
침대 위로 몸을 한 바퀴 굴러 반대편으로 착지한 개복치는 냅다 화장실로 달렸다.
“뭔데? 뭔데!”
당황한 민성이 수납장 위의 닭 인형을 집어 문 사이로 빠르게 밀어 넣었다. 엄청난 순발력이었다.
꾸웨에에엑-
“으악!”
놀란 백야가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사이 문을 완전히 열어 퇴로를 차단한 민성과 지한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백야를 내려다봤다.
“염병…. 가지가지 하네 진짜. 너 수상한 거 너도 알지?”
“제대로 말하기 전까지 여기서 나갈 생각하지 마.”
달칵-
문을 잠근 지한은 어쩐지 화가 나 보였다.
“돌려 말하는 거 잘 못 하니까 그냥 말할게. 한백야 너 죽고 싶어?”
시작부터 죽고 싶냐는 협박에 백야가 고개를 힘껏 도리질 쳤다.
지한의 말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냐’는 질문이었지만 백야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 듯싶었다.
“아, 아니.”
“근데 왜 그런 말을 해? 머리 굴릴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지한이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있었던가.
동생이지만 분위기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민성도 주눅이 들었다. 다소곳이 모인 토끼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 주면 안 될까…? 진짜 기억이 안 나서….”
백야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한 번에 죽는 게 깔끔하고 더 낫다 그랬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냐니.
백야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까.
필승도 방법이 없다 그러지, 그렇다고 필승한테 밝힌 것처럼 멤버들한테 말할 수도 없지.
물론 말할 수 없기보단 싫은 것에 더 가까웠지만.
그렇지 않아도 에러창이 뜬 시점이 두 사람이 나타난 순간과 엇비슷해 기분이 찝찝하던 참이었다.
“내가 게임 이야기 한 거라 그랬잖아…. 너희가 오해한 거라고….”
백야는 이번에도 게임을 핑계로 둘러댔다.
그 순간, 처절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꾸웨에엑!
쓰임을 다하고 바닥에 버려진 닭 인형을 지한이 있는 힘껏 밟았기 때문이다.
“끄악…!”
“어우 씨. 깜짝이야.”
민성도 놀랐는지 흠칫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밟힌 게 닭 인형이기는 하지만, 지한의 얼굴을 보니 밟히는 건 조만간 백야가 될 것 같았다.
그에 주눅이 든 민성은 백야의 옆구리를 찌르며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너 거짓말 그만하고 사실대로 말해. 그… 혹시 사고 쳤니? 회사에도 비밀로 해야 되는 거야?”
“…….”
“네가 바른대로 말해야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
함께 추궁하러 들어왔지만, 이 이상 다그쳤다가 백야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하면 오늘 공연은 파국이었다.
위급한 상황에도 리더라는 직책을 잊어버리지 않은 민성은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백야의 다물린 입술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지한이 팔을 걷으며 백야에게 손을 뻗었다.
“잠까안! 잠깐!”
민성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폭력은 절대 안 된다고 온몸으로 막아섰다.
백야도 조금 쫄았는지 어깨가 살짝 안으로 말려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를 담가 버릴 것 같은 표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지한은 손을 뻗어 샤워기를 집어 갈 뿐이었다.
“말 안 하면 튼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개복치에게 차가운 물이라니.
피도 눈물도 없는 극악무도한 놈이었다.
“너무해!”
“나도 네가 너무해. 자꾸 거짓말만 하니까.”
그룹은 팀워크와 신뢰가 생명인데, 네가 이렇게 나오면 앞으로 널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오자, 백야는 그제야 조금 심각성을 느꼈다.
“나는… 난….”
백야가 턱에 호두 한 알을 품었다.
“나는 너네 걱정시키기도 싫고….”
“걱정시켜.”
지한의 단호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우리 팀 와 줘서 고맙다고 한 말 가볍게 들은 모양인데 진심이야. 그래서 네가 무슨 사고를 쳐도 무조건 네 편만 들어 주겠다고도 했어. 혹시 날 못 믿어서 그래?”
백야가 아니었다면 더 큰 고민으로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실수 하나 덮어주는 것쯤이야 지한은 몇 번이고 해 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해 줘.”
지한이 먼저 항복을 선언하듯 샤워기를 내려놓았다. 지한의 진심이 통했는지 백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뭐 때문에 그러는데? 그 사촌 형이라는 사람도 다 개뻥, 아니 거짓말이지? 그 사람이랑 관련 있지?”
민성의 지원 사격까지 이어지자 백야의 마음이 약해졌다.
아기 호두는 점점 자라나 선명한 주름을 만들었다.
“히잉….”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은 에러도 났고, 시스템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으니까 지금이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굳게 닫혀 있던 백야의 입술이 비장하게 열렸다.
“나 안 미쳤어.”
비밀을 털어놓으랬더니 대뜸 본인은 미치지 않았다는 말에 두 사람은 조금 당황했다.
“진짜 안 미쳤어.”
미치지 않았음을 재차 강조하는 백야에게 민성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누가 너보고 미쳤대?”
고개를 도리질 친 백야는 입술을 잘근거리더니 한 번 더 강조했다.
“진짜 안 미쳤어. 알겠지?”
“그래. 너 안 미쳤어. 뭐, 약속이라도 해 줘? 도장, 복사까지 해?”
민성은 성격이 급한 편이었다.
개복치의 뜸 들이기를 기다리지 못한 토끼가 급발진하자 지한이 손목을 움켜쥐었다.
“형.”
은근한 악력이 전해지는 게 재촉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협박이 느껴졌다.
끼잉….
저것 봐.
어떻게 꼬신 놈인데 눈썹이 내려간 게 다시 마음의 문을 닫은 것 같아 보였다.
원래 이런 애들은 살살 녹여 먹어야 한다고.
지한은 민성의 손목을 당겨 와 자신의 뒤로 보냈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말을 하든 네가 한 말이면 다 믿을 거야.”
어린아이를 달래듯 살살.
사실 그때까지도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백야는 끝내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여기는 게임 속이야!”
눈을 감은 채 꽥 소리를 질렀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숨도 잘 쉬어지고 아픈 곳도 없었다.
조심스레 눈을 떠 보니 지한과 민성도 그대로 있었다.
‘대박!’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직거리던 에러창이 선명해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반면 지한과 민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백야의 말을 최대한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단숨에 받아들이기엔 백야의 비밀이 너무 놀라웠다.
“…게임?”
“여기가 게임 속이라고?”
“으응….”
백야는 멤버들의 눈치를 보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리했다.
그러나 나직이 들려오는 한탄에 호두가 다시 나타났다.
“염병. 이게 뭔 소리야.”
“…염병?”
백야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충격에 굳어 버렸다.
아차 싶은 민성이 해명하려 했으나 백야의 서운함이 먼저 터져 나왔다.
“이것 봐, 이것 봐. 안 믿을 줄 알았어. 내가 그럴 것 같아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나 미친놈 아니라고, 말하기 싫다고 했는데! 싫다는 사람 막 화장실에 가둬 놓고 막 협박하더니, 말하니까 염병이래. 씨이….”
“저기, 백야야….”
“한백야. 진정해.”
“난 진짜 두 사람 믿고 큰맘 먹고 말해 준 건데! 시작도 하기 전에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형 나빠! 미워!”
시작이 이렇게 스펙터클한데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아니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형 나빠.
단 세 글자였지만 민성은 상당한 타격을 입고 휘청거렸다. <병약미(S)>에 <연기 웅덩이(C)>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욕을 먹은 건 민성이지만 지한도 반응했다. 덕분에 그는 특정 단어를 금지당해야만 했다.
염병 금지.
이런 상황에서 그걸 금지당하다니. 그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염병….’
넌 진짜 저 말을 믿는다고?
고양이를 노려보는 토끼의 눈에 배신감이 어렸다.